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겨울의 찬바람 속에서도 빛나는 유적과 풍광

-.일시 : 2007.12.30 08:00~12.31:17:00
-.날 씨 :대체로 흐림,강추위,눈
-.몇명:가족4명

-.어떻게:자가용 이용
-.일정:
12.30 청간정-통일전망대-건봉사-화진포(화진포의성-김일성별장,이기붕별장,이승만별장)
12.31 왕곡마을-송지호-고성 어명기가옥
-.테마:문화답사여행,가족여행


부산에서 강원도의 설악산 북쪽은 차를 타고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장소이다.보통 설악산까지는 산행을 위해서 자주 갔었지만 문화유산답사 차원에서 가는 것은 큰 맘을 먹지 않으면 힘들었다.2007년 증시 납회 이후 여가를 이용하여 그동안 보고 싶었던 곳을 가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선 우리나라 송광사,해인사,통도사와 함께 4대사찰 중 하나였던 건봉사와 실력자들의 휴양별장이 있었던 화진포는 꼭 돌아 볼 계획을 갖고 나머지는 유동적으로 현지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자가 승용차를 이용하여 30일 아침에 느긋하게 출발하였다.

도로사정이 좋아서 생각보다 빨리 현지에 도착했지만 워낙 날씨가 추워서 관광은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는데 만족해야만 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청간정에서 바라보는 봉포항 앞바다는 한폭의 그림이다.



청간정은 강원유형문화재 제32호로 관동8경(關東八景)의 하나이다. 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작은 구릉 위에 있으며,
이 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의 풍경이 일품이다. 특히 아침의 해돋이광경과 낙조(落照)의 정취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정자의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미상(未詳)이나 1520년(중종 15)에 간성군수(杆城郡守) 최청(崔淸)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불타 없어진 것을 40여 년 후인 1930년경에 지방민들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55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명으로 보수하였고(지금의 현판은 그의 친필),
1981년 4월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의 지시로 해체복원(解體復元)하였다.



멀리 봉포항이 내려다 보이고 바다로 돌출된 반도를 따라 지어진 건물들의 모습이 예상 밖의 이국적인 풍광으로 다가왔다.
날씨만 춥지 않다면 여기서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보내어도 좋으련만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자에서 서성거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을 에는 고통이었기 때문에 오래 있을수가 없었다.

 


 

냥 북한으로 갈 수는 없으나 길이라도 생겨 희망을 갖게하는 고성 통일전망대

고성 통일전망대는 개인적으로 몇 번 다녀간 바가 있지만 가족들을 위하여 다시 한번 들른 곳이다.여전히 통일전망대에 가기 위해서는 10㎞ 남쪽에 있는
통일안보공원을 거쳐야 하며,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집체교육 만으로도 여기가 최전방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과거와 다른점은 북한 방향으로 철길과 도로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황사가 약간 날려도 구선봉과 해금강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데
과거 처음 저 곳을 바라볼때 보다는 그 절절함이 덜하였다.통일전망대 쇼핑점에서 북한산 증류소주인 백두산 들쭉술을 한병 샀다.32,000원으로
몇 년전 보다는 값이 조금 내렸다.

 

 

 

 


반야의 칼날보다 불성의 봄바람이느껴지는금강산 건봉사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며 여기로 가려면 검문소를 두군데 지나야 할 정도로 위치적으로
보면 최전방이다.야트막한 기와담으로 둘러친 건봉사에는 50여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백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흩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고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현위치에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건봉사는 전쟁 전까지만 해도 건물의 수효가 766칸에 이르렀고,조선중기 전성기때에는 무려 3,183칸의 거찰이었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우고 있 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 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 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878년 건봉산에 큰불이 나면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썼다.

 

 

 

 

 

 

 

 

 

 

 

金剛甲祥地(금강갑발상지) : 금강의 벼이삭을 벤 상서로운발상지로 하나되는 마음의 합일(合一)의 근본은 금강(金剛)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 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라 할 수도 있겠다. 돌 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앞에도 또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 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 한 10단계 수행을 말한다. 건봉사 십바라밀석주(피안 즉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는 6바라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과 4바라밀<방편,원,력,지>을 말한다.

반월(지계:계율을 지키되 초생반월이 어둠을 밝히고 더욱 자라게 하는것과 같이 해야한다는뜻)

가위(정진:수행하되 가위로 물건을 자르듯이 나아감만 있을뿐 물러남이 없음을 묘사...)

금강저(지혜:지혜로써 피안에 도달,금강저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과 같다는 뜻...)

전후쌍정(원:누구라도 귀의하여 기원하면 피안에 이를수 있음을 나타내는 우물을...)

성중원월(지:삼계와 삼세를 구비하여 반야의 지혜를 올바로 성취하는것을 나타내는것..)

 



대웅전 안으로는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정토와 아미타불을 모시는지 주련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계수서방안락찰 (稽首西方安樂刹 ) : 서방 극락 세계로

접인중생대도사 (接引衆生大導師) : 중생을 이끄시는 극락도사 아미타 부처님

아금발원원왕생 (我今發願願往生 ) : 이제 제가 머리 숙여 왕생극락을 원하오니

유원자비애섭수(唯願慈悲哀攝受) : 자비로써 연민하게 여기시어 거두어 주옵소서


'나무 아미타불'을 염하는 사람들의 궁극의 목표는 '왕생극락'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염불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한 끝에 마침내 서방 극락세계로 올라갔다는 계집종의 이야기가 『삼국유사』 감통편 '욱면비 염불서승'
조에 전해지고 있다.

계집종 욱면(郁面)의 이야기는 통일신라시대에 아미타신앙이 널리 펴졌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가 계집종 신분으로 염불을 하여 극락을 갔다는'사실'은 아미타신앙이 신라 사회의 상층부 뿐 아니라
하층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믿어졌다는 증거로 종종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또 여성사의 관점에서
욱면은 계집종이라는 신분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염불하여 결국 부처가 되었다.

축생계에서 인간계로, 인간계에서 다시 신(神)으로, 욱면은 그야말로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면서 한 단계 위로의 상승을 되풀이하여
결국 완전한 존재의 변화를 완성한 여성이다.(길태숙 외, 『삼국유사와 여성』, 76쪽)라고 해석되기도 했다.

강원도 고성군 소재 건봉사에는 경덕왕 때의 첫 결사에 이어 19세기 들어서 세 차레, 20세기에 두 차례 1만일 아미타염불결사가 이루어지면서
옛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찰에 없는 '만일염불원'이라는 전각이 따로 있다.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

 

산신각 자리가 가장 명당자리로 보인다.

 

 

이곳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능파교라 하는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 그나마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 과 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건봉사 입구 부도밭 가장 앞쪽에 있는 적멸보궁 금강산 건봉사 글자가 눈에 띄는데 실제 적멸보궁은 사찰 안쪽에 위치해있다.

 

명성이 자자한 화진포를 예전에 듣고 이제사 찾아본다.

 

동해안 최북단 시범해수욕장으로써 기암괴석이 신비의 극치를 이루고 광활한 호수 주변에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자연 풍광이 수려한 해변으로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별장,이승만 별장 등이 있다.



화진포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세찬 겨울바람 너머로 일몰직전이다.먼저 김일성 별장으로 알려진 화진포의 성으로 오른다.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화진포해수욕장 방향을 바라보니 멀리 최근 개관한 해양박물관이 보인다.

조선말 선교사들의 휴양소,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었다가 그 후김일성 별장으로 알려진.... 요즘은 화진포의 성이라 불린다.

화진포의 성은 석조 건물로 지어져 있으며 내부는 안보 역사 박물관 형태로 전시되고 있으며, 근처에 있는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은
그후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기거했다고 한다.

 

앞은 화진포의 아름다운 바닷경치와 뒤로는 아름다운호수가 있기에역시 실세 권세가들은 명당을놔두지 않은 모양이다.



1948년 8월 김일성의 처와 김정일 형제가 이용하였던적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한다. 계단에서 어린 김정일이가 찍은 사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 실내는 반공전시관으로 되어있는데 거의 장사속 분위기로 볼 것이 없다.다만 옥상에서 화진포해수욕장을
바라보면 그 풍광이 실로 장관이다.내륙쪽은 화진포가 보인다.김일성 별장,이기붕 별장,이승만 별장 세군데 별장을 돌아보노라니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남한과 북한이 바뀌면서 그 주인이 바뀌는 별장의 신세와 독재정권에서 안주하던 1인자, 2인자...

 

망명, 가족동반 자살...이런 우울한 기억들이 뒤따른다.

 

 

 

 

 

화진포 금구도가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는데....


 

광개토대왕 무덤이 화진포에 있다고 하여 눈길을 끈다.고성군민들이 “거북섬에 안장” 했다는 미확인 연표에 들썩이고 있는데
‘화진포 앞바다에 있는 금구도(金龜島·일명 거북섬)가 광개토대왕릉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강원도 고성군에는 요즘 이같은 이야기가 파다하다.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이야기는 지역 문화 연구모임인 ‘고성문화포럼’이 고구려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놓은 조선닷컴(www.chosun. com)의 문화란 ‘아 고구려’의 ‘연대기(고구려연표)’에 누군가가 올려놓은 광개토대왕과
화진포 금구도가 거론된 걸 찾아내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연대기에는 서기 394년 광개토대왕 3년에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의 수릉 축성을 시작했으며 409년(광개토왕 18년)에는 광개토대왕이
화진포호 거북섬(왕의 수릉) 공사현장을 둘러본 것으로 기록돼있다. 또 이어 414년(장수왕 2년) 9월29일에는 광개토대왕 시신을 화진포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연대기는 출처가 확실하지 않아 아직도 규명돼야 할 내용은 적지 않다.
이 포럼의 이선국 회장은 “금구도가 성지라는 기록이 역사자료에 있는 데다 고구려 연구가 오종철씨의 ‘다시 찾은 고구려 정사’에도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일 가능성에 대해 언급돼 있다”면서 이 주장의 근거를 설명했다.
금구도에는 축성연대와 사용목적을 알 수 없는 길이 60m, 높이 170∼230m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으며 건축물의 주초로 보이는 돌,
그리고 기와조각과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남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북방식 전통가옥, 고성의 왕곡마을

 

송지호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31일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왕곡마을이다.왕곡마을은 2000년 1월 7일 중요민속자료 235호로 지정되었다.
크기 18만 2112.7㎡인 이 마을은 죽왕면의 송지호 뒤편, 다섯 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로 100년 가까이 된 기와집 20여 채와
초가집 30여 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1988년 전국 최초로 전통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은 ㄱ자형 구조로 안방과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한 건물 안에 나란히 배치하고,
부엌에 마구간을 덧붙여 겨울이 춥고 긴 산간지방에서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했다고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송지호

전설에 의하면 약 1,500년 전에는 이 송지호 호수가 정거재()라는 구두쇠 영감의 문전옥답()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므로 거절하자, 쇠절구[
]를 논 한가운데에 던지고 사라졌다.
그 뒤로 쇠절구에서 물이 솟아나 송지호가 되었다고 한다.



백조(천연기념물 201)의 도래지이기도 하다는데 막상 당일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잠시 둘러보는 사이 찬 바람에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얼음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나름 장관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설악산을 볼 수 있는 고성 어명기 가옥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삼포리 어씨() 집성촌에 있는 한옥식 전통가옥으로 1500년 경에 건립되었고,
1750년 경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53년 재건하였다. 어명기의 증조부 어용수()가 1860년 경에 구입하여 대대로 전해왔으며
2000년 현재 후손 어용선이 소유, 관리한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장대석의 바른층쌓기 높은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ㅁ자집 형태의 민도리집이다.
본채 외에 디딜방앗간, 행랑채, 헛간, 화장실이 있으며, 디딜방아의 마모 정도로 보아 약 250년 이상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영북지방 고유의 옛부유층 가옥 구조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곳은 무엇보다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6·25전쟁 때는 한국군 제1군단 사령부 병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집 앞은 눈을 머리에 인 설악산이 그림처럼 펼쳐져있고,뒤는 약간의 둔덕인데 멋진 금강송이 심어져 있어 운치를 더한다.

 

 

다시 부산으로

도로가 좋아져서 쉽게 다녀올 수는 있지만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 길을 다녀왔다.부산에 돌아오니 12월 31일인데
정말 2007년 정해년의 마지막 태양이 위태롭게 걸려있다.막상 떠나면 집 생각에 빨리 돌아오려고 하면서 그 먼길을
가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고자한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연말회송(年末悔頌)

정재영(小石)


바퀴는
회전만 하고 있어서
제자리에
있는가 했는데

수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고자 하는 곳까지
언제 움직여 놓여져 있었다

세끼 밥만 먹고 지내며
하루 하루
시간만 보낸 줄 알았는데

돌아갈 길
저리도 까마득한 곳
멀리도 와 있다

떠나서
가야할 길도
보이지 않고 아득한데
새것도 헌것도
찢어낼 수 없는

모두가 이어진 길 위의
간이역일 뿐이다


━━━━━━━━━━━━━━━━━━━━━━━━━━━━━━━━━


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
,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