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따스하게 빛나는 도시에도 황사가 짙어지면

 

- 일시: 2024-3-30 07:00 ~3-31 07:00
- 날씨: 짙은 황사로 밤 같은 낮
- 몇명: 홀로

 

광양제철소는 포항제철소 대비 3배에 달하는 고효율 무방향성 전기강판 생산량을 보유한다고 하는데 그 영향으로 광양제철소는 대기오염물질 배출 4년 연속 1위라고 합니다.낮과 밤이 빛나는 광양여행의 어두운 면입니다. 백제시대에는 마로(馬老), 통일신라시대에는 희양(曦陽), 고려시대부터는 광양(光陽)으로 불려왔는데 "마로"는 우두머리, "희양, 광양"은 "따스하게 빛나는 햇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현재의 광양은 기존의 농촌에 광양제철소로 인해 물류거점 항만도시로 커다란 도약을 하여 지금은 시(市)가 된 곳입니다.

광양은 경상도인 하동에서 섬진강을 지나면 전남 광양이 되니 하동과 섬진강을 공유한 경계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엔 백제 영향권이었습니다.고종31년인 1894년에는 갑오개혁이 시작되었고
동학농민 봉기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하여 광양의 많은 동학교도가 살해되었는데 섬거역 : 28명 학살(12.10),각면 : 130여명 포살(12.10∼12.11) 되었고 남문(聽潮樓)이 좌수영 수병(水兵)의 방화로 소실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 대비 무능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진령군을 앞세운 민비와 함께 외세를 불러들여 경술국치를 앞당겼습니다. 전작권을 외국에게 넘기게 되는 시기의 출발이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 가장 힘 없는 왕이 광무제 황제라고 했지만 국민들은 광무제 황제라고 하지 않고 지금도 고종이라고 합니다.고종이라면 여전히 왕으로 불려지는데 민비는 왕후가 아닌 황후의 이름인 명성황후라고 하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단죄를 하더라도 조선백성이 해야하는데 일본이 잔인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예전 방식처럼 죽창 들고 민중봉기 할 필요 없이 그냥 투표장에 가서 투표하면 되는 세상입니다.국민이 직접 투표하는 것(참정권-국민투표권)은 동아시아의 중국도 못하는 제도이며 일본은 국회의원은 국민들이 뽑지만 수상은 국민이 직접 뽑지 못합니다.
정관정요로 유명한 위징은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고 하여,민의를 중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민의를 따랐다면 투표하는 손가락 하나가 모여 "너 하고 싶은 것 다해"하며 밀어줄 수도 있고, 민의를 저버렸다면 그 손가락은 수만발의 총알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선거에서 투표행사입니다.투표용지는 곧 총탄입니다.곧 심판의 시간인 선거날짜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380km

 

광양동천내하천섬공원( 전남 광양시 옥룡면 산남리 150-1)
학사대(신재 최산두 유적지:광양시 옥룡면 학사대길 25-163)

쑥붕어빵(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 67-3)

중흥사(중흥산성: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중흥로 263-100)
매천 황현 생가(광양시 봉강면 서석길 14-3)
광양역사문화관(전남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9)
정병욱가옥(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23)

구봉산전망대(전남 광양시 구봉산전망대길 155)

광양김시식지(전남 광양시 김시식지1길 57-6)
배알도(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 1632-13)

 

광양동천내하천섬공원( 전남 광양시 옥룡면 산남리 150-1)

원래 예정에 없던 곳이지만 벚꽃이 예뻐서 잠시 산책을 하며 숨을 고릅니다.벚꽃이 부산과 약간 다르게 보이는데 나무 굵기가 부산보다는 얇고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아래로 많이 처져있어서 색다른 모습입니다.

 

 

학사대(신재 최산두 유적지:광양시 옥룡면 학사대길 25-163)

개인적으로 광양하면 백운산 등산을 했던 것과 쫓비산 등산 이후 다압면 홍산리 매실농원으로 하산한 기억과 순전히 사진을 찍으려고 예전 이맘때 매실농원을 한번 더 찾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신재 최산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곳 학사대는 신재 최산두가 소년시절 10년간 공부 한 곳이라고 합니다.봄물이 불어 계곡을 바로 넘지 못하고 좀더 하류로 내려가 다리를 건너 다시 거슬러 땀흘려 학사대에 도착해보니 그 흔한 한시 편액 한점도 없습니다.   

 

최산두가 이 곳 학사대에서 10년을 계획하고 공부하다 8년 만에 바위굴을 나오면서 우뚝 솟은 백운산에 대한 감흥을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태산이 뒤를 덮어 하늘엔 북쪽이 안 보이고)"이라고 한 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할 때 한 초동이 나타나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큰 바다가 눈앞에 있어 땅엔 남쪽이 없다)"이라 하면서 공부를 더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이에 자극받은 최산두가 10년을 채워 학문을 완성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신재 최산두는 1482년(성종13년) 4월10일 봉강면에서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백운산의 산(山),북두칠성의 두(斗)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조광조 시절 최산두가 속한 신진개혁세력은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으로 기묘사화를 맞아 37세 나이에 화순군 동북으로 유배를 갔고 유배기간이 15년이었으며 유배 풀리고 3년 후 53세로 돌아가셨습니다.유배지에서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 등 후진들이 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쑥붕어빵(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 67-3)

주차하기도 편한 곳에 쑥붕어빵이 보입니다.2개에 천원으로 쑥이 붕어빵과 잘 어울립니다.노부부와 베트남 출신으로 보이는 며느리가 분업을 하여 어묵과 붕어빵을 판매하는데 아침부터 산을 오르내려 시장하던 참에 요기가 됩니다. 

중흥사(중흥산성: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중흥로 263-100)

사찰까지 오르는 초입 도로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라서 긴장하게 됩니다.중흥산성 삼층석탑은 신라말기 작품으로 섬세합니다.위층 기단에는 인왕상,공양상,사천왕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모두 앉아있는데 북쪽의 여래상만 서 있는 모습입니다. 

중흥사 쌍사자 석등은 국보로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있습니다.중흥사의 쌍사자석등은 복제품인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광양역사문화관에도 복제품이 있는데 그곳의 복제품은 웅장할 정도로 컸습니다.

그 외,장난기 많은 귀여운 불상이라는 중흥사 석조지장보살 반가상이 있는데 사진으로만 보았습니다.

중흥사 뒤쪽은 저수지였으며 산을 오르면 바로 토성인 중흥산성이 있습니다.

 

이곳의 벚꽃도 발을 내린 듯 아래로 쳐져있습니다.

 

매천 황현 생가(광양시 봉강면 서석길 14-3)

11살에 지었다는 매천 황현의

"연위어대회동지,류시앵아생장향

연꽃은 고기와 친구되어 한 연못에서 노닐고,
버들과 꾀꼬리는 오래 전 같은 고향에 살았네"

라는 싯귀가 담벼락에 적혀있습니다.


봄이 오니 동백꽃이 절명시를 남기고 죽은 황현처럼 바닥에 진하게 흩뿌려져 있습니다. 

절명시의 "인간 세상의 글 아는 자 되기 정말로 어렵다."는 뜻의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가 오버랩 됩니다. 

 

 

의병장 녹천 고광순의 시신의 수습하고 의병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절명시의 "당시괴불섭진동(當時愧不躡陳東)"에서 보듯이 후회하는 모습입니다. 의병에 가담하지 못했고,동학농민운동 상황을 기록한 동비기략을 보면 매천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선 비판적 시각을 가진 유학자로 혁명적 기질은 보이지 않고 시대에 순응한 조선 마지막 선비로 보입니다.

기존의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의지는 적지만 학교를 세워 개혁하려는 의지는 있어 보입니다. 현실 정치에 실망하여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평생 초야에 묻혀 지냈고 을사늑약에 통분하여 중국망명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여 결국 순절로 지식인의 삶을 마감합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절명시(絶命詩)

매천 황현 선생께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선비의 절개를 지키면서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합니다.칠언절구 4수로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매천집(梅泉集)』(7권, 1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합니다.

 

 

절명시(絶命詩) - 매천(梅泉) 황현(黃玹)

 

 

난리곤도백두년(亂離滾到白頭年) - 난리를 겪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기합연생각말연(幾合捐生却末然) -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금일진성무가내(今日眞成無可奈) -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휘휘풍촉조창천(輝輝風燭照蒼天) -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에 비치는구나.

 

요기엄예제성이(妖氣掩翳帝星移) - 요망한 기운에 가려져 임금별자리 옮겨지니

구궐침침주루지(九闕沈沈晝漏遲) -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겠구나.

조칙종금무부유(詔勅從今無復有) - 이제부터는 조칙조차 받을 길이 없으니

임랑일지루천사(琳琅一紙淚千絲) - 구슬 같은 눈물이 천 가닥으로 흐른다.

 

조수애명해악빈(鳥獸哀鳴海岳嚬) - 나는 새와 들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 - 무궁화 우리 세상 이미 잠기고 빠져버렸구나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 - 가을 등잔 아래 책 덮고 흘러간 긴 역사 생각하니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 인간 세상의 글 아는 자 되기 정말로 어렵도다.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 내 일찍이 나라 위해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지시성인부시충(只是成仁不是忠) - 내 죽음은 겨우 仁을 이룰 뿐,忠을 이루진 못했어라.

지경근능추윤곡(止竟僅能追尹穀) - 이제 겨우 윤곡(尹穀)처럼 죽음에 거칠 뿐

당시괴불섭진동(當時愧不躡陳東) - 그때의 진동(陳東)처럼 나라 위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광양역사문화관(전남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9)

여기에 오니 광양의 역사 전체가 잘 보입니다.매천 황현의 11세 작품은 풍경을 노래한 관조적인 모습의 시라면 신재 최산두의 8세 작품은 완전히 소에 빙의된 모습이 느껴질 정도로 적극적인 느낌이 듭니다.8세가 아닌 80세가 지은 시라고 할 만큼 다양한 지식이 느껴집니다. 

감탄하며 한참을 되뇌입니다.

詠牛(八歲作) (소를 읊음(8세작)- 新齋 崔山斗

爾從麟借尾 炎帝與其頭 이종린차미 염제여기두
地闢中寅子 商正間夏周 지벽중인자 상정간하주
夜奔燕將劫 春喘漢相憂 야분연장겁 춘천한상우
未賴齊王易 煙郊牧笛收 미래제왕역 연교목적수

너는 기린을 쫓아 꼬리를 빌리고
염제(炎帝)가 너 머리를 주었더냐!
땅은 너를 쫓아 축시(丑時)에 열리고
상(商)나라 정월은 너를 세워서 세수(歲首)를 정했구나
밤중에 적진에 돌진하여 연(燕)나라 장수 겁을 먹고
봄날에 숨 헐떡이니 한(漢)나라 재상이 근심하였다네
제(齊)나라 왕이 양(羊)으로 네 몸을 대신 껴않았더라면
아마 들에 목적(牧笛)소리 사라질 뻔하였구나.

 

(필사)

 

매천 황현이 최신재를 언급한 시가 있는데 최신재는 신재 최산두입니다.
신재 최산두는 한미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황현이 봉황새로 평가할 만큼 높게 평가했습니다. 

김황원은 9세기 대유학자로 고려전기 한림학자로 古文을 배워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다고 합니다만 청직한 성격때문에 평탄한 삶을 영위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최산두는 제자 하서 김인후의 제문에 의하면 용과 범의 모습이요,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이 좋았다고 하는데 성격이 호방하고 문장,신필에 가까운 붓글씨(사진 참조:행서초서를 보면 힘있고 유려하며 활달한 성정이 엿보입니다),술을 대하면 거나하고 바둑은 명인,활도 잘 쏘아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대체로 최산두는 사림정신,도학사상,성리학의 정신문화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신재 최산두는 17세때는 김굉필에게 배웠고 18세때 부터 조광조와 함께 했습니다.

 

시인 윤동주와 정병욱 박사의 사진도 보입니다.

 

구봉산전망대(전남 광양시 구봉산전망대길 155)

 

대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구봉산 전망대로 오르니 구봉산 메탈아트 봉수대가 보입니다.스테인레스라고 하는데 아래쪽은 녹이 쓸고 있습니다.

황사가 워낙 심하여 오후 1시반인데 이순신대교와 광양제철소의 모습이 흐릿할 정도입니다. 낮과 밤이 빛나는 광양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밤 같은 낮입니다.

정병욱가옥(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23)

윤동주는 시집 3권을 짓고 기록하여 원고집을 만들어 한권을 윤동주보다는 5살 어리지만 연희전문학교 1학년 어린 후배 정병욱에게 맡깁니다.윤동주와 정병욱은 같이 하숙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습니다.한글 작품은 감추어야 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윤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 갇힌 후 나중에 죽게되고 정병욱은 징병으로 일본군에게 끌려가면서 부모에게 윤동주 시집을 잘 보관해달라고 하고 떠납니다.양조장과 가옥의 형태인 정병욱 가옥은 다행히 모친이 마루 아래 쌀독 안에 윤동주 시집 원고를 잘 보관했습니다.윤동주의 다른 시집 2권은 없어져 정병욱이 보관한 것만 남겨지게 됩니다.다행히 정병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서 윤동주 시집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정병욱 박사는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가져 판소리를 채집하여 책으로 내어 판소리 계통에서는 유명한 분입니다. 육필원고를 읽어보니 윤동주가 정병욱보다 5살이나 많지만 정병욱 형(兄)이라고 되어 있어서 의아했는데 그 당시는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존중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예전 직장 생활할때 제가 사원시절 한신증권 김정태 사장시절에 표창장을 받고 같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 보고 "김 형"이라고 호칭하길래 부산출신인 저는 좀 의아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윤동주의 서시에 보면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표현 때문에  "별 헤는 밤"과 기억에서 섞여 있었지만 이번 기회로 다시 기억이 제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 당시 윤동주에게는 광복이 되는 대한민국이 너무나 멀게 느껴 졌을 겁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16일 사망이고 그해 6개월 뒤 8월 15일 해방이 됩니다.

 

광양김시식지(전남 광양시 김시식지1길 57-6)

 

그동안 김은 해태(海苔)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바다의 이끼"인데 김시식지에서 해의(海衣)라고 되어 있어서 "바다의 옷"인가 했는데 "옷 의(衣)"라는 글자도 옥편을 보면 아래에 "이끼"라는 뜻이 있습니다.

김의 시작은 최대 산지인 전남 완도가 아닌 광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 ‘해은’ 김여익(1606~1660) 선생의 묘표(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에 적힌 ‘시식해의’(始殖海衣)와 ‘우발해의’(又發海衣)라는 글귀가 이를 입증하는 기록입니다.이는 “김을 처음 양식했고, 또 김 양식법을 창안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묘표는 1714년 2월 광양현감 허심이 지은 것으로 김여익은 전남 영암군 서호면 몽해에서 태어나 병자호란으로 청과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에 통탄하며 광양 태인도로 이주해 은둔했습니다.

해의를 만든 김여익이 가락 즉 김해김씨이기에 "김"이 됩니다.

 

김여익이 김을 발견한 것은 우연으로 그는 1640~60년 무렵 밤나무 가지에 이름 모를 해초가 붙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시식(試植)합니다.그리고 이듬해부터 나뭇가지를 갯벌에 꽂아 양식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지금은 그물을 이용하지만 예전에는 나무를 꽂는 지주식도 있었고 발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광양 사람들은 해의였던 김이 김으로 불린 것은 김여익의 성씨에서 딴 것으로 알려집니다. 조선 시대 임금 인조가 ‘수라상’에 오른 김에 매료돼 이름을 물었지만 신하 중 아는 이가 없었고 인조는 “광양의 김여익이 진상했다”는 말에 그의 성을 따 ‘김’으로 부르도록 했다는 말도 전해집니다.만약 처음 만든이가 박씨나 정씨면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겠습니다.

김은 세계1위,2위 장수국인 한국과 일본의 슈퍼푸드이고 나사과학자들이 한국 앞바다의 김양식장을 보고 미래의 금광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배알도(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 1632-13)

배알도라는 명칭은 망덕산을 향해 배알하는 형국에서 유래했는데, 망덕산은 왕비가 날 자리를 상징하는 천자봉조혈의 명당으로 풍수가들이 많이 찾아들었다고 합니다.거기에 망덕산 뒤에 있는 천황산(天皇山)은 왕을 상징하고 있어 이름에 깃든 땅의 기운과 운명을 헤아려보게 된 것 같습니다.

배알도는 광양에서는 유일한 섬이라 귀한 섬이지만 저는 부산에서 와서 감흥이 좀 덜한 편이었습니다.  

 

 

아무리 낮과 밤이 빛나는 광양여행이라고 해도 짙은 황사가 드리우면 빛을 잃듯이, 민주주의라는 좋은 제도임에도 잘 못된 지도자를 선택하면 독재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직접 민주주의는 국민이 현명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국민의 수준에 합당한 정부를 갖게 됩니다.민의를 저버리는데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밀어주면 그 지도자는 당연히 헌법을 바꾸어 더 국민들의 권리를 박탈 할 것입니다.아직까지는 동아시아에서 한국만이 제대로 직접 민주주의를 합니다만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다른 나라처럼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光陽...언제나 잘 선택해서 국민 모두 더 행복한 대한민국이 되어 무궁하게 낮과 밤 모두 환한 세상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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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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