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산청)인간 존중의 정신이 평등 개혁 세상으로 이어지고

 

- 언제:2022-10-08(토)~9(일) 
- 날씨: 흐리고 때때로 비

- 몇 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 진주-산청 (385km)

 

 

진주 묘엄사지-진주농민항쟁기념탑(일박)-형평운동기념탑-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소-산청 남명기념관-산천재-남명선생 묘소-세심정-덕천서원-산청 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 발상 기념비- 정취암

 

 

 

 

조선시대 산청은 진주영역이었습니다.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敬義)사상은 진주에서 발현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경敬은 마음이 삶의 중심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의義는 밖을 방정하게 하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남명 조식의 신명사도(神明舍圖)에서 남명은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하여 경敬은 안을 밝히는 것이고 의義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었습니다.진주의 백성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義"를 다하여 일본을 결단했습니다. 진주 백성들은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주晉州의 진晉은 "나아갈 진"입니다. "억누르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2개의 화살을 그릇에 꽂아 준 모양입니다.진주정신은 나아가고 일본군은 억눌렀습니다.조선시대 때는 경상도 최대도시였습니다.현재의 진주 영역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늘 제가 간 산청도 조선시대 때는 진주였습니다.사천시 축동면이 진주 소속이라서 예전엔 바다와 접하기도 했습니다.

 

진주는 진주대첩에서 알수 있듯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까지 모아서 전쟁을 치루어 약 3800명의 인원으로 일본군 3만명을 물리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이때는 정기룡,곽재우,최경희 등이 있었습니다.왜군의 호남지역 진출과 육로 보급차단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해로를 차단하여 호남을 지키고 일본 보급로를 차단했다면 김시민과 진주백성들이 육로를 차단하고 호남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순신장군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전공을 세웠다고 봅니다.1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 가는 데 필요한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것이었다면 2차 진주성 전투는 명나라와 협상을 위한 일본의 무력시위 보복전이었습니다.일본군의 경우 1차의 3만명의 3배인 92,972명을 2차 진주성 전투에 투입합니다.일본은 10만대군이었습니다.조선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6천명이었고,진주성에 피신한 민간인 24,000명이었는데 결국 일본군이 진주성의 군민을 모조리 학살하며 보복했습니다.진주성 내의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여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이 당시는 김시민은 이미 전사한 뒤라 없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던 초유사 김성일도 없었습니다. 진주목사는 서예원이었으나 크게 활약을 하지 못했고 최경희와 황진,김천일이 힘을 다해 싸웠으나 날씨도 따라주지 않아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사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전라도 사람들입니다.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에 와서 여기서 뚫리면 전라도가 큰일을 당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도 몸소 나서 주었던 것입니다.최경회는 전라도 능주,황진은 전라도 남원,김천일은 전라도 나주,우리가 잘 아는 논개는 전라도 장수 사람입니다.아직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을 운운한다면 진주로 가서 확인해보세요.현재 남은 진주성은 내성에 해당되고 임진왜란 당시는 외성이 있어서 현재보다는 거의 2~3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처음부터 수성과 포기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상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제대로 준비가 안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전쟁 전에 이미 일본군이 30만명이나 온다고 소문이 나서 진주성을 비우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서예원 빼고 다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지(死地)인 진주성으로 간 것으로 임진왜란 사상 최대의 혈전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2차 진주성 전투(1593년)는 일본의 앙갚음 보복전으로 성격이었습니다.이런 역사가 있는 진주로 진주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신분의 귀천 없이 모두가 힘을 합쳐 싸웠던 진주성 전투(1592년,1593년)는 향후 진주농민항쟁(1862), 동학농민혁명(1894년),형평운동(1923년)으로 이어지며 인간존중과 평등사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역사공부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이런 역사를 가진 진주에 대하여 존경을 표합니다.

 

 

 

 

▷진주 묘엄사지삼층석탑: 경남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447-1번지

현재는 폐사지 입니다. 원래는 탐방 할 계획이 없었습니다만 진주농민항쟁 기념탑으로 가던 중 안내판을 보게 되어 예정에 없었지만 홀린 듯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탑은 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2층의 받침돌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입니다.1층 몸돌의 한쪽면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공간이 있다는 의미로 문짝과 문고리 모양을 새겼습니다.

▷진주농민항쟁 기념탑: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349-4

학교다닐때 배웠던 진주민란입니다.조선시대 말기 조세제도가 문란해지고 수령과 아전의 비리와 토호의 수탈이 심해지자 주민들의 집단시위를 하게되었는데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 2월14일 덕산장 공격을 시작으로 진주목 전지역으로 확산되다가 2월23일 농민군이 해산함으로써 일단락 되었습니다. 농민군의 핵심세력은 농민, 그 중에서도 초군(樵軍)이었습니다.이 항쟁의 지도자는 양반 출신의 류계춘 등이었습니다.이 항쟁을 계기로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 항쟁의 밑바탕에는 사회체계를 바꾸려는 운동으로 이런 경험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어 일제시대 농민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기념탑이 있는 위치는 당시 수곡장(무실장터)이 서던 곳입니다.

기념탑 주위로 이름이 적혀있는데 사노맹돌,사노귀대 등 사노(私奴:전통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 개인에게 상속되면서 사역한 남자 노예)들도 가담한 것으로 나오므로 농민운동이지만 지도자는 양반이라는 점에서 진주의 민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늘 농부"라는 시를 보니  "농사-하늘을 섬기는 일-하늘은 사람-인내천"의 플롯은 동학혁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념탑은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박)밤에 빗소리를 들으며 "난중일기"를 중간 쯤 읽은 후 일박합니다.

 

▷형평운동기념탑:경남 진주시 칠암동 201-5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

형평운동은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과 민족적인 해방투쟁 2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제로는 그대로 존속되어 오다가 1923년부터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납니다.

비(卑)하고 빈(貧)하고 천(賤)하고 굴(屈)한 사람이 없는 평등사회를 지향 한 것입니다.

이렇게 평등세상을 향한 흐름은 딱 한번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현 대통령은 연설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를 외치지만 자유만큼이나 평등과 박애가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의 한단면만 놓고 보면 잘 못된 것 같아도 큰 흐름은 계속하여 진일보하고 있다고 봅니다. 

 

▷형평운동가 백촌 강상호 묘소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 758-2

강상호는 진주의 부호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그런데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을 합니다.이것이 진주의 모습이며 성정입니다. 

 

 

입구 좌측에 보이는 불망비는 전주이씨 시덕불망비로 여기서 전주이씨는 백촌 강상호 선생의 부친인 강제순의 처로 나오니 백촌 선생의 모친입니다.1917년 강상호의 어머니 이씨는 진주가 물바다가 되자 열두곡간 문을 열어 사람들을 구제하여 주민들이 후에 "베푼 은혜 잊지 말자"라는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남명기념관: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1

진주에서 산청으로 넘어왔습니다.그러나 예전엔 산청도 진주 영역이었습니다.특히 이곳 시천면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만 동학의 시천주와는 별개입니다.동학의 시천주(侍天主)는 하늘님을 모신다는 의미입니다만 이곳 시천면의 시천(矢川)은 화살 시,내 천으로 계곡이 깊고 물이 화살처럼 빨리 달려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리산의 계곡다운 이름입니다.

 

 

남명기념관 입구 남명기념관 출입문인 성성문(惺惺門)의 오른쪽 문을 지나 우선 남명 선생의 동상 옆에 있는 상소문을 찬찬히 읽어봅니다.

성리학자들의 사단칠정론에 대해 질타합니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니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빗질 걸레질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들이 사단칠정에 대해 논하다고 한 것입니다.남명 선생님은 뜨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재주가 압권입니다.또한 실학사상과도 통하는 현실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시사에 관심을 거두지 않았던 그는 현실정치에 많은 비판을 가했는데, 대표적인 글이 55세 때 명종에게 올린 「단성소」입니다.조식은 상소문에서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孤嗣)",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공개 비판하였는데, 당시 서슬시퍼런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한 것을 넘어 "죽여달라" 는 말을 한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인의 기질이 있는 남성적인 단면을 보게 됩니다.그의 글도 요점정리가 명확한 스타일입니다.

 

기념관 내로 들어가자 바로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보입니다.신명은 "천지신명"의 준말이니 쉽게 말하면 "하느님"입니다.그 "하느님이 사는 집"을 신명사(神明舍)로 보시면 됩니다.즉,우리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

 

남명의 좌우명

 

庸信庸謹 (용신용근) 언행을 항상 신의있게하고 삼가며
閑邪存誠 (한사존성) 사악함을 막고 정성스런마음을 가져라
岳立淵中 (악립연중) 산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으면
燁燁春榮 (엽엽춘영)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처음에 "늑대가 나타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 "사건"에 주목합니다.그러나 여러번 거짓을 말하면 사람들은 "사건" 보다는 그 사람이 가진 "신뢰"에 주목합니다. 그 신뢰는 언행의 결과물입니다.신뢰가 없다면 불신이 됩니다.

현재 여러번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위정자는 불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신뢰를 잃어버려 수십번 외친 자유도 진의를 의심받고 있습니다.고등학생의 만화그림으로 촉발된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제자들은 의義를 위해 결단합니다.남명의 주요 제자들을 보면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는 남명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입니다. 송암 김면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을 총괄하였는데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당시 고군분투 하던 중 역병에 걸려 운명직전에 "다만 나라 있는 줄만 알았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조종도는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안의를 공격하자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죽을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고 하며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으로 들어가 전사합니다.그 외 내암 정인홍,이노, 전치원, 하락, 박성무, 이대기 등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50여 명이 의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남명의 제자 중 기축옥사로 죽임을 당한 최영경은 덕천서원에 배향되었고,심산 김창숙의 13대조인 김우옹도 있습니다.  

김해 산해정에서 가까운 구천서원은 죽암 허경윤(竹巖 許景胤·1572~1646)의 위패가 봉안된 곳인데 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경의(敬義)’라고 적힌 서원 복원기념비가 있습니다.허경윤도 남명의 제자입니다.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도굴되고 훼손되었던 수로왕릉과 남명 선생의 산해정이 있는 신산서원(대동면 주동리)을 복구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산천재: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 내에 남명선생의 신명사도 요점이 잘 정리되어 걸려 있습니다. 

경(敬)에서 주일무적(主一無適)은 "단 '하나(一)'를 붙잡을 뿐(主), 다른 곳으로 가지(適) 마라(無)"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집중"을 뜻합니다.경(敬)하면 먼저 공경,존경을 떠 올리지만 원래의 뜻은 집중입니다.정제엄숙(整齊嚴肅)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여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을 엄숙하게 가진다"라는 뜻입니다.常惺惺法(상성성법)은 주일무적이 '집중'이고, 정제엄숙이 '자세'라면, 여기 상성성법은 '각성'의 방법입니다.불교의 선(禪)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의(義)에서 사생취의捨生取義는 목숨을 버리고 의를 따른다는 뜻이고,견리사의見利思義는 이익을 접하면 먼저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남명선생은 공자,주렴계(=주돈이),정명도,주자 4성현을 모범으로 삼고자 했습니다.남명은 이들의 초상화를 병풍에 그려 감실에 모셔두고 아침마다 우러러 절하였다고 합니다.정명도는 왕안석의 신법과 맞지 않아 관직을 떠난 인물인데 남명선생이 좋아할만합니다.

 

▷남명선생 묘소: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72

 

‘마음을 다스려 깨달은 것을 실천에 옮긴다(內明自敬 外斷者義)’는 의미로 항상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이라는 작은 칼을 지니며 자신을 채찍질한 남명의 묘소입니다.봉분을 제외하고 주변은 돌로 적석하여 무인적인 호걸의 기운이 느껴지는 묘소입니다.

바른 선비 사랑하는 사람들 태도는(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
범 가죽을 좋아함과 정말 똑같다(愛虎皮相似⸱애호피상사).
살아서는 죽이려고 대들다가도(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죽은 뒤에 아름답다 모두들 칭송하네(死後皆稱美⸱사후개칭미)

 

남명선생은 죽는 그날까지 곧고 바른 행동을 한다면 그 정신은 죽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분이었습니다.

 

 

▷세심정,덕천서원: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137


남명조식선생의 시비가 보입니다.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洗心亭)은 덕천서원 앞에 있습니다.


냇물에 목욕하며 (浴川·욕천)



온몸에 사십 년간 쌓여온 때를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깊고 맑은 시냇물에 모조리 씻네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혹시 때가 내장에서 생긴다면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씻어버리리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신뢰의 언행으로 진실하지 못하다면 배를 가르겠다는 남명의 시입니다.

거짓으로 지록위마(指鹿爲馬), 적반하장(賊反荷杖)을 하고 있는 현 시국과 완전히 대비되는 정신이 번쩍드는 시 입니다.


덕천서원의 강당은 남명조식선생의 정신을 대변하는 경의(경의당)가 보입니다.  

 

거짓없이 속살까지 보여주는 배롱나무가 멋집니다.

▷동학농민혁명영남지역발상기념비: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587-13

동학농민혁명 폐정개혁 12개조 중에서 노비문서 소각이 보이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앤다는 것은 형평운동과 닿아있습니다.

진주에서 남명을 보았습니다.
진주는 남명 정신 발현의 진주(眞珠)로 보입니다.진주 정신의 여의주는 남명 사상으로 느껴집니다.

 

▷정취암(淨趣庵):경남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로 675-87

둔철산로를 따라 대성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바라보는 저 멀리 풍광들이 너무 좋습니다.산들이 물결처럼 중첩되어 달려오고 낮은 곳의 들녘은 벼가 익어갑니다.

 

소금강이라고 할만큼 바위들의 모습이나 절벽에 붙은 사찰의 당우들이 절묘합니다.의상대사께서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암을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곳 정취암에는 원통보전이 있습니다.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입니다.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권능이 모든 곳에 두루 통한다고 하여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합니다. 관음전과 보타전도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입니다.관세음보살은 자유자재로 본다고 하여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고도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현생의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존재인데, 사후세계에서는 아미타불을 협시하며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살입니다. 그래서 모든 보살 중 제일 전지전능하면서 또한 인기가 있는 보살입니다.

세심대 앞에 서면 저절로 마음을 씻어지는 느낌입니다.

 

바위 끝에 서서 사찰 아래로 보이는 하계를 내려다보는 시원함과 함께 오는 고요는 적막강산 속세를 벗어난 느낌입니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의義를 실천한 모든분들께 영원한 안식을... rest in peace



진주의 어른 김장하 선생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생불' '보살' '의인' '진정한 어른' '이 시대의 예수' '든든한 뒷배' '시민운동의 비빌 언덕' '호의(好義)와 경의(敬義)의 표본' '남명 조식 선생 같은 분' '모든 것을 품어주는 호수' 같은 표현이 나오죠.이것이 우리는 하나라는 고조선사상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인내천…사람이 수양을 해서 닦으면 곧 하늘이다.

 

동학혁명은 봉건제 타파를 위해 일어나서 외세 일본을 불러들인 민비때문에 무려 20만에 30만명이 죽었지만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습니다.동학혁명이전에 진주농민운동이 있었다고 보면….진주는 참 대단한 곳이죠.진주는 대한민국의 진주 같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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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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