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에 관한 한시가 눈에 띄어 필사를 해봅니다.
매일 새로운 꽃송이가 나와서 일일화(一日花)라고도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무성한 숲 아래에 핀 접시꽃을 보고
여름에 참 잘 어울리는 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마철이라 이렇게 햇살아래에서 보는 접시꽃도 당분간 보기 힘들 듯 합니다.

 

 

蜀葵花 (촉규화) -최치원

 

寂莫荒田側 (적막황전측)
繁花壓柔枝 (번화압유지)
香輕梅雨歇 (향경매우헐)
影帶麥風欹 (영대맥풍의)
車馬誰見賞 (거마수견상)
蜂蝶徒相窺 (봉접도상규)
自慙生地賤 (자참생지천)
堪恨人棄遺 (감한인기유)

적막하고 거친 밭가에 접시꽃
무성한 꽃송이 여린 가지를 눌렀네
날리는 향기에 유월 비 마저 그치고
바람에 고개숙인 보리 그림자 기우네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 繁花(번화)...탐스런 꽃송이 ..여기서는 최치원 자신의 학문의 경지

* 車馬誰(거마수) ...수레와 말 탄 사람.여기서는 높은 벼슬아치

* 自慙生地賤(자참생지천)...약소국 신라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럽다는 뜻

* 堪恨人棄遺(감한인기유)...약소국 신라에 태어나서 대국인 당나라 사람들에게 소외되어도 참고 견딜수 밖에 없다는 의미...그 당시 신라는 골품제로서 요즘 북한의 백두혈통(출신성분) 따지는 식이라 자신의 6두품 신분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봄



접시꽃을 예전엔 촉규화(蜀葵花)라고 불렀군요.
굳이 번역하면 "촉나라 해바라기 꽃" 입니다.
최치원이 유학시절 접시꽃에 비유하여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개탄하는 작품입니다.
최치원은 적막하고 거친 밭가에 무성하게 피어있는
접시꽃을 자신의 불우한 상황에 비유하였습니다.

 

최치원 崔致遠 (857~?)

신라 골품제 피하려 당나라 유학 과거급제한 최치원, 또 차별 받자 돌아와
전국 유랑하며 '속리산' 이름 생긴 한시...

"도가 사람에 멀어지지 않고 사람이 도에 멀어지며
산이 속세를 떠나지 않고 속세가 산을 떠나더라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남기고,
'蜀葵花' 시 지어, 천한 땅에서 컸다고 알아 주지 않음을
자신에 비유 한탄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우한 천재들은 참 많습니다.최치원처럼 시대배경이 최치원을 받아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유명한 천재화가,음악들은 불우하게 살다가 일찍 요절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천재들을 보면 굉장히 우울하고 어두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많은편 인 것은 너무 생각이 많고 고뇌를 많이하기때문에 건강이 자연히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을겁니다.작품에 대한 번뇌라든지 뭐 그런것들에서 오는 과한 스트레스때문에 수명이 단축되는게 아닐까요? 그런 정신적 혼란때문에 자살을하는 천재들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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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다. 중국 당 나라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에 모두 이해가 깊었고,
유ㆍ불ㆍ선 통합 사상을 제시하였다.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겨 한문학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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