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산세 좋은 곳에 교육을 중시하니 인물도 남다른 곳

 

- 일시: 2023-2-18~19
- 날씨: 비 온 후 흐림
- 몇명: 홀로

 

지난번 구미의 야은 길재의 흔적을 찾아 떠났다면 이번엔 성주의 도은 이숭인의 흔적을 찾아 떠납니다.예전에 영천의 포은 정몽주의 흔적은 다녀왔으니 이제 영덕의 목은 이색만 남은 셈입니다.이색의 제자 중 도은 이숭인은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야은 길재가 명성과 실리를 모두 챙긴 인물이라면 도은 이숭인은 목은 이색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일이 안되려다보니 가장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이숭인은 특히 문장이 목은 이색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 심지어 이색이 "중국에서도 이만한 문장은 보기 힘들 것"이라 칭찬했습니다.워낙 문장력으로 유명하다 보니 고려 말기의 외교문서, 특히 북원,명나라 등 상국에 올리는 표문을 도맡았습니다. 명태조 주원장도 이숭인이 지어올린 표문의 글이 참으로 간절하다고 감탄했고  명나라의 사대부들 역시 동의한 바 있습니다.그래서 도은 이숭인의 기념관이 있는 청휘당을 먼저 찾아갔습니다.고려삼은으로 문장과 충성이 의미하는 문충공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심산 김창숙은 성균관대학교 설립자 겸 초대총장으로 심산 김창숙 생가를 가 보니 생가 바로 뒤에 청천서당이 있고 그 뒤에 청천서원이 있어서 교육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특히 심산 김창숙은 조선 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 군정,대한민국 1공,2공, 군사정권까지 격변하는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광복 전에는 독립운동에, 미군정기에는 유림의 후예인 성균관의 재건과 독립된 모국의 안정적인 수립에 힘썼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진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도은집이 성균관대학교에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성주는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태봉을 보면 산세가 아기를 품은 어머니 자궁 속의 태(胎)의 위치에 있어서 더욱 흥미로운 곳입니다. 수십년 전엔 보이지 않았던 태실기념관도 새로 생겨서 더욱 성주는 다시 가볼만한 곳입니다.

 

 

▷ 답사일정(風輪) :336km

 

청휘당-회연서원-심산 김창숙 생가(청천서당,청천서원)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향교-성주 백세각-선석사

 

 

 

홀로 여행을 다니다보니 저를 고독을 즐기는 "알라인게인" 스타일로 봅니다만 저는 딱 하나만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쇼펜하우어는 나이들수록 고독하게 살아야 온전하게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했고,정신의학의 "화병"을 처음으로 제기한 이시형 박사는 나이들수록 인간관계를 넓히라고 조언합니다.

 

저는 두분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두가지를 분리 할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함께하고 홀로 있고 싶으면 홀로 즐기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저는 여럿이 함께하는 모임도 많고 홀로 여행도 다닙니다.저의 취미생활의 특징은 함께 할수도 있고 홀로 할수도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테니스 배드민턴 탁구는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자전거 라이딩,국궁,여행,걷기,사진출사는 함께 할수도 있고 홀로 할수도 있습니다.물론 나이들어서도 할수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2023-2-18

풍륜에 크루즈를 설치했습니다.뉴SM3(L38) 핸들링 크루즈 스위치SM6/뉴SM6 크루즈 컨트롤 스위치를 구입 설치한 후 코딩까지 마치고 처음으로 장거리 운행에 나선 셈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1) 운전에 대한 피로도가 낮아졌습니다. 2) 과속단속 카메라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고 특히 "구간단속"의 경우도 심적인 부담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3) 그리고 연비도 최소 3% 이상은 개선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박)

▷청휘당: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8-6

청휘당 관물루 앞은 주차장인데 넓은 편입니다.우측으로 도은 기념관이 있습니다.


 

뛰어난 문장가 답게 도은 이숭인의 시가 여러개 보입니다.

고려삼은의 충과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합쳐져 문충공이니 사당의 이름은 문충사입니다. 

기념관 안을 보면 고려삼은으로 야은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이 중심으로 보이고 우측은 포은 정몽주 좌측은 목은 이색입니다. 도은 이숭인을 빼고 야은 길재를 넣어 고려삼은이라기도 하고 4명 모두를 합쳐 고려사은이라고도 합니다.저는 사람의 생애를 보아도 야은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이 들어간 고려삼은이 맞다고 봅니다.

황거정에게 엉덩이가 아닌 등에 장 100대를 맞고 사망했습니다. 엉덩이도 100대면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등에 치는 것은 당연히 죽이려고 치는 것이었고 이는 정도전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숭인의 오호도 아래 3줄을 보면 

"그대는 보지도 못했는가(君不見)
고금에 많든 적든 경박한 아이를(古今多少輕薄兒)
아침의 동포가 저녁의 원수가 되었다네(朝爲同胞暮仇敵)"

한때는 정도전과 이숭인은 목은 이색의 제자로 정치적 동지였지만 결국은 원수가 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지은 시 같습니다.   

 오호도는 한나라 고조의 창업에 반대하고 단체로 자살한 전횡(田橫)의 고사를 읊었습니다.

嗚呼島 李崇仁] 오호도 이숭인

嗚呼島在東溟中(오호도재동명중) 오호도라, 동해바다 한복판 떠 있는데
滄波渺然一點碧(창파묘연일점벽) 푸른 파도 아득한 속에 새파란 한 점
夫何使我雙涕零(부하사아쌍체령) 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 두 줄 눈물 흘리게 하나
祗爲哀此田橫客(지위애차전횡객) 다만 전횡의 객들이 슬프기 때문이네
田橫氣槪橫素秋(전횡기개횡소추) 전횡의 기개가 가을 하늘 뻗쳤었고
義士歸心實五百(의사귀심실오백) 의사 심복한 이 실로 5백 명
咸陽隆準眞天人(함양륭준진천인) 함양의 코 큰 분은 하늘에서 내린 사람
手注天潢洗秦虐(수주천황세진학) 손으로 은하를 당겨 진의 학정 씻었는데
橫何爲哉不歸來(횡하위재부귀래) 전횡은 어찌하여 귀의하지 않고
怨血自汚蓮花鍔(원혈자오련화악) 원한의 피로 스스로 연화검을 더럽혔나
客雖聞之爭奈何(객수문지쟁내하) 객들 그 기별 들었으나 하소연한들 어쩔 도리 있었으랴
飛鳥依依無處托(비조의의무처탁) 나는 새도 아련히 의탁할 곳 없어지니
寧從地下共追隨(영종지하공추수) 차라리 지하에 따라가 함께 따를망정
軀命如絲安足惜(구명여사안족석) 실낱같은 몸과 목숨 어찌 아낄 수 있으리오
同將一刎寄孤嶼(동장일문기고서) 모두 같이 목을 찔러 외로운 섬에 묻히니
山哀浦思日色薄(산애포사일색박) 산도 섧고 개펄도 시름시름 지는 해 희미하네
嗚呼千秋與萬古(오호천추여만고) 아, 천년 지나가고 또 만년이 흘러간들
此心菀結誰能識(차심울결수능식) 맺힌 이 마음 누가 알아줄까
不爲轟霆有所洩(부위굉정유소설) 천둥이 되어서 이 기운 풀지 못하면
定作長虹射天赤(정작장홍사천적) 정녕코 긴 무지개 되어서 하늘을 붉게 뻗치리
君不見(군부견) 그대는 보지 못했나
古今多少輕薄兒(고금다소경박아) 고금의 수많은 경박한 소인들이
朝爲同袍暮仇敵(조위동포모구적) 아침엔 친구였다 저녁에는 원수 되는 걸

 

 

嗚呼島弔田橫(오호도조전횡)     -  鄭道傳(정도전) ​

曉日出海赤 (효일출해적)

直照孤島中 (직조고도중)

夫子一片心 (부자일편심)

正與此日同 (정여차일동)

相距曠千載 (상거광천재)

嗚呼感予衷 (오호감여충)

毛髮竪如竹 (모발수여죽)

凜凜就英風 (늠름취영풍)

오호도에서 전횡을 조상하다 ​

새벽 해 바다에서 붉게 솟아

바로 외로운 섬을 비추니

전횡님의 일편단심

바로 이 해와 같구나

시대가 다르기 천 년도 넘었는데

내 마음에 슬픈 감동을 느끼게 하네

머리칼은 대나무같이 뻣뻣이 일어서

영걸스러운 그 기상 늠름하게 이루었구나

.....

야사(野史)에 보면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다같이 목은(牧隱) 이색의 문하에서 나왔는데,스승 목은 이색이 제자 도은 이숭인이 지은 7언 장편시 ‘오호도(嗚呼島)’를 보고 칭찬하기를 마지않자 정도전이 시기하여 도은 이숭인을 꼭 죽이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숭인은 16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21세에 성균관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을 인정받았고 원명 교체기에 여러번 유배와 복권이 반복되는 좌절에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으며 지식인으로 참여의식을 보여주었는데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명언을 보면 


“도덕이 안에 가득차면 문장으로 저절로 환하게 드러난다.”


고 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줍니다.

도은의 제자인 태종 이방원은 스승의 죽음을 전해듣고 "도은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왔다"고 애통해하고 나중에 앞장서서 도은집을 내주게 됩니다.청휘당의 건물은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 도은과 관련된 유물은 도은집이 유일합니다.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니 도은집이 가장 적합한 유물입니다.그래도 왠지 깍두기 한접시로 한정식을 차린 것 비슷하게 도은집 하나로 청휘당을 세운 느낌입니다.

 

 

▷회연서원:경북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

안내문에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년)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선조 16년(1583년)에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主享: 제사의 으뜸 대상)으로 모시고 석담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 곁에 모셔 제사 지냄, 배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현사에는 송사이 이홍기 이홍랑 이홍우 이서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位版: 위패)이 봉안되어 있다."

 

한강의 할아버지는 한훤당 김굉필의 사위였으니 한강은 김굉필의 진외증손(진외가: 할아버지, 아버지 외가)이 됩니다.김굉필은 일찍이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고 인정받은 도학(道學)의 거두라서 한강 정구선생은 자연스레 도학에 가까이 갔습니다. 


회연서원에는 400년된 것이 3가지 있습니다.첫째는 서원의 중심건물인 경회당(강당)입니다. 다른 건물은 다시 지어졌습니다.그리고 두번째는 한강매라고 하는 매화나무이고 세번째는 경회당 앞의 느티나무 보호수입니다. 

입구의 현도루(見道樓,견도루가 아니라 "나타날 현見"으로 현도루가 맞습니다.)에서 보여주듯이 무흘구곡의 경치는 도학을 닦는 무대로 생각했나봅니다.  

회연초당을 노래함 題檜淵草堂 -한강(寒岡) 정구(鄭逑)


작은 산 앞에 작은 집 小小山前小小家
동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가네 滿園梅菊逐年加
거기에 구름과 냇물이 그림 같이 꾸며주니 更敎雲水粧如畵
세상 내 생애 가장 사치하구먼 擧世生涯我最奢

한강 정구 신도비


완연대(翫淵臺: 물을 가지고 노는 대)글씨가 약간 흐릿하지만 새로로 씌여져 보입니다.

 

회연에서 우연히 읊다 檜淵偶吟- 한강(寒岡) 정구(鄭逑)


대가천은 내게 깊은 인연 있으니 伽川於我有深緣
한강과 회연(두 이름)은 여기에서 얻었지 占得寒岡又檜淵
흰돌 맑은 내 종일 (같이) 노는데 白石淸川終日翫
세상 뭔 일이 내 속에 들어오겠나 世間何事入丹田

대가천 일부분이 물이 돌아서 회연(回淵)이었지만 서원 이름을 지을때는 커다란 전나무가 있어서 전나무(or 노송나무)회(檜)로 바꾸어 회연서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의 회연서원 그림이 있습니다.우측의 짙은 바위가 바로 완연대입니다. 
지금은 태풍으로 쓰러져 없지만 겸재의 그림에는 중심에 전나무가 보입니다.

뒤로 오르면 봉비암 바위가 있습니다.봉비암은 봉비연에서 유래하는데 봉비연은 기생 봉비(鳳飛)가 춤을 추다가 실족하여 빠져 죽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현재의 봉비암은 봉이 날아가고 터만 남은 상태인데 날아간 봉은 한강 정구로 인식되기도 헙니다. 

무흘구곡의 제1곡이 봉비암입니다.무흘구곡은 1곡에서 9곡까지 단지 산수의 아름다움만을 노래 한 것이 아니라 한강 정구 선생과 구 후학들이 도학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종의 수양과정임을 보여줍니다. 

회연서원 좌측에 한강 정구 산생의 숭모각이 있습니다.

▷청천서원: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36-16

청천서당: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66-7 (칠봉리)

▷심산 김창숙 생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 (칠봉리)

심산 김창숙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면 한 사람의 족적이 맞는가 할 정도입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되었고, 이로 인해 형 집행 정지로 출옥했는데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40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1943년에는 아들 김찬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파견했지만 김찬기는 곧 병으로 사망합니다.1945년에는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왜관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 행보로 인해, 독재 비호 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습니다.1962년 5월 5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 중인 김창숙의 병상을 방문했는데 김창숙이 박정희를 외면했다는 사진이 유명합니다. 

김창숙은 유언으로 일본어를 가르치지 말라고 했고 성균관대학교는 지금도 일어일문학과가 없습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4길 37

고분군 인근에 1963년 사적 제91호로 지정되었다가 군부대 주둔으로 1966년에 지정 해제된 "성산성"이 위치해 있습니다. 현재 성산포대가 위치해 있어서 연구가 거의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공군 공항인 대구공항 이전이 진행 중이라 성산포대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을 근거로 성주군에서 군부대를 이전시켜 성산성을 반환받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입니다.

 

48호 고분은 성산동 고분중 가장 큰데 현재 100년만에 재발굴 중입니다.처음 발굴은 1918년과 1920년 고분 발굴이 진행됐으며, 제48호분은 1920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야쓰이 세이이쓰’가 조사했습니다.현재 방수포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전시관 내에 있는 토기들입니다.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

미래를 위해 성산성을 돌려 받아야겠습니다.

▷성주향교: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만화루는 잠겨있지만 좌측의 사위문은 열려있어서 돌아보았습니다.안쪽의 대성전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만화루에 오르지 않아도 여기는 지대가 높아서 성주시내가 잘보였습니다.

▷성주 백세각: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21-3 백세각

마을 들어가는 길이 좁았지만 차량은 백세각항일의적비 옆에 세웠습니다.

백세각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은 점이 특징입니다.

 

안내문을 보니 백세각은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증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공산 송준필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 장날의 만세 운동에 배포할 태극기를 이 건물에서 제작, 보관했다고 하며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했는데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을 제작, 배포한 곳으로 독립운동과 깊은 건물입니다.독립유공자 송준필과 송희근이 태어난 집이기도 합니다.

 

▷선석사: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 선석사.대웅전

선석사는 세종대왕자태실의 수호사찰입니다.여기서 보면 태봉이 보이는데 위치가 절묘합니다.

 

선석사 사찰아래 태실 옆에 태실문화관이 있습니다.

태(胎)의 기능이 5가지이군요.
호흡기능,영양공급기능,배설기능,내분비기능,보호기능 

성주는 보수적 색책가 강하지만 호국의 정신이 강하여 승왜(勝倭)리라는 지명도 보이고 올곧은 정신이 돋보인 고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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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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