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대표적인 風流道人이대표적인한국인,이상적인 한국인이다.

 

- 언제 : 2009.11.14(토) 04:40~2009.11.15(일) 21:40
- 얼마나: 2009.11.14 12:40~15:40(3시간)
- 날 씨 : 대체로 맑음
- 몇 명: 35명
- 어떻게 : 새산들산악회 동행

매표소-계단로-참성단-암능길-마니산(469.4m)-고개삼거리-함허동천-주차장
- 개인산행횟수ː 2009-26[w산행기록-239/T728]
- 테마: 풍류산행
- 높이: 마니산469.4M
- 가져간 책:風流道와 한국의 종교사상(유동식 저)

- 호감도ː★★★★★


 

강화江華,이름 그대로 풀이하자면 "강이 빛난다"는 의미이다.바다에 있는 섬인데도 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왠일인가? 인천광역시 소속의 우리나라 4번째로 큰 섬인 이섬은 한강,임진강,예성강,한탄강의 퇴적물이 쏟아져 나오는 강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기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그래서 강화의 바다는 갯벌의 물과 같이 혼탁하지만 이곳은 이런 이유로 황금어장이다.강화도 특산물 중 하나인 추젓 생산량의 70%가 강화 앞바다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강화江華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강화도 마니산엔 참성단이 있다.마니산은 머리를 뜻하는 "마리"에서 한자로 취하는 과정에서 "摩利山마리산"이 되었다고 한다.한반도의 가운데 쯤에 솟아 있는데,마니산 정상에서 가늠해 보면 남쪽 한라산까지와 북쪽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고 한다.그 세 점을 이으면 긴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데, 가운데 꼭지점이 마리산이 되는 것이다. 머리산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적으로 참성단(塹城壇)을 꼽을 수 있다."구덩이 참塹"에 "성 성城"이다.참성단의 형태를 보면, 위는 땅을 의미하는 사각형이고 아래는 하늘을 뜻하는 둥근 원의 모습이다.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귀하게 여기므로 제단은 반드시 물 가운데에 있는 산에 만드는 것이요,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상방하원의 형태인데,땅이 위이고 하늘이 아래에 위치하는 이유는 하늘의 양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땅의 음기는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는데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어 짐으로서 음양의 기운이 교합하고 조화를 이루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하늘과 땅에 대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는 의미도 포함된다.

 

참성단은 고려시대부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이 다양하게 전해 오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참성대(塹城臺)·참성초단(塹城醮壇)이라고 하였고, ≪성종실록≫에는 마리산(摩利山) 초단(醮壇),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마니산 초성단(醮星壇)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참성단(塹城壇)이라는 표기가 ‘참호를 파고 쌓은 성에 있는 제단’ 즉 마치 해자(垓字)를 둘러놓은 참성(塹城)의 제단이라는 의미로 가장 적합하게 쓰인다. 참성단이 축조된 시기는 ≪고려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사람들이 고조선시대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이곳은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의 성지다.그렇지만 접화군생의 측면을 고려하면 풍류도의 성지이기도 하다."접화군생接化群生"은 최치원 선생이 풍류를 풀어 말할 때 썼던 말인데 우주만물과 더불어 깊은 교감을 이루며 함께 진화,해방시키는 삶을 이르는 말이다.풍류도의 선맥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만나는 환인,환웅,단군과 관련이 있어서 풍류도의 성지이기도 한다.

 

조선조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를 보면 단군·혁거세·주몽· 술랑·영랑·안상· 남랑· 옥보고·김렴효· 소하대로·산시· 김가기· 최치원·강감찬· 권진인·김시습· 홍유손·정붕· 정수곤·정희량으로 이어진다.그외 여러 가지 자료를 보면 인물에 있어 언급하는 이름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풍류도의 조종은 "환인"으로 보고 있다.“환인진인이 동방선파의 조종이고, 환웅천황은 환인의 아들이다”(조여적, 1998, 16). 이렇게《청학집》의 저자 조여적은 변지가 지은《기수사문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그 전거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환인의 선맥은 환웅으로, 환웅의 선맥은 단군으로 이어진다. 단군의 선맥은 신라의 사선(四仙)인 영랑‧보덕‧옥보고‧이순보에게 이어진다. 사선의 선맥은 다시 물계자‧원효‧도선을 거쳐 대세 구칠, 그리고 드디어 최치원에게 이른다.

이후 수운 최제우에 의한 동학에서 다시 한번 풍류도가 일어났고,현대에 와서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인으로 신천옹 함석헌 옹을 꼽는다.그는 대표적인 한국인을 대표적인 풍류도인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여러 풍류도인 중 특히 원효,율곡,함석헌을 대표로 꼽는다.원효는 불교인이요, 율곡은 유교인이요,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된 풍류도적 특성이 들어 있다.전통적 종교를 넘어선 종교인이라는 데 있다. 원효는 불교인이면서 전통적 불교의 한계를 넘어선 참 종교인이었다. 율곡과 유교, 함석헌과 기독교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격에 들어가서 그 격을 넘어선 격의 예술인의 경지이다. 여기에 멋이 있다.



부산에서 강화도를 왕복하며 버스에서 읽은 책이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이다. 이책은 우리나라 100대 명저에도 포함되고 50대 명저에도 포함된다.산행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욕심이 생기면 100대 명산을 찾듯이 독서도 습관이 들면 한국의 100대 명저를 찾게되는데 한국인으로는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단군신화의 구조를 통해 한국신학의 해석학적 원리로서 "한 멋진 삶"이라는 풍류신학을 전개하고 이에 관한 여러 저술을 남긴 유동식 교수야 말로 단군신화를 신학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풍류를 "한(크고 유일하다는 의미)+멋진+삶"으로 해석한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의 3요소인 자연 + 예술 + 인생에 대하여 깊이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풍류"의 저자인 신은경辛恩卿은 풍류를 "한恨과 흥興과 무심無心이 합쳐진 개념"으로 본 것에 비하면 유동식 교수의 해석은 "천.지.인의 조화"라는 삼태극적인 구조로 해석한 것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본다.유교수는 환인의 환은 광명을 나타내며, ‘환’에서 존칭어 ‘님’을 붙여 환님 곧 환인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따라서 ‘환임’(桓因)은 광명한 하늘의 신을 표시하는 것으로 바로 하느님으로 해석한다.따라서 환인은 하늘(天)이 되고 환웅은 재생(곡식의 씨앗이 뿌려지면 씨앗은 죽지만 그것이 재생되어 다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곰이 상징하는 뜻은 수렵민의 토템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신적 존재인 지모신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일반적으로 동굴은 모태를 상징하고, 동굴 속에 머물었다는 웅녀는 지모신(地母神)이요 생산신-삼신-을 의미한다.)으로 웅녀와 결혼하여 지모신(地)에 해당되고,단군은 사람(人)에 해당되는 구조를 삼태극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니산 산행은 참성단에서 단군이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단군(사람,人)이 환인(참성단의 원형,天)과 환웅(지모신,땅,地)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를 알 수 있고 풍류도의시원의흔적을그려보는산행이되는것이다.

 

그렇게 볼 때 풍류도는 우리 역사의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풍류도는 남북 모두의 정신적 뿌리이다.풍류도는 단군 고조선 시대부터 있어 온 민족 고유의 사상으로서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된 유일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우리에게 풍류도가 내재적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유동식 교수의 말을 빌면 "풍류도는 한인으로 하여금 한인되게 하는 민족적 얼이며, 그것은 포월적인 한과 인간적인 삶의 창조적 통합에서 성취되는 예술적인 멋의 얼이다. 한인의 이상은 “한 멋진 사람”이 되는데 있으며, 풍류도인이야말로 이상적인 한국인이다."는 것이다.나는 우아한 삶을 위한 풍류도에 근접하여 이 시대에 맞게 접화군생하려고 더 노력해야겠으며 최치원 이후 흐릿해진 풍류도의 흔적을 접화군생적인 사고로 생각의 폭을 좀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마니산 참성단에서 할 수 있었다.

 

 

 

1316
새벽 4시 40분에 일어나 산행준비를 하고 6시 20분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부산에서 강화
까지 6시간 반을 달려 산행들머리까지 가는 동안은 독서와 PMP 영화관람으로 시간을
보냈다."풍류"를 영어로 표현하면 "엘레강스elegance"이고 "엘레강스"를한국말로번역
하면"우아,고상"이 된다."우아한 삶"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부산에서 강화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했지만 날씨는 대체로 맑은 편
이다.산행은 이미 정오를 지나서 햇볕이 눈부시게 비친다.

1325
빛내리는 계곡에 갈대는 춤을 추고 다리는 육중한 일곱바퀴를 굴리는 듯 하나 과묵하기
이럴데 없다.풍류도인 원효의 금강삼매경이 떠 오른다.



“무릇一心의 근원은 有와 無를 떠나 홀로 청정하고,
三空의 바다는 眞과 俗을 원융하여 넉넉하고 고요하다(湛然).
단연함으로 둘을 융합하였으나 하나가 아니요(融二而不一),
홀로 청정함으로 양극을 떠났으나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離 而非中)."

 

진과 속의 장벽을 넘어선 자유자재한 삶을 산 분 답다.

1339~1350
기도원에서 일반등로와 계단등로로 갈림길이 있다.나는 계단등로를 선택했다.
왠지 모르게 참성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단군길이라는 계단등로로 오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1350
강화 마니산은 전국 제1의 "생기처"라는 안내문이 보인다.엘로드 회전수를 바탕으로
"기센 곳"이라는 증명해 놓았다.



이와 유사한 자료가 있다.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박사가 영적으로 의미있는 한국의
여러지역의 에너지수준을 측정한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서울은 445,제주도가 440
으로 측정되었다.놀랍게도 계룡산과 마니산이 똑같이 785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측정수준이 가장 높은 성당과 같은 수준이라고 한다.참고로 에너지 수준이 200은 "용기"
의 수준,500은 사랑의 수준이며 700~1000은 "깨달음"의 단계로 최고 높은 수준이다.

1354~1418
날씨는 맑으나 산에 오를수록 바람이 거세어져 산행인들의 발걸음이 종종걸음이다.
마니산 정상 가까이 오르니 드디어 고대하던 참성단이 보인다.







 

1421
그런데 출입이 통제되었다.아마도 보수공사를 하는 모양이다.공사 관계자들만이 참성단에
올라있는 모습이다.나는 하얀 펜스 아래에서 참성단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보았던 모습을
상상한다.참성단 위로 우측에 소사나무가 보인다.소사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추진
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참성단 주변으로도 제법 많은 소사나무들이 보인다.





 

1425
강화도 마니산이라는 정상목 아래 바람을 피해 점심식사를 하고 암릉길로 향한다.
조금 내려가니 "참성단 중수비"가 있다.약간 기울어진 바위의 평평한 면에 비문을
새겨놓았다.정유(丁酉1716년) 단양월 행(行) 유수 최석항(崔錫恒) 기(記)로 마무리
되어있다.

 

1426~1445
마니산에서 바다를 바라본다.이번엔 함석헌 옹의 "수평선 너머"라는 시가 떠오른다.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또 무엇이 있나?

 

물결,
앞에도 앞에도 푸른 푸른
옆에도 옆에도 하얀 하얀

 

물결 또 물결
저 물결 뒤에는 또 무엇이 있나?


…‥
바다 아닌 바다
물결 아닌 물결
바람 아닌 바람
소리 아닌 소리
거기가 가고파서 그리워서”

 

일신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역사의 수평선 너머로부터 다가올 구원의 소식을 기다리며 노래했다.

 

"오,바람아,
겨울이 만약 온다면야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과연 그 답다.

 

"예수도 한곡조 음악이요,석가도 한 곡조 음악이다.나의 이 노래는
그 영원한 노래의 한 연습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초월해 버린 풍류도인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1451~1521
능선의 모습이 실로 이채롭다.누군가 인위적으로 능선을 따라 큰 바윗돌을 쌓아놓은 듯
이어지는데 안전을 위한 로프가 바위에 꽃힌 철심에 묶여있다.바람은 점점 거세어지는데
능선을 걷다보니 달리 피할 방법이 없다.그렇게 능선이 이어지더니 바위위에 늠름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보일즈음 내리막길로 방향을 바꾼다.

 

 



 



 



 



 

1641
하산길은 낙엽이 수북히 쌓여져 가을의 운치를 더하는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애잔한
가을노래와 어우러지며 가을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 같다.

 

산행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전등사이다.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
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
(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
(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643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
(裸婦像 벌거벗은 여인)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나부상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1646~1651
전등사 뒷편으로 가면 사고가 있다.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영변
묘향산,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현재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고 한다.





 

전등사 관람을 마친 후 배를 타고 내일 해명산 산행과 낙가산 보문사 관람을 위하여
석모도로 향했다.



수평선이 해를 잡아먹고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밤새 옆방에선 온갖 안주를 잡아먹고 열변을 토하는 소리를 자장가 대신 불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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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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