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신라 불교의 발원지이며 조선 성리학의 산실

 

- 일시: 2022-12-29~30
- 날씨: 싸락눈 날리는 흐린 날
- 몇명: 홀로

 

개인적으로 구미하면 금오공고와 국가산단 정도가 떠오릅니다.수십년 산행을 했기 때문에 금오산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구미는 모례장자의 도움을 받은 아도화상에 의한 신라불교 초전지初傳地로 신라의 최초 가람이 구미의 도리사입니다.도리사가 신라불교의 발원지에 해당합니다.

 

또한 조선 유학의 고장으로 조선 성리학의 산실입니다.특히 야은 길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성리학의 의리학義理學을 들여다 볼 수 있는데 성리학은 동양철학의 정수가 되었습니다.

유학은 공자에 의해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사욕을 이겨내면서 예를 회복해가는 도덕윤리개념이었다면 이후 성리학은 천리와 인성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상호 유기적 관계를 현실적,실천적으로 구현하는 학문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성리학을 수입한 우리나라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국가 통치이념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들이 부각되는데 특히 구미는 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 학맥의 발원지이자 산실이었습니다. 중국을 뛰어넘는 동양철학의 독자적인 선진유교문화를 꽃 피우는 줄기를 보려면 먼저 구미부터 탐방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구미(龜尾)라는 명칭의 한자 뜻은 "거북이 꼬리" 정도로 해석되지만 원래 지명의 연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그냥 이두 표기처럼 의미없이 붙여진 이름입니다. 

 

 

 

▷ 답사일정(風輪) : 410km

도리사-낙산리고분군-죽장사-금오서원-성리학역사관-채미정

 

 

2022-12-29

 

"해동최초가람 성지 태조산 도리사"가 적힌 일주문에서 도리사 절까지 6.4km나 떨어져 있습니다.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이렇게 먼 사찰도 드물겁니다.도리사 제2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박)

 


2022-12-30

 

▷도리사: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도리사로 526 도리사

신라최초가람 적멸보궁 도리사는 신라 제19대 눌지왕대(417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 포교를 위해 처음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입니다.아도화상이 수행처를 찾기위해 다니던 중 겨울인데도 이곳에 복숭아 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좋은 터임을 알고 이곳에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짓고 이름을 복숭아와 오얏에서 이름을 따 도리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법을 전수한 내용은 묘허스님에게 들었는데 워낙 스토리텔링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도리사 사이트의 "아도화상"에 대한 줄거리는 아래 "더보기"를 눌러 참조하세요.

더보기

아도의 어머니 고도녕은 중국에서 온 사신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져 아도를 낳게 되었다.그 후,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고도녕은 아도를 출가시켰다. 아도가 16세가 되자 아도는 중국으로 가 현창화상 밑에서 수행을 하고 고구려로 돌아왔다.어머니 고도녕은 아들을 불교가 없던 신라로 불법을 전하라며 보내었다.당시 신라는 외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 박해가 심했었다.그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부 도개에 와서 모례장자의 집에 몸을 의지하고 낮에는 일을 하여 도움을 주고 밤에는 사람을 모아 자비로운 불법을 전하였다.그때, 양나라의 사신이 신라에 향을 예물로 보내왔으나 그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 해오던 중 모례장자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가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길 “향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그윽하여 신성하기가 이를데 없고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하였다. 이에 왕의 공주인 성국공주가 큰 병이 들어있었는데, 왕이 아도화상에게 치료를 청하니 아도화상이 칠일간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니 신통하게도 공주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그 공덕이로 불교를 전할 기회를 얻었으나, 왕이 세상을 뜨자 아도화상을 해치려 하는 무리들이 공격을 해와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모례장자의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나려하자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칡넝쿨을 따라 오시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례장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가 보았다. 한 겨울인데도 복숭아 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 좌선대에서 아도화상이 정진하고 있었다.“ 잘 오셨오.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는 두말은커녕 두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모두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아도화상은 절 이름을 복숭아 꽃과 오얏꽃의 이름을 따 도리사라 칭했고 그곳이 바로 신라에 처음 세워진 절 도리사이다.아도화상은 도리사에서 정진하다 나이가 들어 금수굴에 들어가 열반에 들었다. 지금도 도리사에서는 성국공주의 병을 낫게한 아도화상 동상 앞에서 향을 피워 올리며 가족과 친지들의 쾌차를 위해 기원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그 가피를 받고 있다.

 

 

흐린 가운데 눈발이 약간씩 날립니다.그래서 태조선원 근처에서 일출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해가 보이질 않습니다.붉은 여명만 약간 보이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필터를 이용하여 여명을 붉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도리사 화엄석탑을 먼저 찾아갑니다.보물 제 470호입니다.고려시대 석탑으로 제가 많은  곳을 탐방을 해보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런 형태의 탑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특이합니다.보주의 연꽃 문양이 정점을 이룹니다.  

건너편 극락전은 임진왜란때 불타고 조선시대 고종 12년에 중수한 것으로 나옵니다. 만듬새가 경복궁 근정전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뒤에 보이는 산이 태조산(太祖山)입니다.산 이름에서 벌써 신라 최초의 절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동육각사리탑이 발견된 세존 사리탑인데 뒤의 승천하는 용같은 고사목과 함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도리사 태조선원입니다.선원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장소입니다.태조선원은 수행하기 좋고 도인이 많이 나서 "제일도리"라는 별칭으로 유명합니다.야은 길재(吉再,1353년 ~1419년)선생이 이곳에서 스님들에게 글을 배웠습니다.야은이 공부 할 당시는 고려말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서원이나 향교가 없어서 보통 절에서 공부를 했습니다.그래서 야은 선생은 성리학자이면서 또한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성철스님도 여기서 공부를 했고 태조선원 편액 글씨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며 동학으로 시작한 천도교 신자이며 독립운동가,서예가인 오세창 선생의 글씨입니다. 

8대 적멸보궁에 속해 있는 도리사 적멸보궁입니다.

낙동강을 바라보는 전망대인 "서대"에 섰습니다.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구포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장려하고, 도리사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수려하다"고 했는데 오늘은 날씨 때문에 분위기가 반감되었습니다.

화엄석탑 근처에 보았던 문을 통해 아도화상 좌선대로 내려갑니다.좌선대는 올라가기 좋게 되어 있고 위는 평평하게 손질이 되어 있습니다.뒤로 아도화상 사적비가 보입니다.모례장자가 칡넝쿨을 잡고 올라왔을때 아도화상은 이 바위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ㅘ엄삭ㅌ

선산부사를 지내기도 했던 점필재 김종직의 도리사 시입니다.

桃李寺前桃李開 (도리사전도리개)
도리사 앞에는 도리꽃 피었더니

墨胡已去道師來 (묵호이기도사래)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誰知赫赫新羅業 (수지혁혁신라업)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終始毛郞窨裏灰 (종시모랑음리회)
모례의 움집 속엔 재뿐인 것을!

 

 

▷낙산리고분군: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98-4번지 외

이곳은 해평면으로 가야와 신라의 구덩식돌덧널무덤·덧널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200여기 분포한다고 하는데 구미 지역엔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보아야겠죠.모례장자 또한 그 당시 정치집단과 관련된 부호로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도가 모례 집에 고용되어 매일 소 백마리를 방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모례는 장자(長者:큰 부자를 젊잖게 부르는 말)였을 것입니다.

 

▷죽장사: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2길 90

죽장사(竹杖寺)의 죽장은 대나무 지팡이라는 의미입니다.국보 제13호의 선산죽장사오층석탑이 유명합니다.사실 이 탑 이외는 볼 것 없을 정도로 폐사지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제가 본 5층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편에 속해서 살펴보니 통일신라시대 모전석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5층석탑으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습니다.신라 때 한 남매가 서로 재주를 겨루다가 각각 다른 자리에 오층석탑을 쌓기로 했는데, 누이가 먼저 이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탑 옆에는 조그마한 항일투사 비석 2점이 세워져 있는데 "항일투사 한 중석 선생 은거지" 와 "선산 대장 한 문출 장군 피신지" 비석입니다.죽장사는 일제강점기 때  온갖 탄압을 받아 절집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의 위기를 겪었다고 하는 이유가 유추됩니다.한중석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중 생활을 하였고 한문 출 장군은 갑오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총지휘관으로 참여하여 일본군이 주둔한 선산읍성을 탈환하고 선산 해평에 일본 탄약고를 습격한 주역이라고 합니다.죽장사에서 잊혀진 선산 갑오동학농민전쟁 역사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탑 옆에는 폐사한 흔적의 주춧돌들이 길게 도열되어 있습니다.

죽장사는 국보 탑 하나 보러 올 이유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만 동학과 관련된 역사도 있었군요.

▷금오서원:경북 구미시 선산읍 유학길 593-31

1570년 고려말 길재(吉再)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습니다. 1575년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지금의 남산 기슭에 복원하였습니다. 금오서원은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경내에는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상현묘과 정학당,내삼문 등이 있습니다.현재 길재 외에 김종직,정붕,박영,장현광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정문 누각에 해당하는 읍청루 좌측 산길을 따라 내부를 쳐다보고 나옵니다. 읍청루 우측의 김사철 송공비가 있는데 1890년(고종27년) 선산부사로 부임하고 퇴락한 금오서원 중수하는 일을 시행하여 선산 사림이 송덕비를 세웠습니다만 김사철은 친일빈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 씁쓸한 기분도 듭니다.

 

▷성리학 역사관:경북 구미시 금오산로 336-13

구미성리학역사관은 구미시 최초의 제1종 공립전문박물관입니다.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었고 영남 인재의 반은 구미에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건립되었으며, 금오산 저수지 옆에 자리하고 있어 다채롭게 변화하는 금오산의 사계절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채미정: 경북 구미시 금오산로 366

 

금오산 아래 채미정이 있습니다.야은 길재의 호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기도 합니다.채미정은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한 정자입니다.길재는 고려시대인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랐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습니다.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입니다.

 

......

述志(술지):마음을 풀어내다. -야은 길재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띠집을 지어 홀로 한가롭게 지내고 있다네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밝은 달 밝은 바람 벗을 삼으니 흥취가 절로 나네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찾는 사람 없고 산새들만 지저귀고

利床竹塢臥間書(이상죽오와간서)

나는 평상을 대숲으로 옮겨 책을 읽는다

...

 

 

“조선이 낳은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에 있다(朝鮮人才半在嶺南 嶺南人才半在一善).” - 이중환, 『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 경상도 선산’

일선은 선산으로 현재 구미의 일부로 보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사대부의 목은 이색은 영덕 영해,포은 정몽주는 영천,도은 이숭인은 성주,길재는 지금의 구미인 선산의 해평이니 모두 영남사람입니다.


"고려 삼은"하면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로 봅니다만 이색은 유배길에서 사망하고 포은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 당한 반면 야은 길재의 경우엔 결과적으로 조용히 물러나 천수를 다했습니다.그래서 고려 삼은으로 야은 길재 대신 엉덩이가 아닌 등에 곤장 100대를 맞고 사망한 "도은 이숭인"을 꼽기도 합니다.그래서 그냥 이 네분을 합쳐 "고려사은"으로 칭하기도 합니다.  

 

목은 이색은 사대부의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수양,치인,초탈을 모두 시작한 성리학자입니다.수양철학은 권근,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고 치인철학은 조광조와 이율곡으로 이어집니다.초탈철학은 서경덕과 남명으로 이어집니다.그리고 여말선초의 정도전,정몽주,이숭인,길재 모두 이색의 제자입니다.

 

영남 사림은 목은 이색에서 야은 길재로 이어지고 이후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집니다. 

 

...

석별가(石鱉歌) -야은 길재​

가재야 가재야 (鱉乎鱉乎)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 (汝亦失母乎)

나도 어머니를 잃었노라 (吾亦失母矣)

나도 너를 삶아 먹을 줄 알지마는 (吾知其烹汝食之)

네가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기에 (汝之失母猶我也)

그래서 너를 놓아 준다. (以是放汝)

...

 

 

야은 길재의 경우 개경에 머물때 이방원과 동문수학한 사이라 결과적으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야은 길재는 정종에게 “여자에게는 두 지아비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이성(二姓)을 섬기지 않았다는 지조를 지키고 노모를 봉양하다 생애를 마치도록 해 주소서”라고 상소했습니다.길재는 정몽주와 달리 이렇게 불사이군(不事二君) 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길재는 정쟁 한 번 휘말리지 않고 피 한 번 흘리지도 않고 실질적인 이익, 명예, 목숨을 모조리 챙겼습니다. 나중에 그가 길러낸 사림이 조선을 이끄는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여말선초의 숨겨진 승리자입니다.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 숱한 사람들이 전부 다 어떻게 되었는지 고려하면 정말 대우가 좋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이색은 정도전이 독살을 했다는 설이 있고 이숭인은 정도전의 명령에 의해 등에 곤장을 맞아 죽어 정도전과 관련있고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야은 길재의 불사이군의 충,사친지효(事親至孝)의 효, 그리고 청렴함과 교육에 힘썼던 부분을 높이 평가해야합니다.아마도 야은 길재의 청렴함이 그가 살아남은 이유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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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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