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울산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동축사, 병영성, 울산왜성, 박상진 생가를 탐방

 

울산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네 곳, 동축사, 병영성, 울산왜성, 박상진 의사 생가를 방문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유산 답사를 갑니다.

울산은 현대시라는 말이 어울릴정도로 자동차산업의 메카입니다.그러다보니 역사성이 다소 묻혀져있어서 저도 뒤늦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왠만한 왜성은 다 찾아보았는데 이제야 울산왜성의 흔적을 찾아보니 부산에서 가까운 울산의 위치를 감안하면 아이러니합니다.

 

사실 주말 휴일에 태풍에 준하는 바람이 분다고 하여 단거리 여행조차 접었는데 밤사이 비가 내려 시계가 좋아졌고 일요일 아침에 하늘을 보니 날씨도 아주 준수합니다.그래서 가까운 울산을 찾게되었습니다.

고대 인도를 일컬어 '천축국(天竺國)'이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인도는 서축(西竺)이 되고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는 동축(東竺)이 된다고 보면 이곳에 울산의 동축사(東竺寺)의 의미는 상당히 높게 평가됩니다.   

울산도 부산처럼 바닷가에 있다보니 해양세력이 접근하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곳입니다.그래서 일본과의 처절한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경상좌도 울산병영성은 조선시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지명도 병영동이 되었습니다.총 둘레는 2,210m입니다.

 

이곳 병영성의 돌을 가져다 쌓은 울산왜성이 있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광복군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생가가 공원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4군데를 둘러보려고 출발합니다.  

- 일시: 2025-4-13 08:30 ~15:00
- 날씨: 오전엔 맑았으나 오후엔 바람 불고 약간의 비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190km

 

동축사
울산병영성
울산왜성 
박상진 생가

 

2025.4.13

우선 국밥집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동축사로 향합니다.

 

▷동축사

 

공영주차장에 무료로 주차하고 넓은 산길과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가빠질만하니 도착합니다.가장 먼저 눈에 닿는 것은 성곽같은 축대입니다.

 
 

 

동축사는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동쪽의 천축(인도)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신라 진흥왕이 인도 아육왕(阿育王)이 배에 실어 보낸 황금과 철로 황룡사 장육장을 만들었다는 삼국유사 기록도 재미있습니다.

(큰 배가 하유현 사포에 정박했다. 조사해 보니 첩문이 있었다. '서축(西竺)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고 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축원하여 원컨대 인연이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어라' 현의 성 동쪽 시원하고 높은 곳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삼존불을 맞아 안치했다. 금과 철은 왕경으로 옮겨와 대건 6년 갑오 3월에 장육존상을 주성하여 황룡사에 안치했다.)

동축사의 3층석탑은 신라의 전통양식인 중층기단으로 강한 화강암 재질이지만 면석이 모두 없어져 원래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륜부인 노반과 보개는 특이하게도 사암계통이어서 여러차례 걸쳐 고쳤다는 반증입니다.

오늘은 연등을 철거하느라 분주합니다.  


독성각에서 반야심경이 울려퍼집니다.연세가 꽤 되어 보이는 어르신은 계단 아래 홀로 예불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동축사 사적비가 보이는 곳에서 보니 동축사의 사세가 가늠이 됩니다.

다시 동축사 경내의 종각이 있는 곳에서 울산 시내를 바라다보니 홍세태의 동축사 동대(관일대) 한시가 떠올랐습니다. 

洪世泰 (홍세태)는 조선 숙종 때의 시인(1653~1725)으로 자는 도장(道長). 호는 유하(柳下)ㆍ창랑(滄浪). ≪해동유주≫를 편찬하였으며, 문집 ≪유하집≫이 있습니다.


동축사


1. 東竺寺 在海上
2. 東臺

東峰遇海却崔嵬。
上有青冥百尺豪。
到此乾坤皆欲盡。
看他日月獨能回。
雷風裂石濤相擊。
霜氣驅雲療始開。
天外漁舟初不見。
白帆遙出香茫來。

동대

동쪽 봉우리가 바다를 만나니 문득 높다란데 꼭대기에는 푸른 하늘에 백척의 대가 솟아 있네. 이곳에 이르면 하늘과 땅이 다 끝난 듯한데 거기에서 보니 해와 달은 홀로 능숙하게 도네. 우레 품은 바람에 바위가 찢어지니 물결이 따라서 부딪치고 서리 같은 기운에 구름을 몰려가니 장기가 비로소 흩어지네. 하늘 바깥에 고깃배가 처음에는 보이지 않더니 흰 돛배가 먼 데서 나타나더니 아득히 다가오네.

* 성범중 옮김(한시 속의 울산산책)

▷울산 병영성

 

울산병영성은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 축조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 성으로, 현재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 위치합니다. 이 성은 조선 초기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었으며, 성 내부에는 군창과 우물 등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울산왜성 축조를 위해 병영성의 성석을 사용하면서 일부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사적 제320호로 지정되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병영성 한켠에 당산이 보이는데 별도의 안내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산은 병영성 내의 작은 공원에 위치한 제당(祭堂)으로, 지역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이곳은 병영성 터와 가까운 언덕 위에 자리하며, 마을의 전통적인 제례 문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산은 마을 공동체의 신앙적 중심지로,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제사를 올리며 지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당산 우측은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출입금지 목적의 그물이 보입니다.

 

병영성에 올라보니 우측으로 돌출된 치(雉)가 보입니다. 雉는 보통 꿩을 뜻하지만 돌출된 담장(성가퀴)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 시민이 개와 함께 망중한을 보내고 있습니다.


병영성을 따라 달리기 운동을 하는 어르신도 보입니다.아직까지는 날씨가 좋아서 달리기에 좋습니다.

 

▷학성공원(울산왜성)

일본식 성이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격동기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조선,명나라와 일본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3지환(三之丸) 근처에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비가 보입니다.이곳은 지금은 학성공원이지만 울산왜성이라서 이곳에 독립운동을 한 박상진 의사의 추모비가 있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왜군과 싸운 넋들이 피어났는지 여기 저기 동백꽃이 많이 보입니다.

요산대(樂汕臺)는 울산의 이름난 선비인 김홍조가 증성(울산왜성)의 정상부에 요산대라는 돌로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汕(산)은 물고기 잡는 그물의 일종인 "오구"이지만 물( 氵)과 뫼(山),즉 태화강과 동천을 뜻하는 이수(二水)와 당시 삼산동에 솟아있었던 삼산(三山)을 한데 묶어 이르는 것으로 여기서 요산대는 태화강,동천,삼산을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터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곳은 나팔등으로 불리는 토루에 해당됩니다.

 

울산성 전투(蔚山城戰鬪)는1597년(선조 30년) 9월부터1598년 1월까지 조선과 명 연합군이 일본군의 울산성(蔚山城,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을 공격한 전투로,정유재란(丁酉再亂)의 주요 전쟁 중 하나입니다.

1. 배경


1597년 정유재란 발발 후, 일본군은 울산, 김해, 순천 등에 왜성(倭城)을 축조하며 조선 남부 지역을 점령하려 했습니다.특히 울산성은 일본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지키고 있었습니다.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울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 전투 과정


(1) 1차 공격 (1597년 9월)

조명 연합군(도독 마귀(麻貴), 조선군 권율 등)이 울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성벽의 견고함, 보급 문제로 실패하고 퇴각했습니다.


(2) 2차 공격 (1598년 1월, 울산성 공방전)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이끄는 4만 명의 연합군이 다시 울산성을 공격했습니다.일본군은 식량과 물자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 아래 버텼습니다.명나라 군대가 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일본군의 반격과 함께 일본의 지원군(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도착하자 연합군은 퇴각했습니다.


3. 결과 및 영향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그러나 이 전투로 일본군도 큰 타격을 받아 전략적 후퇴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노량해전(1598년)에서 결정적 패배를 맞이하며 철수했습니다.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되며, 일본군의 보급 문제와 조선-명 연합군의 공세 능력을 보여준 전투입니다.


4. 의의

조선과 명나라의 협공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군의 전력 약화에 기여했습니다.이후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과 함께 정유재란의 종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이 전투는《선조수정실록》과명·일본 측 기록에도 상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후기 전쟁사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박상진 생가

박상진(1884년 12월 7일 ~ 1921년 8월 11일)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이끈 대표적 인물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아 무장 독립투쟁과 군자금 조달에 앞장섰습니다. 박상진은 1884년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밀양이고 호는 고헌(固軒)입니다.그는 한학을 배우다가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해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 평양법원에서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의하며 판사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15년, 박상진은 기존 의병투쟁과 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통합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습니다.대한광복회는 국내 최대 비밀결사조직으로, 군자금 조달과 친일파 처단, 무장투쟁을 목표로 활동했습니다.

박상진은 전국적으로 곡물상을 설립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1917년에는 친일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는 등 의열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폭압적 통치에 맞선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1918년 일제 경찰에 체포된 박상진은 혹독한 고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습니다.박상진과 대한광복회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무단통치로 억눌린 민족의 기개를 되살리고, 이후 3·1운동과 의열투쟁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그는 김좌진 장군과 협력해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을 지원했으며, 청산리 대첩 준비에도 기여했습니다.

박상진의 생가는 현재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울산에는 그의 이름을 딴 호수공원과 동상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전시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박상진은 자신의 삶과 재산을 모두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지금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생가 안채에 걸려 있는 초상화와 그의 절명시가 보입니다.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네

難復生此世上 다시는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
幸得爲男子身 다행스레 장부 몸 얻었지마는
無一事成功去 이룬 일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
靑山嘲綠水嚬 푸른 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누나.

박상진(朴尙鎭), <절명시(絶命詩)>"


전시관 우측 유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母葬未成 어머님의 장례는 못 마쳤고,
君讐未復 우리 임금 원수도 갚지 못했으며
國土未復 나라의 땅도 찾지 못하였으니
死何面目 그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 가나.

 

공교롭게도 문화유산답사를 마치니 바람이 거세지고 빗방울이 보입니다.

동축사는 문화와 종교를 통한 세계적 비전을 보여주고 병영성과 왜성은 국방과 평화의 가치를 일깨워주며 박상진 생가는 희생과 독립정신을 상징합니다.둘러보고 난 후 역사적 자긍심과 책임감을 아울러 심어주고 각 유산은 문화적 다양성과 협력, 그리고 희생정신이라는 가치들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영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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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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