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넓은 송광사,높은 위봉사보다 감춰진 옛절 같은 화암사가 좋다

- 일시: 2023-3-19
- 날씨: 밤은 영하의 날씨이고 낮은 영상의 날씨
- 몇명: 홀로

 

안도현 시인의 "내사랑,화암사"의 마지막 싯구는 "찾아가는 길은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로 끝맺음을 합니다.화암사는 홀로 찾아가면 좋은 절입니다.계곡으로 들어가 가파른 폭포 위를 넘어 매화가 보이면 곧 우화루가 보입니다.눈썰미 있는 분들은 바로 눈치 챌 수 있는데 화암사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있는 절집입니다.그래서 사찰 이름에 바위 암巖자가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복수초,현호색,얼레지,산수국들이 보이고 우화루에 도착하면 바로 매화나무가 보입니다.그래서 화암사는 바위 앞에 꽃 화花자가 붙어 화암사花巖寺가 되었습니다.우화루(雨花樓)는 말 그대로 꽃비 누각이니 매화꽃이 흩날리면 이름에 걸맞게 절정일 것입니다만 아침 늦게 계곡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모습을 드러내는 매화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飛天像)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넓은 곳에 소나무가 있어 송광사(松廣寺)일 것이고,위봉사(威鳳寺)는 위엄있는 봉황이 산중턱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만 화암사에 매료되어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습니다.매화 피었을 때 화암사를 간 것은 천운이었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550km


화암사-송광사-위봉사-위봉산성

 

2023-3-19

 

보통은 하루 일찍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후 탐방에 나섭니다만 오늘은 새벽4시에 출발하였습니다.완주의 날씨를 보니 최소한 8시 이후는 되어야 영상의 날씨가 되기 때문입니다.영하 3도 정도까지는 캠핑카에 청수가 있어도 흔들리는 차 때문에 동파 염려는 없습니다만 그대로 주차를 해두면 영하 3도에 드레인이 안된 캠핑카는 위험합니다.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기 때문에 중간중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넓은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9시쯤 계곡으로 들어갑니다.기온은 0도입니다.계곡 초입을 지나니 온통 양옆이 바위이고 폭포의 물이 찬 냉기를 공급하여 아주 착찹할 정도로 서늘한 느낌입니다.길을 걷다보니 여기는 사찰이 없없다면 도적의 소굴이 되었을 같은 깊은 산속에 들어온 느낌이 듭니다.  

 

▷화암사:저도 찾아가는 길은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수량이 별로 없는 폭포 위로 난 계단을 오르고 숨을 헐떡일 즈음 매화가 보입니다. 15세기에 쓰인 <화암사 중창기>에는 화암사로 가는 길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려운 절" 이라 묘사되어 있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백문절은 화암사에 대해 7언 40구의 길고 긴 한시를 남길 정도로 화암사에 이르는 길이 험하고, 도(道)에 이르는 길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했다고 합니다.사실 철계단이 없던 조선시대 때는 어떻게 화암사에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숨고르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순간 거짓말 같이 드라마틱하게 햇살이 매화 위부터 드리웁니다.화암사 탐방과 탐매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절 입구 주차장에도 별다른 건물이나 안내판도 없었고 식당가,기념품점 또한 없이 산속으로 빨려 들듯이 들어 온 후 마지막 철계단을 오른 후 나타나는 매화를 보는 순간 여기서는 누구라도 무장해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이곳 산이름은 불명산(佛明山)이니 부처님의 광명이 산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주문도 없고 그 흔한 사천왕상도 없고 금강문,해탈문,불이문도 없이 그냥 성문 같은 우화루가 나타나는데 우화루를 받치는 기둥초자 인공의 느낌이 없어서 절로 가는 좋은 느낌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냥 이름 없는 산에 들어 온 느낌이니 불명산(不名山)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오늘은 연꽃등 보다 매화꽃이 더 밝습니다.

기둥은 반듯하지 않고 주춧돌도 대충 갖다 놓은 듯 무심합니다.소박하면서도 정겹지만 돌담같은 뒤쪽의 축대와 묘하게 어울립니다.백제건축의 미학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화암사의 중심건물인 극락전은 국보인데 우리나라 단 하나뿐인 하앙식 구조 건물입니다. 현판이 아닌 각각의 글자를 화려한 포작과 하앙의 장식성을 편액이 가리지 않도록 슬쩍 넣은 모습입니다.이래서 더 인공적인 느낌이 없었나봅니다.단청은 세월이 지나 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화암사는 "잘 늙어가는 절"이라는 평을 이해하게 됩니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우화루 안쪽은 바깥의 성문같은 느낌은 없고 바라지창을 통해 매화꽃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보입니다.그러고 보니 이 절집엔 종각도 없고 우화루 안쪽 우측에 명태 걸어두듯 목어 하나 달랑 걸려있습니다. 우리나라 3대 목어 중 하나라고 합니다.
칠을 하지 않아서 나무결이 흡사 물고기 비늘처럼 보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내사랑"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라는 글에 크게 공감이 갑니다. 

 

화암사, 내 사랑/안도현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 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 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 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지는 않으렵니다

 

햇볕이 매화꽃에 닿아 매화등불이 되었습니다.육법공양 중 꽃공양과 등공양을 동시에 이루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우화루에 붙은 작은 현판을 봅니다.불명산 화암사...우화루는 보물이지만 국보로 승격해도 손색이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커다란 바위 위에 화암사 절집이 놓였습니다.

해우소 뒤의 계단을 오르면 15세기에 씌어진 「화암사중창기」(花巖寺重創記) 비석이 있습니다.

"절은 고산현() 북쪽 불명산()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 비록 나무하는 아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렵다. 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닿는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이다."

 

화암사는 산속의 보물입니다.

하산하면서 보니 곳곳에 현호색이 보입니다. 꽃과 바위이니 자연스럽게 화암(花巖)입니다.
1시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온도가 영상 8도까지 올라있습니다.

 

 

▷송광사: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송광사

송광사하면 승보사찰 순천의 송광사가  떠오릅니다만 완주의 송광사도 대찰입니다.송광사松廣寺의 광은 넓을 광(廣)답게 평지 사찰로 도량이 굉장히 넓은 편입니다.주차장 옆에보면 넓은 연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원래 명칭은 백련사였다고 하지만 흰연꽃과는 관련이 없고 못연(淵)자를 쓴 것 같습니다.백제시대 영험한 샘물이 나온 곳에 사찰을 지었다는 설명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종남산 송광사 일주문은 사찰의 크기에 비하면 작은 편입니다.이후 줄을 맞추어 금강문 천왕문 등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사찰이 새로 생긴 것처럼 깔끔하지만 신라 경문왕때 도의선사가 세웠다고 하니 천년고찰입니다. 

전체적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등 당우들이 큼직큼직합니다.대웅전 옆의 소나무를 보니 송광사의 이름이 어울립니다.송광사는 백화도량입니다.백화도량이란 관세음보살이 중생과 더불어 자비를 실천하는 도량이라는 의미입니다.템플스테이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분위기입니다. 

 

▷위봉사: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위봉길 53 위봉사

 

주출산 중턱에 위봉사 절이 있는데 비구니 사찰이라서 전반적으로 섬세한 아름다움이 엿보입니다.일주문과 사천왕문 사이는 거의 정원에 버금가는 나무와 식물이 공간을 차지합니다. 위봉사의 위威는 "위엄"을 의미하는데 일주문조차 다소 위압적입니다. 

 

일주문 좌측에 이런 경구의 비석이 있습니다.

 

대상이경(對上以敬) 윗사람을 공경하고

대하이자(對下以慈) 아랫 사람은 사랑으로 다스리고

대인이화(對人以和) 다른 사람들과는 늘 화목하게

대사이진(對事以眞) 매사에 진지하라



주불전인 보광명전이 보이는 마당에 들어서면 잘생긴 소나무가 압권입니다.부서졌지만 고색창연한 석탑과 함께 있는데 직접 가보면 작은 코끼리까지 소품으로 놓여있어서 여기가 비구니 사찰이 맞구나를 느끼게 됩니다.기왓장에 그림을 그려 울타리 주위로 세워놓은 것도 같은 인상을 줍니다.

위봉사는 금산사의 말사로 604년(백제 무왕5)에 서암(瑞巖)이 창건했다는 기록을 볼때 역시 천년고찰입니다.그렇지만 당우와 단청이 깔끔합니다.

▷위봉산성: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주차 할 공간이 없어서 갓길에 세워야 하는데 이미 여러대의 차들이 선점하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하고 얼핏 겉만 보았습니다. 

 

1675년(숙종 1)에 축성하고, 1808년(순종 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하였습니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동학농민운동 때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다고 합니다. 북방 수구처에는 위봉폭포가 있다고 하는데 역시 주차를 할수가 없어서 가보질 못했습니다.

완주는 마한,백제시대 때 완산주라는 곳입니다. 동학농민혁명군 10만이  모인 장소가 삼례인데 삼례가 바로 완주군 소속입니다. 1차 봉기가 신분해방을 위한 반봉건적 운동이었다면 삼례에서의 2차 봉기는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외세 반침략운동이었습니다.
민족봉기 역사적 사실이 있는 장소가 바로 완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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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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