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안강)수운 최제우가 젊은 시절 주유팔로한 보부상은 오늘의 쿠팡맨  

 

이번 답사는 경주 오야리삼층석탑에서 시작해 동강서원,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의 김이형 보부상 유공비, 안강읍, 그리고 용담정 수운기념관을 잇는, 경주 북부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한눈에 조망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야리삼층석탑입니다. 경주시 천북면 오야리 산자락에 자리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벽돌탑을 모방해 세운 독특한 모습의 석탑으로, 커다란 바위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구조입니다. 감실과 문 모양의 조각, 모서리기둥 등 세부 장식이 남아 있으며, 이곳은 신라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입니다.다음으로 찾은 동강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이곳을 지나며 경주가 신라의 고도임과 동시에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중심지로도 자리매김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형산강변에 위치한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에서는 강동면 유금리 일대가 조선시대 3대 보부상 장터로 번성했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김이형 보부상 유공비가 세워져 있는데, 화강암에 48자의 한시가 음각된 이 비석은 형산강 입구 제산(弟山) 하단에 자리하며, 보부상의 역할과 그들의 사회적 공헌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보부상은 전국을 누비며 상품을 거래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경제와 사회, 문화 교류의 핵심적인 존재였습니다.

 

안강읍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고장으로, 곳곳에 문화재가 산재해 있습니다. 안강은 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오늘날까지 지역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용담정 수운기념관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수운)가 구미산 용담계곡에서 수도와 창도에 매진했던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최제우는 젊은 시절 보부상으로 전국을 떠돌며 세상의 부조리와 민중의 고통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동학을 창시하고,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통해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민중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용담정에는 최제우의 삶과 사상, 그리고 동학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다양한 전시와 자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번 답사는 신라 불교문화, 조선 유교 전통, 보부상의 상업적·사회적 역할, 그리고 동학의 창시와 근대 민중사상의 발원지를 모두 아우르는 유익한 탐방이었습니다. 특히, 수운 최제우가 보부상으로 전국을 주유팔로하며 쌓은 경험과 그가 남긴 동학 사상의 의미를 깊이 되새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 일시: 2025-6-1 00:10 ~15:20
- 날씨: 대체로 맑음.낮은 다소 더위 느낌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235km

 

 

오야리삼층석탑 -> 동강서원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김이형 보부상 유공비)-안강구성-용담정 수운기념관

 

- 오야리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오야리 산31번지

- 동강서원: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유금강정길 40-25, 3필 (유금리)

-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김이형 보부상 유공비):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 164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 내)

- 안강구성(안강읍 중심지, 안강역 등 포함):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1433-1 

- 용담정 수운기념관: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 135 (또는 현곡면 가정리 555번지 일대, 동학기념관 포함)

 

 

2025.6.1

 

거의 0시에 출발하여 언양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아침 8시쯤 출발하여 먼저 오야리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오야리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벽돌탑을 모방한 독특한 양식의 3층 석탑입니다. 높이는 약 2.5m로,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2개의 돌로 받침대를 놓고 몸돌을 올린 구조입니다.오야리삼층석탑은 주변에 청동기시대 고인돌(지석묘)이 분포하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 고인돌 위에 신라인이 석탑을 세웠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문화유산입니다. 석탑은 소광사라는 작은 절 경내 바위 위에 위치하며, 3층 몸돌과 상륜부는 소실되었지만, 지붕돌과 몸돌 등 일부 구조가 남아 있습니다. 1층 몸돌에는 감실이 있고, 여닫이문이 있었던 흔적이 확인됩니다.

이 석탑은 신라시대 불교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석탑 계열로 분류됩니다. 경주 북부, 포항과 가까운 지역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신라와 청동기시대 문화가 교차하는 희귀한 유적입니다.

▷동강서원

먼저 신도비(神道碑)와 하마비(下馬碑)가 눈에 들어옵니다.

 

신도비(神道碑)는 서원에 모셔진 인물(손중돈 등)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동강서원 입구 주차장에서 서원으로 향하는 길 좌측에 위치합니다. 신도비각(神道碑閣) 안에 비석이 보호되고 있으며, 이 비석은 서원을 대표하는 상징적 시설물 중 하나입니다.

 

 

동강서원(東江書院)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서원은 1695년(숙종 21년)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 선생의 학문적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전국 5도(경상·충청·전라·함경·황해도) 유생들이 힘을 모아 세웠습니다.

 

손중돈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문인이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계천군 손소의 아들입니다. 그는 성종 1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된 인물입니다. 상주목사 시절에는 고을을 잘 다스렸고,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는 만세교를 가설해 주민들의 송덕을 받기도 했습니다.

 

입구에 해당하는 탁청루가 잠겨 있어서 뒤로 들어갑니다.

 

200여년은 되어보이는 모과나무가 눈길을 끕니다.

동강서원은 제향과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으로, 강당(순교당), 묘우(사당), 탁청루(정문 누각), 유도문(입구 문) 등 다양한 건물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이후 1960년대 묘우와 강당, 신문 등이 복원되었고, 1986년에는 동재·서재·신도비각이, 1999년에는 탁청루가 다시 지어졌습니다.

 

서원은 경주와 포항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양동마을에서 보면 동쪽, 형산강 쪽에 있어 ‘동강(東江)’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과도 연관되어 있어, 동강서원까지 지정 대상에 포함된 바 있습니다. 매년 음력 2월과 9월 하순에 제향이 봉행됩니다.

 

동강서원은 조선시대 유교문화와 향촌사회, 그리고 지역 유림의 전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김이형 보부상 유공비)

 

유금이들 유래가 적혀있습니다.

유금이(有琴이)는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有琴里) 마을의 이름과 관련된 설화에서 유래된 인물 또는 상징입니다.유금리라는 마을 이름은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옛날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가에서 한 소녀가 슬프게 울고 있는 모습을 지나던 나그네가 보고, 소녀에게 이름을 물으니 “유금(有琴)”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이 유금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다른 전설로는 김부대왕이 이 마을에 사는 ‘유금’이라는 아이를 용이라고 불러주었고, 그로 인해 아이가 용이 되어 형제산을 절단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전설도 마을 이름의 유래로 꼽힙니다.

 

형산강역사문화관광공원에는 ‘유금이들 유래’를 담은 상징물과 안내가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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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이들 유래

신라 김부대왕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의 절반에는 형산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큰비가 오면 경주가 자주 물에 잠겼다. 산(형제산)을 뚫어물꼬를 트기 위한 공사를 하려고 해도, 물이 차 있어 쉽지 않았다. 김부대왕은 천년의 도읍지가 될 자리가 경주 터인데, 그런 장소로 못 만드는 것을 아쉬워하며,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적에 물꼬를 막고 있는 산을 쳐내어 물꼬를 트고 가겠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김부대왕이 죽어 큰 구렁이[이무기]가 되어 경주 어느 들에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이 용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칠 때에 유금이라는 영리한 아이가 구렁이를 보고, "아 용님 나오신다." 라고 외쳤다. 구렁이는 꼬리로 왜구들의 소굴인 동해 열두 섬을 치고서 울릉도를 치려고 하자, 아이가 “울릉도는 용의 것이니, 치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열두 섬을 친 구렁이는 용이 되어, 형제산을 둘로 갈라놓고 승천하였다. 이후, 대왕이 용이 되어 승천하게 도와준 유금이라는 아이를 기려, 용이 승천한 들을 유금이들이라 하고, 나누어진 두 산을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문학사전 자료中)

할머니 등에 업힌 유금이의 모습이나 관련 전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처럼 유금이(유금이들)는 마을 이름의 전설적 기원과, 마을을 상징하는 인물 또는 이야기 속 인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바라보는 곳에 등짐을 진 보부상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좌상대도접장김공이형유공비가 있고 그 아래에 강동면민 일동으로 김이형 칭송시가 있습니다.

 

 

河風強勁的坡上 세찬 강바람 몰아치는 언덕에
沒索現有功德碑 찾는이 없는 공덕비 있었네
風化削功難以認 풍삯되어 그 공 알아보기 힘드네
如今其日的功讚 이제 그날의 공덕을 기리고자
重新造在違建立 다시 만들어 이곳에 세워
其意記念者做矣 그 뜻 기리고자 한다네

甲辰年元朝 갑진년 원조
江東面民一同 강동면민 일동

보부상 동상 옆에 부조장터의 유적이 보이는데 제산기슭에서 "좌상대 도접장 김이형 유공비"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으로 1864년 당시 부조시장 관계의 유사와 도감을 비롯하여 8개의 임방(任房)에서 자상대(左商隊)의 도접장인 김이형공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것인데 좌상대는 좌단이라고 하는 부상(負商)을 말합니다.이후 부상은 좌사로 개칭합니다.(보상은 우사로 개칭).비는 새로 만들었고 유공비 좌우측에 약간 작은 글씨로 역시 김이형 칭송시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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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대 도접장 김이형 유공비(左商隊 都接長 金以亨 有功碑)의 김이형은 조선 시대 경주와 영일(현 포항시 일부) 지역에서 활약한 보부상(行商) 단체의 우두머리입니다. 김이형은 포항·영일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등 다양한 물산을 양동, 안강, 경주 등 내륙 지역으로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보부상 단체를 잘 이끌어 지역 경제와 물류 유통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대 보부상 조직이 경주부윤 등의 허락을 받아 공덕비를 세웠으며, 비석에는 그의 덕과 인품, 그리고 상벌이 엄중했던 조직 운영 방식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명(碑銘)에는 “좌상대 도접장 김공 이형 유공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김이형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팔임방(八任房) 등 보부상단을 크게 일으켰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요약하면, 김이형은 조선 시대 경주와 영일 지역 보부상단을 이끌며 동해안 해산물 등 물산을 내륙으로 공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로, 지역 경제 발전과 유통 체계 확립에 공헌한 인물입니다.

 


扶助涵泳 恩津波洋(부조함영 은진파양)
德蘊仁厚 性兼柔剛(덕온인후 성겸유강)
埋瘗無遺 交易有常(매예무유 교역유상)
賞罰猶重 法規始彰(상벌유중 법규시창)
名著四海 任大八房 (명저사해 임대팔방)
花螭載銘 百世留香 (화리재명 백세유향)

부조에는 물이 차고 넘치고/ 은혜로운 나루엔 물결이 양양하구나
덕은 쌓여서 어질고 두터우며 / 성품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였다
더러운 것은 남김없이 묻어버리고/ 항상 떳떳하게 장사를 하였나니
상과 벌을 중하게 여겨 / 법과 규율이 바로 서고 빛나더라
이름은 사방에 널리 알려지고/ 여덟 개의 임방(任房・상인조직)에 크게 미쳤구나
용 모양의 비석에 이름을 새기니 / 향기가 대대로 남아 있으리라

 

그 옛날 안강은 부조장터 보부상들의 활동지역이겠지만 지금은 동강 주민들의 훌륭한 쉼터가 되어줍니다.

▷안강 구성(龜城)

거북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곽의 모습이 거북이를 닮았고, 신라 석정 넘어 어래산 기슭에 거북이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조선 태조 때 안강 현을 구성현(거북성)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주 안강 구성은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평지 사각 성곽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온 곳입니다. 안강 구성은 평지에 위치한 성으로, 드물게 존재하는 형태입니다.  안강 구성의 성곽은 전면 길이 약 450m, 측면 길이 약 580m로 상당히 큽니다.  음즙벌국이 안강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음즙벌국과 실지 고국 간의 분쟁이 있었으며, 안강은 그 중심지였습니다.

 

좌측의 비는 "부윤노영경선정비"이고 우측은 "부윤한상공애민선정비"입니다.

지금은 성곽의 흔적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기어려울 정도입니다.선정비 뒤로 보호수에 가까운 노거수들이 제법 보입니다. 

▷수운기념관

용담정 입구에 동학교육수련원과 수운기념관이 세워지고 있는 모습을 본 후 오랫만에 수운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수련원과 기념관 건물에 검은색의 큰 나비들이 날고 있어서 이채로웠습니다.
수운기념관은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일생과 동학의 창명(創明) 정신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보부상처럼 주유팔로(周遊八路)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그가 젊은 시절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민중의 삶과 사회 현실을 직접 체험한 여정을 의미합니다. 수운은 1844년에서 1854년까지 약 10년간 백목 장수 등으로 생계를 꾸리며 전국 각지를 방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활쏘기, 말타기, 장사, 음양복술, 의원 노릇, 막일꾼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조선 민중의 고통과 사회의 모순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 주유팔로의 경험은 수운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유교적 강령이 무너지고, 각자위심(各自爲心, 자기 이익만을 좇는 마음)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모두 이기주의에 빠져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가 타락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동학 창도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즉, 주유팔로는 수운 최제우가 직접 민중의 삶 속에 들어가 사회의 문제를 체험하고, 새로운 종교적·사회적 사상을 모색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동학의 포접제는 풍류의 포함삼교(包含三敎)에서 포(包)를 취하고 접화군생(接化群生)에서 접(接)를 따 왔다고 하는데 보부상 조직도 비슷했습니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정신은 만민평등과 인간존엄, 민족자주를 바탕으로 한 혁신적 사상이었고, 이는 동학농민혁명,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현대의 민주화운동과 2024년 ‘빛의 혁명’까지 이어지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시민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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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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