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마땅히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寧은 항상 義寧을 선택했습니다.


寧(의령) 지명을 보면 "마땅히 편안히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한 지명입니다.이 지명은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의령으로 개명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마땅히 편안하려면 얼마나 큰 노고가 동반되어야 하는지 불문가지이지만 의령은 실제로 그렇게 해내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운 때 임진왜란 시기에는 망우당 곽재우가 있었고 곽재우 휘하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탐진안씨의 입향조 지헌 안기종이 있었습니다.일제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을 위한 자금의 60%을 댄 백산 안희제가 있었습니다. 삼성 이병철,LG구민회,효성 조홍제 창업주도 유명하지만 1조 장학금의 관정 이종환 삼영화학 회장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의령의 바위조차 대쪽같이 곧고 떡시루를 쌓아올린 듯한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이땅의 위인들이 수두룩합니다.의령의 인물들을 보면 더할나위없이 일처리를 잘 해 내었으니 그 근간에는 관정헌에서 본 “지정(至正),지의(至義),지관(至寬),지시(至施)”가 이해가 되었습니다.“더할 나위없이 아주 정당하고,더없이 올바른 조리(條理),더 없이 너그러우며,더 없이 베푼” 사람들이었습니다. 

 
 

- 일시: 2025-2.15 10:30 ~17:30
- 날씨: 비는 오지 않았지만 대체로 흐림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190km

 

관정 이종환 생가
불양암(호미산성,탑바위)
입산마을(백산 안희제 생가)

 

2025.2.15

 

그동안 부산지방은 별로 눈이 없었지만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렸고 날씨도 추워서 짧은 여행조차 못한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친의 연세가 아흔이 되어 촌집 작은방으로 트레이딩 룸을 옮겼고,해외선물에 많은 공부를 했고 같이 공부하던 주식투자클럽의 동년배 친구가 별세함에 따라 다소 경황도 없었습니다.2025년은 을사년으로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된 것 처럼 설날에 별세한 故 김홍경 회장의 죽음 앞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중거(元重擧·1719~1790)는 친구의 죽음을 두고 


"人世一番花(인세일번화)
乾坤是大樹(건곤시대수)
乍開還乍零(사개환사령)
無寃亦無懼(무원역무구)

인생은 한 번 피는 꽃
천지는 큰 나무다.
잠깐 피었다 도로 떨어지나니
억울할 것도 겁날 것도 없다."

고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충격이 각성이 되어 문리가 터지는 계기가 되어 처음으로 한시 자작을 했습니다.

輓故投資會長 (고 김홍경 투자회장을 애도하며)

古徑秋葉積 (고경추엽적)
寒窓夜月孤 (한창야월고)
停杯望雲處 (정배망운처)
千里暮色無 (천리모색무)

옛길에 가을잎 쌓여 있네  
찬 창가에 밤달이 외로이  
잔 멈추고 구름 바라보는 곳  
천 리 밖 노을빛 사라지네

 

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의 역설적 순환을 염두에 두고 "낙엽(과거의 흔적) → 달(현재의 고독) → 구름(변화하는 현재) → 노을(소멸하는 미래)"로 표현했습니다.  

[자작한시 모음]


이제 1월이 지나 2월중순이 되니 목련은 솜틀 같은 몽우리를 내밀고 매화도 꿈틀거리는 시점이라 반나절 여행을 떠납니다.

 

관정 이종환 생가에 다다르니 의령군 용덕면(宜寧郡 龍德面)으로 진입합니다.제가 태어난 곳이 김해 용덕(龍德)마을이고 제가 또한 갑진년 용띠라서 지명이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관정 이종환 생가

 

관정장학재단(관정이종환교육재단) 설립처음에는 출연재산이 10억원이었으나 현재는 8,000여억원으로 증가함으로써 국내 최대 장학재단입니다. 2년 가까운 준비 끝에 재단이름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으로 바꾸고 2002년 4월 30일 관정장학사업계획 발표 및 장학금수여식을 계기로 새로 출범했습니다.재단의 연간 장학사업비는 출연재산에서 나오는 과실금 150억원으로 충당하고, 특히 2002년도 장학사업의 경우 국내장학생 808명과 국외유학 장학생 100명 등 모두 908명이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또 마산고등학교의 영재교육과정을 돕기 위해 시설비 2억3천만원과 매월 운영비 1,000만원씩 지원했고 오늘날은 지식정보화시대이고 여기에 앞서 나아가려면 세계적인 차원의 지식과 정보경쟁에서 이겨야한다고 하여 “나라나 기업이나 살림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 키운다”,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하지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련다”가 바로 관정의 생활철학이자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의 정신이라고 합니다.

 

생가를 둘러보니 왠만한 궁궐보다 더 정성을 들여 건축을 한 것으로 보이고 정원도 상당한 공력이 든 것으로 보입니다.

 
 



 

수백년은 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가 인상적입니다. 

"무한추구하라.도전없는 성공은 없다.공부할때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 이종환 회장

 

 

용틀임 하는 향나무도 대단합니다.

지정(至正),지의(至義),지관(至寬),지시(至施)...이 글자 만큼 이종환 회장을 잘 설명해주는 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할 나위없이 아주 정당하고,더없이 올바른 조리(條理),더 없이 너그러우며,더 없이 베풀었다는 의미입니다.

 

소나무 아래 소반의 다리가 특이해서 보니 애자입니다.애자(碍子, insulator)는 전선과 그 지지물과의 사이를 절연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로 일반적으로는 전주 · 철탑(송전탑) 등에 장착되는 전력용 또는 전신용의 것을 가리킵니다.이종환 회장이 돈을 번 사업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모과나무 분재와 바위를 타고 자라는 나무가 눈길을 끕니다.

 

이 모과나무도 수백년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관정헌 정자는 눈에 익은데 창덕궁 후원 부용정을 재현했다고 합니다.연못에는 비단잉어가 유영을 합니다. 

관정 이종환 회장의 송덕기입니다.눌러 확대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불양암

 

먼저 호미산성으로 오릅니다.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호미산은 산의 모습이 호랑이 꼬리 처럼 생겨서 붙은 산명이고 해발 103m에 불과하지만 아래로 남강이 흐르고 있어서 자연해자의 역할을 합니다. 망우당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의병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탑바위는 의령의 바위구조를 잘 설명해줍니다.직각의 절편들이 떡시루에 쌓은 듯한 인상입니다.탑바위는 가장 절실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합니다.의령이니 부자가 되고 싶은가요? 사랑을 이루고 싶은가요,아이들의 공부?,가족의 건강 등 몇가지를 제시해 놓았습니다. 

 

불양암은 남강 변 바위에 매달리 듯 위치하고 있는데 비구스님 절이었습니다.이곳은 의령의 일출명소이고 평소에도 뷰가 좋아서 의자에 걸터앉아 차 마시기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입산마을

입산마을을 빛낸 인물들이 마을입구에 있습니다.안창제,안준상,안호상,안균,안기종,안효제,안희제...모두 안씨입니다.안기종은 임란 당시 의병활동을 했고,백산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설립했는데 백산기념관이 부산에 있습니다.예전 직장 근처라 백산 안희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안효제는 수파집,안창제는 송은집을 냈고, 안준상은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제헌의원을 지냈습니다.안호상은 철학박사로 호는 한뫼,초대 문교부장관이셨습니다.안균은 초대민선군수를 지냈습니다.

 

마을입구 길옆 거의 드러누운 괴목이 인상적입니다.  

 

 

의령 안호상 고택입니다.안호상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말을 지키기위해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냈습니다.

 

의령 탐진 안씨 종택은 안영제가 지은 종가라고 합니다.안영제는 자(字)는 화익(華益)이요, 호(號)는 삼수(三守)이며 탐진인(耽津人)으로 조선왕조 중엽에 12대조께서 의령에 입향하여 세세대대로 천석부호로 누전하여온 가문으로서 임란 시에는 10대조인 지헌공 기종(止軒公 起宗)께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장군 휘하에서 군량을 전담하고 혁혁한 공훈을 세웠습니다.지헌공 고택이라고 되어 있는데 10대인 안기종의 고택이라는 의미입니다..

삼수공 안영제는 선대의 거룩한 휴적을 이어받아 천재지변을 당하여 인리민(隣里民)이 기사지경(饑死地境)이 되었을 때에는 평소에 비축하여 두었던 전곡(錢穀)을 아낌없이 헐어서 구휼(救恤)·구술 함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이러한 선행이 전파되어 원근에서 인심 집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에 활빈당(活貧黨)이 성행하여 도처에서 부호 가의 재산을 마구 약탈 방화하여 극빈자에게 나누어주고 하였는데 맹두목(孟頭目)이 부하들에게 엄명하기를 안씨가 세거하는 입산(立山)마을 10리내에는 절대로 침입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삼수공의 선행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산 안희제 생가입니다.백산 안희제는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습니다.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60% 이상을 지원하였다고 합니다. 1907년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창설했습니다. 1909년 10월 윤세복(尹世復)·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고,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습니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해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고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습니다.

 

황계분운득향자 黃溪分韻得香字 - 백산 안희제

黃江葭露白(황강가로백)
倻岑樹雲蒼(야잠수운창)
俛仰山水裏(부앙산수리)
所謂宛在央(소위완재앙)
渺茫迷津筏(묘망미진벌)
招招願須卬(초초원수앙)
始看滄海大(시간창해대)
喟然徒望洋(위연도망양)

황강의 갈대 이슬은 희고
가야산 숲 구름은 푸르다
위아래 산수를 두루 보니
이른바 물 가운데 있는 듯
아득히 희미한 나룻배에서
손짓하며 불러 나를 기다리네
비로소 창해의 넓음을 보나니
그저 큰물 쳐다보며 탄식할 뿐

 


의령 상로(霜露)재는 탐진 안씨의 조상을 기리기 위한 제사용 건물입니다.1908년에는 이곳에 창남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워낸 역사가 깃든 곳입니다.

 

마땅히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寧은 고통스러운 길이었지만 義寧이었습니다.
그것도 더할나위없이 지극히 옳았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되찮은 나라를 이승만 시절이나 전두환 시절에도 없었던 독재를 위해 "노상원 수첩"의 500명 "확인사살"의 명단을 보니 암울합니다. 내란죄의 핵심은 계엄사유가 없는데 비상계엄을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이 했다는 것이고 국민의 힘이 내란죄가 아니라는 식으로 계속 몰고 가는데 그런식으로 몰고 가면 그 끝은 내전 밖에 없습니다.국헌을 흔들어서 대한민국을 아마겟돈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격화되면 정말 큰일입니다. 4월쯤 되어야 안정과 혼란 중 결판이 날 것 으로 보입니다.모닝 컨설턴트 여론조사의 75%의 선량한 대한민국의 국민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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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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