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북관대첩의 정문부 장군의 별서인 용계정

 

- 언제:2022-07-17(일)
- 날씨:대체로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은 무더위

- 몇명:홀로

 

▷답사일정( 風輪 ):왕복 310여km

 

부산- 용계정-덕동마을-입암서원 -부산

 

을사늑약 100년 뒤인 2005년 11월에 북관대첩비가 공식 제막식이 이루어졌고 2006년 3월에 함경도 길주의 제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을 보며 정문부 장군에 대한 관심을 그때 공부하게 되었습니다.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때 함경도를 지켜 낸 분 입니다.그 내용이 고스란히 씌여있는 것이 북관대첩비입니다.

원래 함경도는 이성계와 관련이 깊은 곳이었지만 이후 이징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을 거치며 반란의 땅이 된 곳입니다.그 곳에 임진왜란 당시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임해군과 순화군이 가게 되는데 임해군은 가장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그 지역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희롱하며 돼지를 빼앗는 짓은 물론 강도,강간,살인을 자행하여 함경도의 인심을 잃게 됩니다.가토 키요마사(16세기 초 연산군 시기 김감불과 김검동이 금속의 녹는 점을 이용해 은을 추출하는 방식인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을 이용한 단천광산을 접수 할 목적으로 함경도로 진출했고 이후 연은분리법을 일본으로 유출시킨 사람은 "유서종"이라는 종4품 판관이었다고 함)가 함경도를 쳐들어오자 국경인과 그의 숙부인 국세필은 일본에게 항복한 순왜인이 됩니다.순왜(順倭)는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협력한 조선인을 말합니다.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가토 키요마사에게 넘기게 됩니다.임해군은 눈치도 없었던 인물로 보입니다. 

일본이 함경도를 지배하면서 세금을 50%를 물리게 됩니다.조선에서는 10%였는데 일본은 50%를 물리게 되니 함경도 백성들은 불만이 극에 달하고 드디어 우리의 정문부가 9월에 세상에 나타납니다.북관대첩을 이룬 전투를 살펴보면 기마병의 기습을 적절히 이용하고 매복한 후 잔당을 쓸어버리고 계곡으로 몰아 넣은 후 한겨울의 동장군을 이용하여 동사시켜 죽입니다.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가토의 군대는 따뜻한 큐우슈우 지역에서 훈도시만 입고 온 왜군이었지만 함경도의 11월은 한겨울이었고 정문부는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덕분입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22,000병력 중 8,000명이 3,000명 의병을 이끈 정문부에 의해 도륙당한 것으로 나옵니다.북관대첩은 엄청난 전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과는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에 의해 축소되고 나쁘게 왜곡되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게됩니다.그러나 역사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이후 100년 뒤인 숙종 때 정문부의 활약이 재평가 받게 되어 함경도민들이 북관대첩비를 길주에 세웠던 것입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소장 이케다 쇼스케(池田正介)가 북관대첩비를 발견하여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후 반환될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하였는데 이것을 조소앙이 국내에 알리게 되고 이후 2005년 남한의 이해찬과 북조선의 김영남의 협력으로 돌려 받게 되어 원래 제자리로 찾아가는 본지환처(本地還處) 되었습니다.

 

선조는 1등 선무공신으로 이순신,권율,원균으로 정했지만 정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습니다.북관대첩 당시 정문부의 나이는 28세였고 문과 급제자이지만 북평사라는 무관을 했습니다.함경도 전체를 구한 북평사는 정6품으로 품계가 낮았지만 가토 키요마사에게 빼앗긴 함경도를 탈환했는데 진주대첩,행주대첩은 성을 지키는 수성전이지만 함경도에서의 북관대첩은 일개의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야전이었습니다.이런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선조는 정문부에게 함경도 영흥,길주 목사를 하게했으니 선조의 용병술은 최악이었습니다. 

 

역사를 재평가하며 현재의 시점에서 1등 선무공신을 뽑는다면 당연 맨 먼저 이순신장군이지만 두번째는 정문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세번째는 권율,김시민,황진 중 한분이 해당될 것이라는 내용에 공감합니다.

2022-07-17

 

▷용계정과 덕동 숲: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낮의 강한 햇볕을 피하여 7월17일 0시에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도착 후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용계정을 둘러봅니다.빗물이 든 나무에 햇살이 간헐적으로 들어옵니다.

용계정의 기와 건물에 드리운 배롱나무가 잘 어울립니다.

 

불상의 흔적이 보여서 세덕사는 폐사지였는가 했는데 세덕사는 사당이었습니다. 

 찬성공 이번(李蕃)은 세덕사 앞에 세덕사를 위한 루(樓)를 ‘연연루(淵淵樓)’라 편액 하였는데, ‘연연淵淵’이라는 것은 가학(家學)의 연원이 여기에 있음을 말한 것으로 나옵니다.여강 이씨의 공부 장소로 보입니다.


연연루기(淵淵樓記)

 

水一也 流爲川滀爲淵 以其下施爲功則淵固不及於川 不有其滀 流何以長 川必資於淵 淵之功爲尢大

 

물은 언제나 시종일관 변함없는 물이지만 흘러가면서 시내가 되고 한 곳에 모이면 연못이 되나 그 물이 사람에게 베푸는 공적의 연못이 참으로 시내에 미치지 못한다.그러나 이 곳 저 곳에서 물길이 모여들지 않는다면 시냇물의 흐름이 어찌 멀리까지 길게 흐르겠는가. 그렇지만 시냇물은 반드시 연못물이 흘러내리는 도움을 받아 흘러가는 것이니 연못이 시냇물 흐르는데 미친 공적이 더욱 큰 것이리라.

(세덕사지)

서원철폐와 더불어 세덕사는 터만 남았고 담장을 둘러쳐 용계정은 살아남았습니다.

이곳은 오밀조밀하게 밀도 높은 아름다움을 제공합니다.계곡과 바위와 배롱나무,소나무,향나무, 은행나무 등이 잘어우러져 있습니다.  

정문부의 시집으로 농포집이 있는데 8살때 지은 시가 남아 있습니다.

 

 

초승달 初月

 

그 누가 곤산의 옥을 쪼아다(誰斲崑山玉 수착곤산옥 )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던가(磨成織女梳 마성직녀소)

견우와 이별한 그날 이후로(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시름에 겨워 푸른 하늘에 던져버렸네(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그는 문무에 능한 문무겸전의 대표적인 천재입니다.

(필사)

섬솔밭의 소나무는 경주 삼릉숲을 연상케 하는 축소판으로 보입니다.

 

배롱나무 숲이 터널을 이루어 연못가 산책의 운치를 돋웁니다.이곳 배롱나무는 눈부십니다.

한국적인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이 곳 덕동마을의 숲은 2006년 북관대첩비가 길주에 세워지던 그 해에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용계정 입구 바로 옆에 정문부와 관련이 깊은 "애은당 고택"이 있습니다.임진왜란 당시 정문부의 가족들의 피난처로 사용한 곳입니다.전쟁 이후 정문부는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게되는데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 사위인 사우당 이강에게 주었는데 현 소유주의 6대조가 사들여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약간 걸어서 산쪽으로 가면 여연당 고택,사우정 고택,덕계서당이 모여 있습니다.

이곳을 둘러보는데 마을주민 말씀이 "쪼맨한 동네라 자전거 탈것도 없는디"라고 말합니다.

 

▷입암서원: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먼저 눈에 들어 온것은 한눈에 보아도 입암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2개의 바위였습니다.가사천에 서있는데 입암 우측에 누각이 보이지만 별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에 알아보니 일제당(日蹄堂)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1907년 10월 7일 항일의병으로 정환직과 정용기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전투 중 정용기 의병장과 1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의병부대가 큰 타격을 입었던 비극의 현장입니다.아무래도 일본군 무기와 차이가 큰 이유가 있겠지만 의병은 불리한 여건속에서도 의를 위해 용기를 낸 분들이라 더욱 기억해야겠지요.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참전한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 박인로 선생이 이곳에 입암가 29수와 입암별곡의 시가를 남겼다고 합니다.

입암가(立巖歌)-박인로

 

“無情(무정)이 서ᄂᆞᆫ바회 有情(유정)ᄒᆞ야 보니ᄂᆞᆫ다
最靈(최령)ᄒᆞᆫ 吾人(오인)도 直立不倚(직립불의) 어렵거ᄂᆞᆯ
만고애 곳게선 저얼구리 고칠적이 업ᄂᆞ다

(현대어 풀이)
아무런 감각 없이 서 있는 저 바위가 마치 무슨 정이라도 있어 보인다.
가장 영특한 존재라는 우리 사람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로 서기는 어렵거늘
오랜 세월 동안 꼿꼿하게 선 그 모양이 변할 때가 없다.


또한 박인로의 조홍시가 생각나죠.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ㅣ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난
품어 가 반기리 업슬싀 글로 설워하나이다.

(현대어 풀이)  
소반 위에 놓인 홍시가 매우 곱게도 보인다. 
유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몸에 품고 돌아갈 만도 하다마는, 
(품속에) 품어 가도 반가워해 주실 분이 없으므로 그것으로 인하여 서러워합니다.

 

 

입암서원은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문이 잠겨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여기도 배롱나무가 한창입니다.


이곳 가사천변에서 쉬어갑니다.

 


북관대첩비로 알게 된 정문부의 별서인 용계정이 살아남은 것은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북관대첩비는 본지환처로 제 자리를 찾았으니 정문부에 대한 재평가도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정문부는 나이 60세에 요즘으로 치면 뚜렷한 혐의 없이 고문사를 당해 억울한 죽음을 맞은 비운의 명장이었습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초희왕 시로 대변되는 문(文)은 그를 죽이는 구실이 되었고 단지 28세 였던 그의 뛰어난 무(武)공은 질시의 대상이 되어 윤탁연 관찰사의 미움으로 잊혀진 영웅이 되었습니다.한국의 정신문화인 옳음을 상징하는 의병이었습니다.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구국의 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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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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