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의 시를 한시로 작시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君去藍山映霞楓
誓冷成塵逐風空
初吻追憶刻命痕
香言花容聵盲中
相見憂別別望逢
驚心悲湧新生恫
移悲釀希莫涕漣
愛歌繞默韻無窮
- 작시 노트
1. 형식: 고전 한시의 칠언율절 형식을 따르며, 2·4·6·8구의 종성 'ㅇ'으로 압운을 맞추었습니다. (楓-공/空-공/痕-혼/中-중/逢-봉/恫-동/漣-련/窮-궁)
- 공(楓)·공(空)'은 운모 '옹'의 공통성, '봉(逢)·동(恫)'은 '옹' 계열의 유사운으로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2. 의미 구조:
- 전반(1-4구): 님의 이별과 상실감을 자연 이미지(청산·단풍)와 은유(맹세→차가운 먼지)로 표현
- 후반(5-8구): 이별의 슬픔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사유를 역설적 대구(相見憂別↔別望逢)로 강조
3. 한자어 선정:
- '香言花容'(향기로운 말·꽃다운 얼굴) - 원작의 감각적 이미지를 고전적 어법으로 승화
- '愛歌繞默'(사랑의 노래가 침묵을 휘감음) - '제 곡조를 못 이기는'의 역동성을 '韻無窮'(끝없는 리듬)으로 재해석
4. 시적 장치:
- 대구법: '相見憂別(만남에 이별을 근심함)' ↔ '別望逢(이별에 재회를 바람)'
- 역설: '聵盲中(귀먹고 눈멂)'으로 표현된 사랑의 집착과 '移悲釀希(슬픔을 희망으로 발효)'의 변증법적 전환
이 변역은 원작의 현대적 정서를 한시의 엄격한 규범 안에서 재창조하며, 특히 '눈물 대신 희망을 발효한다'는 원작의 핵심 메시지를 '釀希'(희망을 발효하다)라는 독창적인 조어로 압축하였습니다.
뜻풀이
1연
君去藍山映霞楓 (군거 남산 영하풍)
님은 푸른 산을 떠나 노을에 비낀 단풍길을 가네
- 君(군): 님
- 映霞楓(영하풍): 노을에 빛나는 단풍
誓冷成塵逐風空 (서랭성진 축풍공)
차가워진 맹세는 먼지 되어 바람 따라 흩어지네
- 誓冷(서랭): 식어버린 맹세
- 逐風空(축풍공): 허공의 바람에 쫓기다
初吻追憶刻命痕 (초문추억 각명흔)
첫키스의 기억은 운명에 흔적을 새기고
- 刻命痕(각명흔): 삶에 각인된 상처
香言花容聵盲中 (향언화용 외맹중)
향기로운 말과 꽃 같은 얼굴에 귀먹고 눈멀었도다
- 香言花容(향언화용): 님의 감각적 매력
- 聵盲(외맹): 집착으로 인한 감각 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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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
相見憂別別望逢 (상견우별 별망봉)
만남에 이별을 걱정하듯, 이별에 다시 만남을 믿네*
- 憂別(우별): 이별에 대한 근심
- 望逢(망봉): 재회를 기대함
驚心悲湧新生恫 (경심비용 신생동)
놀란 가슴엔 새로운 슬픔이 솟아나고
- 悲湧(비용): 슬픔의 물결
- 新生恫(신생동): 태어나는 고통
移悲釀希莫涕漣 (이비양희 막체련)
슬픔을 옮겨 희망을 빚으니 눈물 마르리라
- 釀希(양희): 슬픔을 희망으로 발효시킴
- 莫涕漣(막체련): 눈물의 흐름을 멈춤
愛歌繞默韻無窮 (애가요묵 운무궁)
사랑의 노래가 침묵을 휘감아 끝없이 울리네
- 繞默(요묵): 침묵을 에워싸다
- 韻無窮(운무궁): 영원히 이어지는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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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해석
- 자연의 은유 : 푸른 산(藍山), 단풍(霞楓), 바람(風)은 이별의 정한(情恨)을 상징합니다.
- 역설적 구조 : "만남에 이별을 걱정한다(相見憂別)" ↔ "이별에 만남을 기대한다(別望逢)"는 대구로 희망을 강조합니다.
- 감각적 이미지 : "향언(香言)·화용(花容)"은 님에 대한 집착을, "聵盲(귀먹고 눈멂)"은 사랑의 맹목성을 드러냅니다.
- 정신적 승화 : "移悲釀希(슬픔을 희망으로 전환)"는 원작의 "새 희망의 정수박이"를 한시적 경지로 승격시킨 표현입니다.
이 시는 고전 한시의 형식에 현대적 정서를 투영한 작품으로, 눈물 대신 희망을 "빚는(釀)" 과정을 통해 애상(哀傷)을 초월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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