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금오산▲남은 것은 오직 고요,고요속에 머물게 됩니다.

- 언제 : 2010년 5월29 08:~16:30
- 얼마나: 2010.5.129 09:50~13:50(4시간)
- 날 씨 : 맑음
- 몇 명: 홀로
- 어떻게 : 자가용 이용
▷하동 금오산 청소년 수련원-경충사-약수암-석굴암-미륵당-마애불-금오산 정상
해맞이공원-석굴암-수련원(원점회귀)
- 개인산행횟수ː 2010-5[w산행기록-248/T736]
- 산 높이:875m
- 테마: 사색산행
- 호감도ː★★★★



1998년 뤽 베송의 영화 "그랑블루(the Big Blue,Le Grand Bleu)의 생생한 감동은 아직도 여운이 남습니다.프랑스에서 세운 210주(4년여)의 롱런과 관객동원 1500만명의 대기록은 세계 영화사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것으로, 감독 뤽 베쏭을 현대의 명감독 10걸에 올려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장 마크 바 배우가 분한 작크(Jacques Mayol: 1927 - 2001)는 실존 인물로, 17살 때부터 해저에 도전했고, 1983년 56세의 나이로 수심 105m 까지 잠수한 기록을 세운 무산소 잠수 대회 신기록 보유자로서 해저 탐사 연구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합니다.아직도 생생한 작크의 명대사인 "물 속 깊이 내려가면 바다는 더 이상 푸른빛이 아니고, 하늘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되지."라는 대사입니다.

 

오직 고요만 남는 그 느낌을 위하여 수심 105M까지 내려 갈 수는 없지만 가끔 산을 다니다보면 고요 속에 놓여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산 정상에서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지만 산행 내내 등로에서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고,자신의 숨소리 때문에 뒤짚힌 나뭇잎의 깔깔거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순간,나는 지금 산속을 걷고 있지만 흡사 파란 하늘이 바다의 수면처럼 느껴지고 꽃과 나무는 산호와 수초처럼 느껴집니다.나는 그속을 유영하고 그속에 갇힙니다.끝없이 잠수를 시도,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숨지는 엔조처럼,결국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산 속에서 숨을 쉬고, 산 속에서 숨소리를 느끼지 못합니다."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色卽是空·空卽是色"를 여기서도 느낍니다.

 

 

 

0950

금오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우리나라에 내가 아는 것만도 대여섯개 됩니다.
금오산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중간의 "오"자에 따라서 음양오행적으로 느낌이 다릅니다.
보통 구미의 금오산金烏山처럼 "까마귀오烏"자가 오는 경우가 있고,경주 남산의 금오산
金鰲山처럼 "자라오鰲"자가 쓰입니다.하늘을 나는 까마귀는 하늘을 의미하는 새조鳥자와
비슷하고,거북이와 비슷한 자라는 물에서 살기 때문에 글자 아래에 물고기어魚자가
놓입니다.그래서 구미 금오산과 이곳 하동의 금오산은 엄밀히 말해서 동명이산(同名異山)이
아닙니다.동성이산[同聲異山]이지요.


 

하늘을 나는 새와 물에 사는 고기는 느낌적으로도 상반됩니다.그래서 당연히 오행으로
따져도 틀립니다.그렇지만 金烏山이든 金鰲山이든 금산金山입니다.금산은 모양이 바가지나
철모처럼 둥그런 산입니다.이런 곳에서는 부자,장군이나 인물이 잘생긴 사람이 배출된다고
조용헌 교수의 소설이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여담으로 대학자가 나오려면 잘생긴 필봉산이
제격입니다.다행히 제가 사는 곳은 백양산의 백양마을인데 뒤에 삼각봉이 있습니다.삼각봉은
필봉산의 다른 이름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름이 金鰲山이라면 자라오鰲자만 보더라도 이곳은 도교나 오행의 영향을 받은 이름
이라고 느껴야합니다.도교의 봉래산(삼신산)을 받치는 바다 아래는 자라가 받치고 있기 때문
입니다.봉래산엔 불노초가 있어서 진시황의 사신 서복(중국식 발음은 서불)이 불노초를 구하려고
삼신산을 찾은 곳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중국에서 볼때 우리나라는 동쪽입니다.


 

이것은 삼신산이 중국의 바다 동쪽에 있다는 상상은 그것이 한반도에있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해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의 명산을 삼신산으로 빗대어 말하게끔 됐기 때문입니다.

 

서복이 서쪽 으로 간 포구라 해서 제주의 서귀포西歸浦라는 이름이 있고 제주 정방폭포엔 서불이
다녀갔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리산 쌍계사는 현판을 보면 삼신산 쌍계사라는 글이 보일 겁니다.
부산에서는 영도에 봉래산이 있습니다.아마도 불노초를 찾아서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나라 여기저기 봉래산이 존재합니다.사실 서복이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우리나라에 왔기
때문에 지리산이나 금강산도 섬으로 느꼈을 겁니다만 원래 도교속의 봉래산은 섬입니다.
봉래산은 바다에 떠 있는데 그 섬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자라입니다.



남원 광한루에 가면 그 축소판이 있습니다.광한루에는 연못 속에 섬 모양으로 만들어진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천체(天體)와 우주(宇宙)를 상징하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바탕으로 한 여러 구조물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 혹은
삼신선도(三神仙嶋)로 불리우는 영주산·봉래산·방장산을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 속에
건설하여 옛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정신사적 구조물
로 되어 있습니다.봉래산은 금강산의 다른이름이고,방장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만 근본은 도교의 영향에 의한 이름입니다.

 

광한루 앞 오작교 입구에, 화강암으로 곱게 깎아 만든 ‘큰 자라돌’이 삼신산을 바라보고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이 앉아 있는 모습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그 자라돌을 오석(鰲石)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오는 자라오鼇자입니다.



자라가 삼신산(三神山)을 등에 업고 있다는 전설은 금산사,개태사의 삼천일지에도 나옵니다.
'동해 대오 배부 삼신산(東海 大鰲 背負 三神山)이라고 하는데,동해에 살고있는 큰 자라가
삼신산을 업고 있다는 의미입니다.그래서 자라만 보더라도 삼신사상,신선사상,풍류사상과
연관지어 볼 수 있고 곤륜산이 서방의 낙원이라면 삼신산은 동방의 낙원입니다.

 

자 이제 산으로 듭니다.입구에 중방동문衆芳洞門이라는 새김돌이 보입니다.


 

중방衆芳은 "많은 꽃(=온갖 꽃,많은 향기로운 꽃)"을 의미하는데 "賢臣(현신)들이 많음을 비유"
하기도 합니다.그러므로 중방동문은 "많은 꽃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혹은 "賢臣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도 되겠지요.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현신賢臣이라면 정기룡장군을 의미하는 지 모르겠습니다.바로 정기룡 장군을 모신 사당인
경충사가 나옵니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육군의 명장입니다.60여회 전투에서 전승을 거둔 명장입니다.
요즘 같으면 게릴라식 특전부대의 장군으로 보면 되겠습니다.전쟁영웅이지만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선조임금이 7년이 지난 후 슬그머니 선무 1등공신에 올렸기
때문입니다.30대 젊은 나이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정기룡이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이곳 주위 산야에 부친의 묘소가 있고,첫째부인 진주 강씨(진주성 정복시 남강에 투신 자결함)
의 의대묘가 있습니다.

 

수군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군에는 정기룡이 있었다라는 찬사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인물
입니다.권율과 김시민이 방어에만 치중했다면,개인의 무력과 지략으로 싸운 사람은
곽재우와 정기룡인데 정기룡은 가히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특히 포로로 잡힌 상관을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로 그를 구한 그의 용맹을 일컬어 조선의 조자룡이라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임진왜란의 공로를 평가한다면 이순신 다음으로 정기룡이랄 수 있습니다.

 


 

정기룡에 대한 재평가가 실로 아쉬운 부분입니다.거북선을 만든 나대용이나 북관대첩의 큰공을
세우고도 사력을 다해 피하고자 했던 시기와 질시로부터
끝내 자유롭지 못해 결국 그가 창원부사 때 지은 초회왕(楚懷王)의 시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는
죄로 60세에 고문사 당한 정문부에 대한 평가도 너무 소홀하지만
어찌 정기룡장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도 박할까요.논개 보다도 못한 평가라니...

 


경충사(景忠祀)가 있는 이곳,경남 하동군 금남면 진교리 금오산(849m) 기슭은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태지(胎址)이기도 합니다.그의 호는 윤봉길과 같은 매헌(梅軒)이며 자는 경운(景雲)인데
실로 조선의 상서로운 빛,경운[景雲=서운(瑞雲])이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色卽是空·空卽是色"를 여기서도
느낍니다.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됩니다.두손 모아 충심으로 예경하고
뭔가 제가 할 수 없는 대한민국 못난 후손 중에 한명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1014

조금 더 오르니 약수암이 보이는데,계곡의 끝나고 물이 모이는 저수지
입구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약수암의 약수는 상선약수를 의미하겠지요.
물 가까이 있는 곳이니 이름이 딱 어울립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물은 미세한 틈 사이로 스며들어 만물을 키우고,
어떤 고정관념도 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어쩌면 물처럼 흐르는 사유는 선악도, 좌우도,
어떤 이분법도 알지 못하는 법인데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정치인에게는 참 어울리는 좌우명이기도 합니다만 상선약수는 개개인의 좌우명
과 별개로 그 자체로 훌륭한 삶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1026

"쥐오줌풀"입니다.냄새를 맡으면 쥐오줌 냄새가 난다는 이꽃까지 있으니 중방衆芳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군요.사실 큰꽃으아리,졸방제비꽃,골무꽃,노린재나무꽃,철쭉,
병꽃나무 등 다양한 꽃들이 보입니다.

1040

이곳 금오산은 물과 산이 합작으로 만든 암반계류는 삼남제일의 암반계류라는
동악산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마을의 식수로 사용되며 무척 깨끗합니다.
금오산을 찾아야 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1053

영험해 보이는 큰 나무아래에 돌로 둘려쳐진 방호가 나오는데 자세히 보니
무속의 장소로 보입니다.금오산의 자라가 연상되면서 미륵신앙과 관련 있어
보입니다.

1132

드디어 조망이 터집니다.바다에 섬들이 무척 아릅답습니다.자라 같은 돌들이
너덜이 되어 계곡아래로 향합니다.그리고 곧 고려시대 축조한 봉수대 흔적이 나오고
석굴암입니다.물맛이 최곱니다.규모는 적고 시설도 다소 부실하지만 갖출 건 다
갖추었습니다.물 가까운 곳에 양초 몇개두고 아주 적은 용화전이 있고
본존이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 좌측에 산신각이 있습니다.산신은 서신[西神]입니다.

 


그래서 방위로 서쪽을 의미하는 좌측에 있겠지요.
그래서 백호와 어울립니다.올해는 백호의 해인 경인년입니다.
서쪽과 흰색,그리고 살성殺性을 지닌 호랑이를 조합해보니 서해의 천안함침몰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1143

너덜지대가 끝나고 이젠 토산의 산길로 향하는가 보았더니 바로 미륵당입니다.
미륵당도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자라는 낙원을 의미하는 이상향을 의미한다면
그런 세상을 원하는 미륵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금오산에 있는 미륵당의
의미입니다.마애불로 향하니 이곳의 나무마저 허리굽혀 예경을 하군요.

 





121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90호 하동 금오산 마애불입니다.달을 업은채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형상인데 바로 옆에 9층탑이 새겨져있습니다.고려시대 작품으로 화엄경의
중심불상인 비로자나불(대일여래)입니다.대일여래는 역사상 실재했던 불타인 석가모니불과는
달리 우주적 통일원리의 인격화를 불타로 보는 것이며, 따라서 대일여래의 기본적인 성격은
절대적인 원리의 인격화입니다.대일여래는 지혜 그 자체일 뿐 아니라 그것의 무한한 활동
이기도 합니다.그래서 그가 바라보는 곳은 상선약수,지혜의 상징인 물이 도서관처럼 많은 곳
바다입니다.대나무가 커서 바다를 가리자 바다를 가리는 대나무는 모두 잡목처리로 베어져
있습니다.


 




 

1246

마애불을 넘어서니 산 정상의 통신시설 관리를 위한 임도와 만납니다.곧 통신시설 때문에
정상석이 아래에 놓여있는데 금오산과 소오산이 적혀있습니다.소오산은 금오산의
옛이름입니다.금오신화와 관련있는 김시습이 20대에 소오산수(嘯傲山水)라고 하여 천하를
돌아다녔습니다.한글로로만 적혀있고 한자로는 없는데 아마도 소오산嘯傲山이 아닐까
유추해보입니다.

 

'소오(嘯傲)'의 출전은 <음주(飮酒)>라는 시인데, 이 시의 저자인 도연명(陶淵明)은
"구속됨 없이 자유로운 상태"라는 뜻합니다.구속됨이 없이 자유로움은 지혜의 상징이고,
이곳 소오산은 그렇게 소요하기에도 적당한 높이입니다.



 

 

1249

바로 아래에 해맞이 공원이 있습니다.이곳에서 다시 바다를 보며 하산을 합니다.
다시 석굴암으로 내려와서 수련원으로 내려옵니다.물과 지혜와 미륵과 금오와 중방
그리고 심연에 가까운 고요에 취한 산행이었습니다.

 

흐린날 이산을 찾았다가 깊은 운무에 갇혀
"금오산! 참좋은 산인데.. 정말 좋은 산인데.. 그렇다고 다시 오기도 그렇고.."
라고 한 평가를 떠올리며,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금오산! 참좋은 산인데.. 정말 좋은 산인데.. 산행을 하고도 숨겨진 보물을 못본다면........."

 

1411

산행을 마치고 근처 "술상"마을을 찾습니다.작은 포구에 횟집이 다섯집 있습니다.
아마도 전어를 중심으로 영업을 하는가봅니다.마을이름이 "술상"이고 그 술상에 오르는
안주는 전어인가 봅니다.그래서 술상전어마을입니다.
아직 제철이 아닌지 이곳도 고요하기만 합니다.

1514

돌아오는 길에 잠시 다솔사를 관람합니다.눈에 익은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이곳에는
묘자리를 쓰지 못하게 왕명으로 금한다는 표식입니다."봉황이 우는 터"라는 봉명산이니
그 만큼 명덩터라는 의미입니다.)를 지나니 바로 다솔사입니다.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항일 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고,
작가 김동리는 그의 대표작 ‘등신불’을 쓰는 등 다솔사는 불교계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으며.
사찰 뒤편의 200~300년된 야생 차나무밭이 있고,50년 전,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스님이
제멋대로 자란 차나무를 다듬고 가꿔 명차 ‘반야로’가 만들어졌다는 글을 읽고는 기회가 되면
한번 꼭 찾아보기로 한 곳이 다솔사입니다.

 

먼저 차밭부터 둘러봅니다.적멸보궁 뒤 명당터에 자라는 차밭때문인지 키 큰 나무 사이,
사광으로 들어오는 빛을 안고 있는 차밭은 실로 서기어린 모습이라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습니다.지금까지 녹색이 이렇게 찬란한 빛인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적멸보궁 사리탑 뒤로 차밭과 키 큰 나무 경계지점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모통 사람들은 눈치를 못챌 곳에 있는 이 비석엔 만덕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덕萬德은 "만 가지에 달하는 덕을 가진 이는 부처뿐이라는 뜻"이니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이 봉명산은 부처님의 산인 셈입니다.

 







 

1541

마지막으로 효당 최범술의 사리탑을 찾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셨고,학교장을 엮임했으며,해인사 주지가 되기도했고,제헌의원으로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도 하신 분으로 차茶를 대중화 하신분입니다.

 

독립운동가,승려,정치가,교육자,다도인...경계를 넘나드는 이분의 삶은 매달려 간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년의 삶은 달랐나봅니다.



세간의 이야기로는
비구승과 대처승의 다툼,환갑이 넘어서 젊은 여자(예술인)의 구애에 결국 동거하시고
득남을 하여 말년엔 불행했다는 분의 사리탑은 다솔사 입구의 주차장 근처에 있습니다.

 


효당범술지탑堂凡述之塔


 

다솔사로 출가하여 다솔사가 효당의 집이었던 셈인데,다솔사의 부도밭으로 가지 못하고
다솔사 문을 못넘고 다솔사가 바라보이는 입구,기슭에 놓여있는 사리탑..



이곳에서도 "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色卽是空·空卽是色"를 여기서도
느낍니다.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됩니다.두손 모아 예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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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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