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억을 복원하는 것은 보전과 새로운 미래가치창출 작업이지만

 

- 일시 :2022.11-19~20
- 날씨 :구름끼었지만 대체로 맑음
- 몇명:홀로 

 

▷ 답사일정(風輪) : 경주 256km

명활성(일박) - 경주읍성 - 집경전구기 - 경주문화원 - 서경사 -탈해왕릉 - 신문왕릉 - 원성왕릉 - 구정동방형분-장항리사지

 

 

 

경주는 사진촬영과 문화유산답사를 포함하여 상당히 많이 갔지만 개인적으로 경주시내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생소한 곳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이라서 문화유적의 훼손이 심했기 때문일 겁니다.그래서 발굴조사 이후 복원이 어느 정도 진행된 유적지를 찾다보게 되었습니다.

 

복원 (復元/復原)은 원래대로 회복함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는 어렵습니다.제대로 복원을 하려면 고증이 제대로 되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전해져 내려오는 정확한 도면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명활성은 현재의 기술로 일부 복원된 모습으로 보이고,경주읍성은 4대문 중 동문(향일문) 쪽이 복원되었습니다.서경사는 보수 중인지 온통 파란 방수포 가림막을 쳐 놓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장항리사지"는 아직도 원래의 이름도 알지 못하여 "장항리라는 곳에 있는 절터"라는 의미로 복원은 꿈도 못꾸는 처지인데 도굴 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부서진 좌대까지 접근하는 길조차 없어졌습니다.건너는 다리가 부서지고 계곡이 파인채로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경주 월정교가 복원되었듯이 앞으로 더 많은 유적지가 복원되어 기억을 복원하여 보전하고 관광객 유치로 새로운 미래가치를 창출하기를 기대합니다. 


       

 

2022-11.19

 

명활성(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12)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 신라 초기의 산성임을 말해주는데 경주의 동쪽 관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선덕여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되려고 한 상대등 벼슬의 비담이 명활성에 웅거하며 김유신과 승부를 벌였던 곳으로 김유신은 난을 진압하고 비담을 잡아 구족을 멸했던 곳입니다.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비담은 명분으로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를 내세웠습니다.월성에 별이 떨어져 비담은 월성이 패할 징조라고 했는데 김유신은 오직 사람하기 나름이라며 허수아비를 연(鳶)에 실어 날리며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며 선전하여 이겼습니다.과거에도 심리전,선전전 등 사기진작을 위하여 하이브리드 전쟁을 했습니다.비담의 난 이후 귀족세력은 점차 후퇴하고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등극하면서 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명활산성작성비"가 있는데 명활성을 쌓을 당시의 기록입니다.

 

 

1차 발굴조사지까지 가보았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습니다.

 

(일박)

2022-11.20

 

경주읍성: 경상북도 경주 동문로43번길 16

 

계림초등학교 근처 공터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경주읍성으로 갔습니다.생각보다는 깔끔하게 잘 복원이 되어 있습니다.

향일문(向日門) 앞쪽에 석재들이 모여 있습니다.

두그루의 괴목이 운치를 더합니다만 그 중 나무 한그루는 거의 고사목 수준으로 죽어가는 모습입니다.잎이 달려 있는 것이 신기 할 정도입니다.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

경주읍성 안쪽으로 조금 이동하다보면 집경전구기가 나옵니다."집경전이 있던 옛터"라는 의미입니다.석물 뒤쪽에 "어필"이라고 했으니 정조 임금의 글씨로 보입니다.

 

집경전은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던 곳입니다.최초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의 어진은 4곳에 봉안되었는데,관향인 전주에 경기전, 고향인 영흥에 선원전, 그리고 옛 서울인 경주의 집경전과 개성의 목흥전에 각각 어진을 봉안하였습니다.

집경전은 임진왜란때 불타고 석조물만 남은 상태입니다.

 

 

모아놓은 석재들이 보이는데 중간에 하얀 비는 부윤 여필용의 선정비입니다.

터널 모양의 석조물이 있는데 보관창고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경주문화원: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29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보질 못하고 비천상이 아름다운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있던 종각만 담장너머로 보았습니다.지금 신종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그 이전엔 이곳에 있었습니다.

조지훈과 박목월로 유명한 산수유나무도 보질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예전엔 경주문화원이 경주박물관이었습니다.

[조지훈에게 보내는 박목월의 답신]

"경주 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늘 외롭게 가서 보고는 했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 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오실때 전보 주시압."



산수유 피는 봄에 다시 찾아가보아야겠습니다.

 

 

 

▷경주 구 서경사(경북 경주시 금성로318번길 15)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절입니다.우리나라 건물과는 다른 일본식 건물이어서 특이하지만 오늘은 푸른 방수포로 완전히 덮어 놓아서 보질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갑니다.일제시대 한국의 경주 유적을 일본으로 도굴을 포함하여 가져가려고 했던 일본인들의 모임장소 구실도 했다고 합니다.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합니다.


탈해왕릉


신라 최초의 석씨 왕으로 신라초기 무덤양식으로 봉분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현재 보이는 상석도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원형토분이지만 제 눈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원형토분으로 이곳은 소나무 군락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끝내줍니다.아마도  소나무를 전문으로 하는 수목농원에서 감정한다면 한그루에 수억원 호가하는 나무들이 너무 흔하게 있는 곳이 이곳으로 보입니다.

 

 

경주표암(瓢巖)은 "박바위,밝은바위"의 의미입니다.세상을 밝게 하였다하여 표암이라고 부른 곳인데 B.C 69년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어 신라건국을 의결했으며 그후  B.C 57년 신라가 건국되었습니다.신라 건국의 산실이고 화백이라는 민주정치의 발상지로 성스러운 곳인데 이곳의 성스러움은 박바위(표암)와 소나무가 다한 느낌입니다. 

 

표암으로 오르면 표암유허비가 있습니다.

 

이곳 표암은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과 관련이 있는 장소로 경주이씨발상지입니다. 
광림대 석혈이라고 하여 파여진 석물이 비각 안에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탈해왕릉이 평화롭게 보입니다.

 

신문왕릉

신문왕의 할아버지 김춘추는 신라 태종 무열왕으로 신라 제29대 왕입니다.신문왕의 아버지인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으로 백제,고구려를 통합한 삼국통일을 한 실질적인 왕입니다.삼국통일을 한 업적이 있지만 그의 무덤은 봉분이 크고 12지상을 두른 화려한 능이 아닙니다.그의 무덤은 바로 동해의 대왕암으로 수중해릉입니다.백성의 노고가 거의 없는 무덤입니다.그래서 백제와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을겁니다.

 

문무왕의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본명 문희)였습니다.문명왕후는 신라통일의 3주역과 모두 연관된 여인이자 세사람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입니다.

무열왕이 왕이 되기 전 김춘추와 김유신은 김유신의 집에서 축국(현재의 축구와는 다른 룰이지만 발로 공을 다룬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하다가 김유신이 아마도 일부러 옷을 밟아 춘추의 옷의 솔기가 터지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옷을 수선하는 바느질 소임으로 방으로 들어간 문희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 바로 문무왕입니다. 

 

문무왕의 아들은 신문왕으로 감은사와 이견대를 세운 효성 지극한 왕입니다.문무왕은 문무(文武)를 갖춘 왕이고 그의 아버지 무열왕은 무(武)를 갖춘 왕이고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신라 31대 왕으로 문(文)을 갖추었습니다.

 

신문왕은 공신들의 막강한 힘을 무력화시키고 처가의 세력이 너무 막강해지는 것을 막았습니다.신문왕은 통일신라 수성기에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성왕릉(괘릉)

 

과거 괘릉이라고 불리웠던 원성왕릉 입구엔 서역인 무인상이 있습니다. 극락을 일반적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하는 것은 인도 사람들이 방위와 시간을 일치시키는 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동쪽으로 서서 앞쪽을 과거, 뒤쪽을 미래라 했습니다.따라서 극락은 내세에 왕생할 세계이며, 그것은 서방에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단편적으로 생각해도 해가 떨어지는 곳이 서쪽이고 서쪽은 생명의 반대편, 즉 죽음(극락)이 있다고 믿을 확률이 높죠.

실크로드로 인하여 실제로 서역으로 가보니 헤라클레스 같은 서방의 힘센 인물들이 무(武)를 담당하게 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보여집니다.금강역사상도 수문장의 역할이니 이곳 서역인 무인상과도 그 흐름은 비슷합니다.서방정토를 지키는 수문장의 역할이 서역인인 것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서방정토와 서역인, 논리적으로 이해되는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우락부락한 생김새도 비슷합니다.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의 모습을 아주 잘 갖춘 모습입니다.신라초기의 탈해왕릉과는 다르게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습니다.봉분 둘레는 12지신상으로 구성된 호석,난간석,문무인상,그리고 사자상등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구정동방형분(구정리방형문)

3단의 장대석,탱주 외면의 12지신상 등 통일신라시대의 방형분의 이 것 뿐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각의 방형은 고구려양식이기 때문입니다.무덤 속의 석문이 열려있어서 석실내부도 보입니다.이미 도굴된 상태라서 지금은 무덤 속을 직접 들여다볼수 있게 해놓았습니다.모서리에 세웠던 서역인과 사자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장항리사지: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1번지

 

다리는 부서졌고 계곡 건너 절터로 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습니다.아마도 힌남노 태풍 영향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쌍탑 1금당터만 보입니다.이 절의 이름도 알 수 없습니다.그래서 장항리라는 지명만 존재합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전체를 조망하고 난 후 연화좌대를 먼저 살펴봅니다. 사자조형이 먼저 보이는데 권투 자세에 익살스러운 모습이 강아지를 보듯 사랑스럽습니다.원래 이 위에 석조불 입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상당히 멋진 모습인데 도굴한다고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많이 부서진 것을 복원하여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있다고 합니다.

서탑은 복원되어 8세기 걸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5층석탑으로 나원리 5층석탑과 이곳 장항리사지 5층석탑이 대표적입니다.국보 제 236호입니다.

여기서도 울퉁불퉁 입체감이 돋보이는 금강역사상을 보게 됩니다.

이번 탐방으로 인해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채운 느낌입니다.다시 한번 복원에대해 생각하게 되고 서방정토와 서역인, 서역인과 금강역사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느낍니다.

복원에 있어서 설계도가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사진이나 그림만 남아 있어도 아주 좋은 조건에 해당합니다.고증이 제대로 안되면 "신라 스타일"은 만들기 쉬워도 제대로 된 복원인가하는 점은 의문이 남겠죠.

복원이 한계에 다다르면  북한의 정릉사,동명왕릉처럼 복원 보다는 "개건"이라는 형식도 있습니다만 복원이 안된채로 남겨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폐사지는 폐사지 그대로의 모습도 좋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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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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