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정선)하늘과 땅과 인간이 조화로운 세상은 언제나 올까

 

태백산은 천제단이 있습니다. 태백산 정상에 위치한 고대 제사 유적으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신성한 장소입니다.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천(祭天) 의식이 이어져 왔으며, 현재는 국가민속문화유산(제22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천왕단,장군단,하단은 각각 하늘(天), 사람(人), 땅(地)을 상징해 동양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반영합니다.


태백산 아래에 단군성전이 있고 단군 성전 입구에 태백산 석장승이 있습니다.단군은 처음부터 홍익인간,제세이화를 말했기 때문에 서양의 신 중심과 달리 인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태백산은 한국인에게는 성지이며 하늘과 연결되는 가장 높은 곳인 동시에 태백시가 형성된 이유인 석탄산업을 생각해보면 "막장"이라는 말 그대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가장 낮은 곳을 떠올리게 합니다.실제로 석탄 채굴을 위해 광부들은 1000M이하 지하까지 들어가서 일을 했습니다.

정선은 정선아리랑으로 유명합니다.정선 아리랑은 가락이 느리고 구슬프며 구성집니다.정선 아리랑의 기원은 고려가 멸망한 뒤 충절을 지키려는 선비들의 한과 그리움, 그리고 민중의 삶과 애환이 어우러져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곳에서 민중의 삶과 애환이 역사로 한겹 더 드리워진 것은 정선의 동학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일제감정기 이후 친일 기득권에 의한 망국 수준의 내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몇 줌 안되는  대법원에 의한 사법 리스크가 5천만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습니다.선량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잘 살수 있는 조화로운 세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들 기득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좀비처럼 끊이지 않고 출몰하여 비상식적이고 몰상식적인 행위가 예측불허의 세상으로 흔들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또한 국난극복의 DNA 충만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잘 헤쳐 나갈 것으로 봅니다.  

 

- 일시: 2025-5-3 18:30 ~5-4 22:00
- 날씨: 대체로 맑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붐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760km

 

태백산 석장승 → 태백 석탄박물관 → 심원암  → 녹송정(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60-5) → 광덕효행공원( 정선군 남면 광덕리 1003-5)

태백산 석장승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소도동 192 (인근 천제단길, 태백산로)
태백석탄박물관 :강원도 태백시 천제단길 195
심원사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고원로 247-15 (황지동)
녹송정: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60-5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2길 13-10
광덕효행공원:정선군 남면 광덕리 1003-5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남면 광덕길 356-12

2025.5.3

 

처가에서 빙모님을 위한 가족행사에서 거하게 먹고 모임을 마친 후 바로 태백시로 향합니다.황금연휴이지만 연휴내내 비가 온다고 했는데 다행히 5월 4일은 비가 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다행입니다.

 

2025.5.4 08:30

 

태백산은 참 오랫만에 찾아옵니다.이번엔 등산 목적이 아닌 문화유산답사라서 바로 방랑의 한량 모드로 들어갑니다.

 

태백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영산(靈山)으로 여겨졌으며, 많은 문인과 시인들이 태백산의 장엄함과 신령스러움을 노래했습니다.

太白山 - 작자미상


白雲深處有人家
松風吹斷碧瑤華
千年靈氣藏山腹
萬古神祠鎮海涯

 

 

태백산 -작자미상

흰 구름 깊은 곳에 사람 사노라
솔바람 휘돌며 푸른 산 빛을 끊는다
천년의 신령한 기운 산속에 감추었고
만고의 신단이 바다 끝을 굳게 지키네

 

▷당골광장 안축의 등태백산 한시비


이렇게 태백산을 음미하며 당골광장에 주차하고 먼저 석장승을 찾아가는데

화답하는듯이 근재 안축의 "등태백산" 한시비가 보입니다.

 

 
 


登太白山
謹齋 安軸 作

直過長空入紫烟 직과장공입자연
始知登了最高巔 시지등료최고전
一丸白日低頭上 일환백일저두상
四面群山落眼前 사면군산락안전
身逐飛雲疑駕鶴 신축비운의가학
路懸危磴似梯天 로현위등사제천
雨餘萬壑奔流漲 우여만학분류창
愁度縈廻五十川 수도영회오십천

태백산에 오르다 ~

근재 안축 지음

긴 허공 곧게 지나 붉은 안개 속 들어가니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네
둥그렇고 밝은 해가 머리 위에 나직하고
사면으로 뭇 산들이 눈앞에 내려앉았네
몸은 날아가는 구름 쫓아 학을 탄 듯하고
높은 층계 달린 길 하늘의 사다리인 듯
비 온 끝에 온 골짜기 세찬 물 불어나니
굽이도는 오십천을 건널까 근심 되네

 

▷태백산 석장

석장승의 생김새는 문인석에 가까운데 근처 뒤에 있는 단군성전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절묘한 석장승입니다. 지장(地將)이라는 글씨가 바닥에 보입니다.얼굴의 윤곽이 잘 보이지 않는데 특히 코가 거의 없습니다. 


맞은편 천장(天將) 석장승은 그나마 얼굴 윤곽이 뚜렷합니다.부산은 이미 벚꽃과 복사꽃이 모두 졌지만 이곳은 해발 1000M 되는 곳이라 아직까지 꽃들이 한창입니다.봄을 다시 선물 받은 느낌입니다.

시심 충만한 아침이라 끄적여봅니다.



늦봄 태백산 석장승을 바라보며
-김영한

온화한 미소, 점잖은 돌의 얼굴
태백산 초입, 두 장승이 마주 선다
천장, 지장-하늘과 땅의 이름을 새긴
자연석 받침 위에 굳건히 서서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견디고 있다

봄꽃은 짧고, 산자락엔 연둣빛 새잎
계곡물 소리 맑게 흐르고
함박꽃, 산목련이 순백의 빛을 피운다
그 곁에서 장승은 말없이 산을 지킨다
장군봉을 올려다보며,
천제단의 옛 제향을 기억하듯

지장의 코는 많이 닳아
수많은 손길, 기원의 흔적을 품고
마을의 안녕을 빌던
수호신의 역할을 묵묵히 이어간다
온화한 인상-문인석 같기도,
미륵의 자비로움 닮기도 하여
돌이지만 따뜻한,
태백의 봄날과 닮았다

나는 오늘,
늦봄의 바람과 꽃향기 속에
이 돌장승 앞에 잠시 멈춰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소망을
조용히 마음에 새긴다

이렇게 된 이상 한시로 번역하고 붓펜으로 글씨도 씁니다.

《立泰白山石將偶望春暮》 -仙文 金永漢

泰伯山前偶石尊 태백산전우석존
溫顏肅貌對晨昏 온안숙모대신혼
天藏地護名長刻 천장지호명장각
風雨千年守舊村 풍우천년수구촌

春華易逝新綠嫩 춘화이서신록눈
澗水淙淙白玉繁 간수종종백옥번
傍嶺無言同岳峙 방령무언동악치
憶曾天祭仰軍門 억증천제앙군문

地藏鼻蝕民祈跡 지장비식민기적
護境安鄕默不言 호경안향묵불언
似佛似儒皆暖意 사불사유개난의
石心春煦共溫存 석심춘후공온존

今佇芳風春暮裏 금저방풍춘모리
漫將三願刻深衷 만장삼원각심충
一祈雨順蒼天闊 일기우순창천활
再願地豐人世融 재원지풍인세융

 

《늦봄, 태백산 석장승을 바라보며》

泰伯山前偶石尊 (태백산 앞에 우뚝 선 돌 장승)
溫顏肅貌對晨昏 (온화하지만 엄숙한 얼굴로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네)
天藏地護名長刻 (하늘과 땅의 이름이 새겨져)
風雨千年守舊村 (천 년 바람비 속에서도 마을을 지키네)
春華易逝新綠嫩 (봄꽃은 쉽게 지지만 산새잎은 연둣빛)
澗水淙淙白玉繁 (계곡물은 맑게 흐르고 산목련은 백옥처럼 피네)
傍嶺無言同岳峙 (산줄기 옆에서 말없이 우뚝 서서)
憶曾天祭仰軍門 (옛 천제단의 제사를 군봉과 함께 기억하듯)
地藏鼻蝕民祈跡 (지장의 코는 닳아 백성의 기도 흔적)
護境安鄕默不言 (고향을 보호하되 묵묵히 말하지 않네)
似佛似儒皆暖意 (부처 같기도, 선비 같기도 한 따뜻한 모습)
石心春煦共溫存 (돌이지만 봄햇살 같은 온기를 품었네)
今佇芳風春暮裏 (오늘 늦봄 향기 바람에 멈춰 서)
漫將三願刻深衷 (세 가지 소원을 마음 깊이 새기네)
一祈雨順蒼天闊 (첫째, 하늘에 비가 순조로우길)
再願地豐人世融 (둘째, 땅이 풍요롭고 세상이 화합하길)

▷천부경

단군성전 앞이니 천부경 비석도 보입니다.
아래쪽엔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글씨도 보입니다.자연의 순리와 이치에 맞게 살면서 널리 이롭게 하는 인간이 되라는 뜻입니다.

▷단군성전

안타깝게도 무허가 건물이어서 관리가 잘 안되고 있습니다. 무허가 건물인 이유는, 건물이 세워진 땅의 소유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93년 단군성전 개축 당시, 땅 소유자 2명이 태백시에 기부채납하겠다고 약속해 건물을 먼저 지었으나, 소유자 중 1명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땅 소유권 이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태백시가 상속인들에게 기부채납이나 매각을 요청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고, 이로 인해 건축법상 등기와 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단군성전은 30년 넘게 무허가 건물로 남아 있으며, 공식적으로 관리나 보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군(檀君)은 고조선의 시조로,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의 최고 제사장이자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어원적으로는 몽골어 ‘텡그리(Tengri, 하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텡그리’는 하늘의 신 또는 신을 모시는 샤먼을 뜻하며, 단군 역시 하늘과 소통하는 제사장, 즉 샤먼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단군’은 한자로 ‘제단(壇)’의 ‘단’과 임금 ‘군(君)’이 합쳐진 것으로, 문자화 과정에서 제사장을 의미하는 ‘당골’ 또는 ‘단골’이 한자어로 변환된 결과라는 해석도 있습니다.원래는 무당(샤먼)이 점을 봐주거나 굿을 해주는 집, 또는 그 무당 자체를 ‘단골집’, ‘단골’이라 불렀습니다.이 집에 자주 찾아오는 사람이 ‘단골손님’이었고, 이 의미가 확대되어 오늘날에는 상점이나 음식점에 자주 가는 손님을 ‘단골’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단군성전 앞 관리동 건물의 장독대 앞의 꽃이 무척 예쁘긴 하지만 어울리지는 않고 몽골의 작은 게르도 있어서 이질적입니다. 

▷석탄박물관

 

고생대 두족류 화석으로 이외에도 많은 화석과 광물들이 있습니다.

석탄을 캐기위한 장비가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았습니다. 막장인생이란 "더 이상 나빠질 데가 없을 정도로 인생이 극도로 힘들고 절망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표현의 어원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갱도의 가장 끝, 즉 ‘막장’에서 유래했습니다.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으로, 위험하고 고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막장’이란 단어가 ‘막다른 길’,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상황’을 상징하게 되었고,
‘막장인생’은 인생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극한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천제단이 있는 태백산 아래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 홍익인간들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심원사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6·25 전쟁 때 화재로 전각이 소실된 후, 1958년 정안 스님이 현재 위치에 법당을 재건하고 ‘심원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그러다보니 과거의 흔적은 별로없고 입구부터 핀 꼴들이 볼만했습니다.복사꽃이 햇살에 반사되어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흰매발톱꽃도 보입니다.

▷녹송정 정선동학농민군 역사비

역사비 뒤쪽에 보이는 126년만에 쓰는 신사발통문을 먼저봅니다.

마지막 글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똑 같은 울림이 있습니다.


126년만에 쓰는 新사발통문
강기희(소설가)


오호, 통재라!
1894년 11월 25일, 그날은 하루 종일 눈발이 날렸겠구나
아니, 몹시 센 강바람이 불어 산발된 머리가 얼굴을 가리기도 했겠구나
왜놈의 포승줄이 목을 휘감을 때는 두 눈을 부릅떴겠구나

"이런 역적놈들! 나라를 들어먹고도 웃음이 나오더냐!"
토벌대로 나선 강릉부사 이희원에게 침을 뱉기도 했겠구나

"내가 내 나라 내 땅에서 쪽바리 왜놈의 손에 죽어가다니!
내 저승에 가서도 왜놈을 징치하리라!"
토벌대를 이끈 일본군 대위 이시모리를 향해선 고개를 당당하게 들었겠구나

찬바람 부는 정선 녹도벌에서 죽어갔겠구나
이찌!니! 산!
일본군 구령에 따라 동지들과 함께 목이 늘어졌겠구나

그리하여,
정선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 장군의 피가 이곳 녹도에 스몄구나
이름 없이 죽어간 숱한 동학농민군의 피는 또 여기에, 저기에 스몄구나
다들 정선 골짜기 골짜기에 살던 정선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비탈밭 갈아 힘겹게 농사짓던 농꾼들 아니었던가

오호라, 들린다!

일본군에 빌붙은 강릉부사 이희원의 웃음소리가!
일본군에 충성한 중군 이진석의 웃음소리가!
일본군 대위 이시모리의 웃음소리가!
빠가야로! 빠가야로 조센징!
하며 비웃는 그 날의 소리가 126년이 지난 지금까지 녹도벌에 떠도는구나!

그리하여,
다시 2020년 11월, 우리는 사람이 곧 하늘임을 알리는 新사발통문을 쓴다
농민 형제들이여!
녹도로 모이시오!

보국안민(補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2020년 11월 25일

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강원도 정선군 녹도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정선 동학농민군의 희생과 역사를 기리기 위해 2020년 11월 25일 세워졌습니다.

[역사적 배경]

1894년 11월, 정선 녹도는 동학농민군이 집결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운 녹도 전투가 벌어진 장소입니다.이 전투에서 많은 농민군이 전사했고, 생포된 이들은 인근 소나무 숲에서 모두 처형당했습니다.정선 농민군 지도자였던 지왈길 장군도 체포되어 11월 25일 이곳에서 효수되었습니다.


[역사비의 의미]


역사비는 동학농민군의 ‘보국안민’(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척양척왜’(서양과 일본을 물리침) 정신을 기리고,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정선군농민회는 매년 11월 25일 지왈길 장군의 기일에 맞춰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날을 ‘정선군 농민의 날’로 지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선과 동학의 인연]

정선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은신하며 교세를 확장했던 곳으로, 동학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정암사 적조암, 무은담, 화암면 싸내 마을 등에도 동학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이 역사비는 정선 동학농민군의 아픈 역사를 증거하고, 동학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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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동학 녹도전투 상세 설명

 

정선 동학 녹도전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시기, 강원도 정선군 녹도(현 정선읍 녹송정 앞)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 연합의 치열한 전투입니다.

 

배경

정선은 19세기 후반 동학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정선 지역 농민들도 동학농민군에 합류했습니다.

 

1894년 10월 20일경, 재정비를 마친 동학농민군 약 3,000여 명이 정선 녹도에 집결하자 정선군수는 도주하였고, 이에 격분한 농민군은 이방(지방 관리)의 머리를 베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전투 전개

농민군이 강릉 재공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강릉부사 이희원은 관군과 민보군을 정선과 평창으로 급파하였고, 11월 1일에는 강원감영에서 추가 관군이 파견되었습니다.

 

11월 3일, 일본군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2개 중대와 감영토포사가 인솔하는 관군이 평창에 도착, 11월 5일 평창 후평리의 농민군을 진압한 뒤 곧장 정선으로 진격했습니다.

 

11월 6일, 강릉 민보군 중군 이진석 부대가 여량을 공격해 일부 농민군을 사살하고 주요 인물을 체포하는 등, 동학농민군의 저항은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녹도전투와 결과

일본군과 감영군, 민보군 연합은 정선 녹도에서 동학농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생포된 농민군들은 녹도 둔치의 소나무 숲에서 전원 처형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정선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지왈길 장군은 1894년 11월 23일 체포되어, 11월 25일 녹도에서 효수(목을 베어 효시)되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정선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인근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기념

녹도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보국안민(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과 “척양척왜(서양과 왜를 물리치자)”를 외치며 저항하다 대규모 희생을 치른 역사적 현장입니다.

 

2020년, 정선군농민회와 정선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녹도에 ‘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를 세워, 이 통한의 역사를 기리고 있습니다.

 

매년 11월 25일, 지왈길 장군의 기일에 맞춰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이 날을 ‘정선군 농민의 날’로 지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요약

정선 동학 녹도전투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국적 확산과 일본군·관군의 무력 진압, 그리고 농민군의 대규모 희생이 집약된 사건으로, 정선 지역 동학농민군의 저항과 비극, 그리고 동학정신의 의미를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녹송정 뒤로 꽃들이 만발합니다.

▷녹송정 도원가곡(桃源歌曲)비

도원가곡(桃源歌曲)은 강원도 정선과 관련된 전설적 노래 혹은 한시로, 정선아리랑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도원'은 고려 충렬왕 때 정선의 옛 지명이었으며, 도원가곡은 '정선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역사적 배경과 전설]

고려 말,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충절을 지키려 했던 고려 유신(遺臣) 72명 중 일부가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전오륜 등 7명의 신하가 정선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옮겨와 충절을 맹세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들이 남긴 한시를 풀어 노래한 것이 도원가곡이며,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始原)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도원가곡의 가사는 "벙어리처럼 말을 삼가고, 배고픔을 견디며, 오로지 충의를 밝히자"는 비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도원가곡의 가사와 의미]
대표적인 도원가곡의 한시(한자로 표기된 아리랑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我羅理 啞囉肄 餓彛要 義朗 古稽露 懶慕艱多
(아라리 아라이 아나이요 아의랑 고계로 나모간다)

이 한시는 이두식 표기로 정선아라리의 가락을 한자로 옮긴 것이며, 해석과 음독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약간 의역해서 우리말로 그대로 읽어보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로 읽혀집니다.처음엔 한시로 생각하고 한자어 뜻을 살펴보았는데 이두식 표기로 보입니다.)

이 가사는 한자의 음을 빌려 정선아리랑의 "아라리요" 가락을 표현한 것으로, 각 구절에는 자조, 충절, 고난, 그리움 등 은둔 유신들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평가와 논란]
도원가곡이 실제 고려 말에 불렸던 노래인지, 혹은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최근에 세워진 비석과 문중 중심의 포장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그러나 도원가곡은 정선아리랑의 역사적 뿌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여겨지며, 정선 지역의 충절과 한, 그리고 아리랑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광덕효행공원 정선지역동학유적지 안내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습니다.도로는 포장은 되어있었지만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좁은길이었고 꾸불꾸불 산으로 오르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덕효행공원 내 정선지역 동학유적지 안내판에는 정선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관련 인물, 유적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1999년 4월 정선군 남면 광덕리 수령마을 입구에 세워진 ‘동학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적비’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선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지도자 유시헌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으며, 비석 뒷면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안내판에는 정선 농민군이 영월, 평창, 충청도 제천·청주 지역 농민군과 연합하여 1894년 9월 강릉 관아를 점령했던 역사적 사실과, 이 과정에서 정선 여량역의 지왈길 등 지역 지도자들의 활약상이 함께 안내되어 있습니다.즉, 광덕효행공원 안내판은 정선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인물과 사건, 그리고 현장 유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방문객들이 정선 지역의 동학운동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동학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의 행적은 아래 더보기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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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의 행적


정암 유시헌(劉時憲, 본명 유인상, 자 도원)은 조선 말기 강원도 정선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동학의 주요 지도자(도접주)로, 해월 최시형 등 동학 2세 교단의 재건과 포교, 조직 강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 주요 행적 및 업적

동학 입도와 해월 최시형과의 인연

유시헌이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69년경 해월 최시형이 영양 일월산에서 양양으로 포덕을 가는 길에 정선·인제에 들렀을 때 입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월이 관헌의 탄압을 피해 강원도 영월, 정선, 인제 등지로 피신하던 시기, 유시헌은 자신의 집(정선 무은담리, 현재의 무릉담리)에 해월을 숨겨주고 집과 식량을 제공하며 동학 재건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 도접주 임명과 교단 내 위상

1875년 11월 13일, 해월 최시형이 정선 유시헌의 집에서 고천제(告天制)를 거행하며 유시헌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했습니다. 도접주는 동학 교단의 지역 조직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유시헌은 강원도 일대의 동학 교도들을 관리·지도하는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 동학 교단 재건과 포교 활동

유시헌은 정선 일대에서 동학 교단의 조직을 재건하고, 비밀 포교와 신도 결집에 힘썼습니다. 그의 집은 동학 교도들의 피신처이자 기도처로 활용되었고, 별채를 지어 동학도인들이 수시로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872년에는 동학 지도자 세정이 양양 감옥에 잡히자, 박씨 부인을 정선 싸내로 피신시키는 등 교단 보호에도 앞장섰습니다.

1878년에는 수운(최제우) 시대 이후 끊겼던 개접(開接, 동학 조직의 재편성)을 자신의 집에서 열었고, <도원기서> 편찬과 <동경대전> 간행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동학농민혁명 전후의 활동

1890년대 동학농민운동기에도 강원도 지역의 동학 조직을 이끌며, 교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초를 다지는데 기여했습니다. 1893년 교단 조직 개편 시에도 강원도 지도자로 언급됩니다.

 

- 유적과 후손의 기념

유시헌의 집은 동학 혁명 이후 불에 타 사라졌으나, 별채 기도처는 한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유택하 역시 동학 활동에 참여했으며, 후손들은 1999년 정선군 남면 광덕리 수령마을 입구에 '동학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적비'를 세워 그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 평가

정암 유시헌 선생은 해월 최시형 등 동학 2세 교단 지도자들이 강원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실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동학 교단의 위기 극복과 재건, 포교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의 집은 동학 교단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강원도 동학의 대표적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광덕효행공원 비석을 중심으로 효자 스물세분의 검은 오석 비석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세워져 있습니다.

 
 

태백과 정선의 답사 일정은 자연, 역사, 민중의 삶과 정신, 그리고 하늘과 땅, 인간의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대법원에 의한 사법 리스크가 망국의 수준이라 나라에 대한 근심이 있었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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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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