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귀향했으나 시장의 시세와 싸우는 전사의 삶과 공부하는 학생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어서 전원 생활과 현역 생활의 그 중간 즈음 입니다. 몇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래 내가 꿈 꾼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리길 행장은 풍륜차와 튼튼한 두 다리면 족하고
앞으로 남은 생의 사는 것이 과녁처럼 명확해졌다
세상사 여기저기 미친 몇 놈에 끌리어 돌아가지만
마음이 많은 것에 받아들여 묶인 것들이 풀어진다

 
 

「귀전원(歸田園)」(전원으로 돌아가리) 3수 - 정탁


물러나 나아가길 구하지 않으니 退潛不求進
세인들 물정 모른다 말들을 하네 世人或曰迂
이 마음 어디고 매인 데 없으니 此心無係累
영욕의 마음이야 본래 없다네 榮辱本來無

 
 
 
 
 

이 시는 33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에 대사성, 대사헌, 이조 판서,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우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7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은퇴하고 고향 예천으로 돌아간 정탁의 시입니다.전체 3수 중 세 번째 시입니다. 무엇보다 정탁의 상소로 인해 이순신은 백의종군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출세를 지향하는 세속에서, 물러난 후 다시 나아가기를 추구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말이 많았나 봅니다.그러나 시인은 영욕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의지에는 변함이 없고, 청산을 즐길 뿐입니다. 옛날 벼슬한 관인들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전원의 한가로운 생활을 노래합니다.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진정한 바람 속에 모든 관직을 거절하는 경우일 때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그저 욕심 없는 마음을 보이기 위한 구호에 불과할 때도 합니다. 「귀전원(歸田園)」의 전통은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의 「귀전원거(歸田園居)」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며, 현대로 내려와서는 전원주택 생활과 귀농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탁 / 1526년(중종 21년) ~ 1605년(선조 38년)

조선의 정치가.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栢谷),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청주(淸州). 현감(縣監) 원로(元老)의 증손, 이충(以忠)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명종 13) 문과(文科)에 급제, 1566년(선조 1) 교리(敎理)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조 좌랑(吏曹左郎)ㆍ응교(應敎)를 지내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司諫院)의 계청(啓請)으로 이조 참판에 전임, 이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대사헌으로 재임되었다. 1589년 우찬성(右贊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左贊成)으로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이듬해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했다. 1594년 우의정이 되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몸소 전장(戰場)에 나가 사기를 돋우고자 했으나 왕이 그의 연로(年老)함을 들어 만류했다. 1599년 관직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으로 등용되어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1603년(선조 36) 영중추 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경서(經書)는 물론 천문ㆍ지리ㆍ상수(象數)ㆍ병법(兵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李舜臣)ㆍ곽제우(郭再祐)ㆍ김덕령(金德鈴)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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