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경허스님이 전봉준의 딸을 숨긴 고금당 나옹암
일시: 2023-4-15~16
- 날씨: 흐린 후 황사비
- 몇명: 홀로
홍현지 경허연구소장의 경허스님에 관한 파란만장한 삶을 인터뷰와 유투브 영상을 접하고 진안의 고금당을 가보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전북 진안의 겨울은 길었습니다.진안은 마이산,운장산,구봉산이라는 한국 100명산이 있는 곳으로 부산보다는 기온이 낮아서 저의 문화유산답사 모터홈이 움직일려면 최소한 밤에도 영상의 날씨가 되어야 물이 얼지 않아 동파의 위험성이 없어집니다.
부산의 벚꽃이 다 떨어져 연록의 잎이 보일 즈음 진안 마령면의 온도를 보니 새벽녘 가장 추울때 온도도 2도로 영상의 기온이 예보되어 진안으로 떠났습니다.
전날 비가 왔기 때문에 아마도 일요일 아침은 맑은 하늘을 기대했습니다만 날씨는 흐렸고 황사마저 끼어 시계도 좋지 않았습니다.모든 탐방을 마치고 부산으로 올때는 황사비가 내려 부산에 도착해보니 차량은 온통 황사의 얼룩으로 지저분해졌습니다.
진안은 아직 벚꽃을 비롯하여 봄꽃들이 다 지지 않아서 볼만했고 고금당과 이산묘 탐방을 마치고 와룡암으로 가는 도중 본 주천로 도로변의 구봉산과 메타세콰이어길 등 드라이브의 즐거움도 안겨주었습니다. 경치는 이렇게 좋은데 그속에 있는 땅의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아 냉정과 열정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심정이었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493km
금당사-고금당(나옹암)-대한이산묘-와룡암-주천서원-태고정
2023.4.15
▷ 마이산도립공원제1주차장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70-21)
금당사 일주문 바로 앞이 마이산도립공원제1주차장입니다.푸른 간접조명을 받은 벚꽃잎이 흡사 조화처럼 보입니다만 살짝 어두어지는 시점에서 바라보는 꽃놀이도 볼만합니다.
(일박)
2023.4.16
고금당의 위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단 금당사로 갑니다.
▷금당사
탑영제까지 간 상황에서 길을 잘 못 들었다는 판단이 들어 다시 되돌아 갑니다.
▷금당사석탑
기단이 2층입니다.5층의 모습인데 1층과 2층의 옥개석이 두툼하여 원래 석탑의 부재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크게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고금당
마이산 풍경식당에 다다랐을때 포대화상 같은 조각이 보이고 우측으로 길이 보입니다. 방향을 고금당 방향으로 틀자 입장료 4000원을 내라고 하여 신용카드를 제시하니 현금으로 달라고 합니다.지갑을 뒤져보니 현금이 2000원 뿐이라서 머뭇거리니 계좌이체를 해달라고 하는데 휴대폰은 항상 가져다니지만 사찰에 갈때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차에 두고 왔다고 하니 그대로 통과됩니다.
고금당 까지는 800m거리이지만 마지막 400~500M는 경사도가 가파른 길입니다.계단을 올라 숨이 가빠져올때 즈음 고금당 황금색 기와가 보입니다.
▷고금당 나옹암
굴 안이 제법 넓습니다.안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보니 입구 문쪽만 밝아지고 막상 주존불이 있는 좌측 안쪽은 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3배의 예를 올린 후 안을 찬찬히 살펴봅니다.이곳은 고려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수도처로 전해지는 자연암굴로 나옹암이라고 합니다.
나옹은 20세에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하였고 그 뒤 중국으로 넘어가 인도승 지공화상으로 부터 법을 받아 1358년 귀국하여 고려불교 중흥에 공을 세웠고 1371년에는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보우,무학 등 높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토굴가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남기고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특히 토굴가의 토굴이 바로 이 나옹암이라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입니다.
(나옹화상 토굴가는 더보기에서 참조)
나옹화상 토굴가
푸른숲속 깊은골에 한칸토굴 지어놓고
소나무문 반쯤열고 돌밭길을 돌아보니
춘삼월의 푸른버들 봄바람이 건 듯 불고
앞뜨락에 온갖꽃이 곳곳마다 피었으니
바람볕도 좋거니와 꽃빛깔은 더욱 좋다.
이가운데 그무엇이 세상제일 귀하던고.
한조각의 무위진향 옥향로에 꽂아 두고
고요하고 밝은창가 말이없이 홀로앉아
한십년을 기한정코 일대사를 궁구하니
이전에는 몰랐던일 오늘에야 알았구나.
한가닥의 밝은심월 천년동안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의파도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산회상 제불보살 곳곳마다 계시는데
달마조사 소림가풍 어찌멀리 찾을소냐?
푸른산은 말이없고 초록물도 잔잔한데
맑은바람 소슬하니 이어떠한 소식인가?
한이치에 평안하니 활계구족 하였구나
천만산봉 푸른솔은 바루안에 담아두고
백천번을 기운누비 두어깨에 걸치었고
옷과음식 무심한데 세상욕심 있을소냐.
바라는게 담박하니 인아사상 쓸데없고
사상산이 없는곳에 법성산이 홀로높아
한물건도 없는중에 법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은은하온 달빛아래 원각산정 선듯올라
구멍없는 피리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가운데 갖췄더라.
돌호랑이 춤을추고 솔바람이 화답할제
무착고개 불지촌엔 보리수에 우담바라
나모 영산회상 불보살(南無靈山會上佛菩薩)
......................................................................................................................
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춘풍이 건 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은 더욱 좋다.
이 중에 그 무엇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진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꽃아 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하니
증전에 모르던 일 금일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천고에 밝았는데
무명장야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제불회상(靈축山諸佛會上) 처처에 모였거늘
소림굴조사가풍(小林窟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은 묵묵하고 녹수는 잔잔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천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솔은(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이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慾)이 있을 소냐.
욕정이 담박(欲情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법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 듯 올라
무공저(無孔저)를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가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무착령(無着嶺)을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우담화(曇花)는 활짝 피었느니라.
나무 영산회상 불보살(南無靈山會上佛菩薩)
홍현지 경허연구소장에 따르면 경허선사(1849~1912)는 이곳 고금당의 나옹암 토굴에 전봉준(1855~1895)의 딸 전옥련을 피신시킨 장소라고 합니다.1894년 동학군은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고 전봉준은 체포되었고 도망다니던 동학군들은 일본군과 조선관군의 합동 추적대에 의해 체포당하고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대역적이 된 전봉준의 일가친척들도 잡히면 무조건 사형당할 처지였기에 경허선사는 전봉준의 딸을 살리기 위해 금강사 고금당 이곳 나옹암에 만 8년간 숨겨지낸 후 27세에 옆동네로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전옥련이 18세에 들어와서 27세까지 머물렀던 아지트였던 셈입니다.경허선사의 여동생이 바로 전봉준의 부인이었고 경허선사와 전봉준은 처남매부지간이었던 것입니다. 즉 전봉준의 딸 전옥련은 경허선사의 조카딸입니다.
- 경허스님의 오도송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에
頓覺三千是吾家(돈각삼천시오가) 돌연 우주가 내 집인 줄 깨달았네
六月燕岩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유월에 연암산 내려오는데
野人無事泰平歌(야인무사태평가) 거지는 일 없어 태평가를 읊느니
(필사)
나옹암 밖으로 나와보니 자금의 나옹암은 입구에 기와로 이어졌지만 옛날에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금당 현판은 古室(고금당 조실? )이었던 "조계산 호랑이" 별명이 있는 활안스님의 글씨라고 합니다.
고금당 내 우측벽면을 보니 주석처인 ‘염화조실(拈花祖室)’글씨가 보이고 좌측 가장 큰 사진은 활안스님으로 보이고 바로 아래 미국 성조기와 한국 태극기가 보이는 두팔 벌린 사진도 활안스님으로 보입니다. 우측 작은 사진 속의 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이 바로 한눈에도 경허선사입니다. 기울어진 태극기 바로 위 사진입니다.
경허는 1년에 한두번 조카딸 전옥련이 잘 있는가를 마이산 금당사에 왔다고 하는데 그때 지은 시가 있습니다.
‘청산을 희롱하고(自弄靑山)’ - 경허
‘산은 절로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山自靑水自綠),
맑은 바람 솔솔 불고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네(淸風拂白雲歸).
하루종일 반석에서 놀아 본다(盡日遊盤石上).
내가 세상을 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我舍世更何希)’.
(필사)
위 시에서 말하는 "반석"이 바로 나옹암 토굴의 위나 아래에 있는 반석으로 보입니다.이곳에서 보니 좌측은 구름에 가려있지만 암마이봉이 보이고 아래 산골짜기 사이 중간에 금당사 절집이 보입니다.여기서는 일본군이 올라온다고 해도 조망이 잘되는 장소라서 도망갈 시간을 충분히 벌수 있는 위치로 보입니다.
경허스님의 시는 총 266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 아래 새로운 금당사가 생겨서 과거의 금당은 고금당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경허스님 참선곡은 아래 더보기 참조
경허스님 참선곡
홀연忽然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 이로다
천만고千萬古 영웅호걸英雄豪傑
북망산北邙山 무덤이요
부귀문장富貴文章 쓸데없다
황천객黃泉客을 면免할소냐
오호嗚呼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삼계대사三界大師 부처님이
정녕히 이르사대
마음 깨쳐 성불成佛하여
생사윤회生死輪廻 영단英斷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 저 국토國土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할 줄로
팔만장교八萬藏敎 유전遺傳이라
사람되어 못 닦으면
다시 공부工夫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許多히 많건마는
대강大綱 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끽반着衣喫飯 대인접화對人接話
일체처一切處 일체시에
소소영령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둥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妄想煩惱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할 제
천리만리千里萬里 다녀오고
허다許多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分明한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疑心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 마를때 물 찾듯이
육칠십六七十 늙은 과부寡婦
외자식自息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生覺 간절懇切하듯
생각 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窮究 하여가되
일념만년一念萬年 되게 하야
폐침망찬廢寢忘饌 할 지경에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忽然히 깨달으면
본래本來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絶妙하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이 아니며
석가여래釋迦如來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적도 않고
본래本來 생긴 자기영광自己靈光
개천개지盖天盖地 이러하고
열반진락涅槃眞樂 가이 없다
지옥천당地獄天堂 본공本空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 본래本來 없다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 받어
다시 의심疑心 없앤후에
세상만사世上萬事 망각忘却하고
수연방광隨緣放曠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놀면서
유연중생有緣衆生 제도濟度하면
보불은덕報佛恩德 이 아닌가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 가면
천상인간天上人間 복수福壽하고
대원력大願力을 발發하여서
항수불학恒隨佛學 생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貧病乞人 괄시恝視 말고
오온색신五蘊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觀察하여
해태심懈怠心을 내지 말고
허령虛靈한 나의 마음
허공虛空과 같을 줄로
진실眞實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欲 일체경계一切境界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泰山같이 써나가세
헛튼소리 우시개로
이날 저날 헛보내고
늙는 줄을 망각忘却하니
무슨 공부工夫 하여볼까
죽을제 고통중苦痛中에
후회後悔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四肢百節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낸듯
오장육부五臟六腑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참혹寒心慘酷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누가 알꼬
저 지옥地獄과 저 축생畜生의
나의 신세身勢 참혹慘酷하다
백천만겁百千萬劫 차타蹉跎하여
다시 인신人身 망연茫然하다
참선慘禪 잘한 저 도인道人은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앓도 않고 선세蟬蛻 하며
오래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自在하며
항하사수恒河沙數 신통묘용神通妙用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消遼하니
아무쪼록 이 세世上상에
눈코를 쥐어 뜯고 부지런히 하여 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當到하니
푸줏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死地로세
예전사람 참선參禪할제 잠깐寸陰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사람 참선할제
잠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사람 참선參禪할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한고
무무명업식無無明業識 독毒한 술에
혼혼불각昏昏不覺 지내다니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操心 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昏迷한 이 마음을
어이 하야 인도引導할꼬
쓸데없는 탐심진심貪心瞋心
공연空然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虛多分別
날마다 분요粉擾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知慧
누구를 한탄恨歎할꼬
지각知覺 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貪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
내 마음을 못 닦으면
여간계행如干戒行 소분복덕少分福德
도무지 허사虛事로세
오호嗚呼라 한심寒心하다
이글을 자세仔細보아
하루도 열두때며
밤으로도 조금자고
부지런히 공부工夫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冊床 위에 펴놓고
시시時時때때 경책警策하소
할 말을 다하려면
해묵서이海墨書而 부진不盡이라
이만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한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기나면
그때에 말할테요.
조카딸을 시집 보내고 난 후 경허는 이북의 삼수갑산으로 갑니다.살인누명으로 1급 수배범이었던 경허는 삼수갑산에서 승복을 벗고 박란주로 개명하여 서당 훈장 노릇하면서 숨어 살아갑니다.
경허의 제자로는 만공,수월,침운,해봉 등이 있습니다.
▷진안이산묘(駬山廟)봉찬회
마이산제1주차장에서 나오다보면 제3주차장 반대편에 이산묘가 보입니다.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에 있는 이산묘(駬山廟)는 면암(勉庵) 최익현의 제자이자 고종의 스승인 연재(淵齋) 송병선의 제자들이 친친계(親親契)[송병선 제자 모임]와 현현계(賢賢契)[최익현 제자 모임]를 구성하여 건립하였습니다. 이산묘에는 회덕전(懷德殿)·영광사(永光祠)·영모사(永慕祠)·대한 광복 기념비 등이 있습니다. 이산묘가 위치한 마이산은 1907년 정재 이석용이 조직한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의 집결지였으며, 고천제(告天祭)를 행하던 곳입니다. 이산묘에는 단군, 태조 이성계, 세종, 고종을 비롯하여 을사년 이후 순국한 의사·열사 및 조선의 명현들을 포함한 79위를 배향한 국내 최대의 사당입니다.
홍살문 우측에 보이는 암벽방향으로 갑니다.
"호남의병창의 동맹단결 성지"라는 이정석이 보이는데 대통령 김대중으로 되어 있어서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위령비에 적힌 동맹의 각오(동맹뇌사)를 살펴봅니다.
"하늘에서는 인간의 도리를 굽어 살피시고 계십니다.무릇 우리가 뭉치는 일은 모두 순국하고자함이니 나라의 만세를 위해 효보다 충을 택했습니다.우리가 만일 이때에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다면 신명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 응징하소서 "
1927년 9월12일 1000여명의 선열들이 애국의 이념아래 규합된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첫 봉화를 올린 장소입니다.
그들의 구호는 보국안민輔國安民,멸사봉공滅私奉公,실천궁행實踐躬行이었습니다.
이렇게 힘겹게 지켜 온 나라인데 "제3자배상"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일본에게는 "간"을 내주는 대통령이 있고 기밀유출 범법이력이 있는 간첩질 같은 전과기록이 있는 "국가안보실" 1차장은 "악의적 정황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미국에게는 "쓸개"를 내주는 식의 얼빠진 위정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다시 나라로 보수해서 새롭게 만들어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는 구한말 동학의 輔國安民(보국안민)이 되살아날 판입니다.(나라를 보전하다는 "保國/보국"이 아닙니다.)
마이동천이라는 이상향의 글이 보이고 이성계와 관련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는 주필대 글씨가 보입니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장군 시절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황산대첩,고려말 우왕6년) 개선하는 길에 들렀다는 전설이 서려 있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 속에서 선조들의 피 흘린 댓가로 지금의 푸른 평화가 있습니다.
비례물동(非禮勿動)은 고종이 호남 유림에게 내린 친필글씨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만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을 되찾는 일은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조국을 되찾자"는 본 뜻을 읽을수 있습니다.
▷와룡암
와룡암은 긍구당 김중정이 서울에서 이주하여 진안군 주천면에 은거하던 1654년(효종 5)에 유생들을 위하여 건립하였습니다. 250여 년 동안 많은 문인 학사들을 배출하였으며, 바로 옆에 있는 주천 서원의 강당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합니다.
와룡암에는 "기정(起亭)""와룡암(臥龍菴)""긍구당(肯構堂)""주천 서원기(朱川書院記)" 및 많은 시액(詩額)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기정(起亭)」과 「와룡암(臥龍菴)」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친필입니다.
정자는 풍경이 좋은 곳을 골라 자연을 즐기기 위해서 만들었지만 정자는 때로 후학들을 교육하기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와룡암도 단순하게 풍경을 즐기기 위한 것보다는 후학들을 교육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물 위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수달래가 앙증맞게 피었습니다.어찌 이런곳을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와룡암은 앞 뒤로 계곡이 있습니다.
바위 위의 흰 수달래를 보며 주천서원으로 갑니다.와룡암 우측의 계곡의 섬돌을 건너 지나갑니다.
홍살문 뒤로 주천서원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주천서원에서 다시 와룡암으로 오니 와룡암 뒤쪽 계곡물이 좌측으로 유입되는 것이 보입니다.
▷태고정
용담댐 건설로 인해 망향의 동산의 전망대가 태고정으로 착각했으나 그 아래쪽에 태고정 정자가 있습니다.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발 아래에 팬플룻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수고가 내려가 물 속에 잠겨있던 부분이 계단식으로 드러나 운치를 더 합니다.다만 황사 영향으로 시정이 좋지는 않습니다.
태고정은 1911년 3월 일본인들이 국고수입을 올리려는 구실로 태고정을 헌납이라는 미명 아래 압수하여 공매에 부치려 하였고 이에 이 고장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아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이를 사들일 자금을 염출하려고 하였으나 돈이 없어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지방민이 자기의 사재를 털어 이 정자를 매수하여 다시 용담면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또 6·25 때에는 운장산(雲長山)에 거점을 둔 공비들이 용담면으로 출몰하는 길목이어서 국군들이 잠복근무를 하였고 정자 앞 벌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땅에 씌여진 역사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썩어빠진 위정자들을 보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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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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