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라보다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당시 연개소문과 김유신을 보면 연개소문이 고구려 패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이고 김유신은 군사와 정치 모든면에서 탁월했습니다.다만 일제 강점기 시절 단재 신채호는 자주성 측면에서 김유신을 깍아내리고 연개소문을 추앙하는 방향으로 평가합니다만 전반적으로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통한 인재의 학살로 고구려가 망했다고 보면 오히려 연개소문과 고구려가 망한 것이 당연해보입니다.삼국사기 열전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권이 김유신 열전입니다.즉,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는 김유신을 아주 높게 평가했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외세를 불러들인 신라를 깍아 내립니다.그래서 다양한 시각을 통해서 고구려의 패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가장 약한 나라에 속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결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했는데 쿠데타는 정당성을 잃기 때문에 통치 측면에서 강경일변도로 향할 수 밖에 없고 결국 그것이 민심을 이반했고 자중지란으로 고구려가 망한 것입니다. 

 


 

1)연개소문: 영웅과 독재자 사이의 재조명 및 고구려 멸망의 구조적 분석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의 통치가 고구려의 운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민족적 영웅'과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잔인한 독재자'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그는 642년 유혈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고구려의 군사와 정치를 독점했다. 군사적으로는 안시성 전투를 포함한 당태종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으나, 외교적으로는 지나친 강경 일변도 정책을 고수하여 신라와 당의 연합을 초래하고 고구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특히 연개소문의 권력 장악 방식이 지닌 '태생적 한계'는 그가 죽은 뒤 후계자들(남생, 남건, 남산) 사이의 내분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700년 역사의 고구려가 허망하게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본 문서는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을 통해 정당성 없는 권력이 국가의 외교적 유연성을 어떻게 저해하며, 종국에는 국가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지는지를 심도 있게 고찰한다.

 

 

1. 인물 개요 및 신분적 배경

 

1.1 성씨와 이름에 관한 고증

 

• 성씨의 변천: 본래 성은 연(淵)씨이나, 당나라 역사서(신당서, 구당서)에는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자와 겹치는 것을 피하는 '피휘(避諱)' 관습에 따른 것으로, 고구려 멸망 후 당으로 건너간 후손들의 묘지명에도 천씨로 기재되어 있다.

 

• 이름의 이칭: 삼국사기에는 '개소문'으로, 일본 서기에는 '이리 가스미(伊梨 柯須彌)'로 기록되어 있다. '개소문'은 당시 고대 발음을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1.2 가문의 배경과 권력 기반

 

• 신귀족 가문: 연개소문의 가문은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두각을 나타낸 '신귀족' 세력에 속한다.

 

• 기술적 우위: 증조부 때부터 군권을 장악했으며, 가문 대대로 쇠(철)와 활을 잘 다루는 무기 제조 기술을 보유했다. 이는 고구려 군사력의 핵심인 철기와 결합하여 강력한 권력 기반이 되었다.

 

• 직위의 세습: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고구려 최고 관직인 '대대로' 또는 '막리지'를 역임하며 권력을 세습해 온 빵빵한 집안 출신이다.

 

 

2. 권력 장악 과정: 642년 유혈 정변

2.1 정변의 배경

 

• 온건파와의 갈등: 영류왕과 온건파 귀족들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고 실리를 취하려는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주장한 반면,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군부 강경파는 당에 맞서는 '남수서진(南守西進)'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 제거 위기: 연개소문의 성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이 그의 직위 계승을 반대했으며, 영류왕은 그를 변방(천리장성 공사 감독)으로 보내려 하거나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2 정변의 발발과 잔혹성

 

• 유혈 숙청: 암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연개소문은 군대 사열식을 구실로 귀족 100여 명(일본 서기 기록상 180여 명)을 소집하여 몰살했다.

 

• 영류왕 시해: 궁궐로 진격하여 영류왕을 살해한 뒤 시신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 도랑에 버리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는 공포 정치의 시작이었다.

 

• 대막리지 등극: 영류왕의 조카 '장(보장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종신직인 '대막리지'에 올라 군권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3. 군사적 역량과 대당 전쟁

3.1 안시성 전투의 승리 (645년)

 

• 당태종의 침공: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당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장기전에 돌입하며 고구려가 승리했다.

 

• 전략적 성과: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체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당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겨울 추위를 이용해 회군을 유도했다.

 

• 이례적 승리: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전성기의 당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연개소문의 군사적 위상은 정점에 달했다.

 

3.2 전술 변화와 지속되는 전쟁

 

• 소규모 게릴라전: 안시성 패배 이후 당나라는 대군 동원 대신 소규모 부대를 자주 보내 고구려인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소모전으로 전술을 변경했다.

 

• 국력의 소진: 연개소문 재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고 국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4. 외교적 실패와 고구려의 고립

4.1 신라와의 협상 결렬

 

• 김춘추의 제안: 백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의 김춘추가 원군을 요청하러 왔으나, 연개소문은 과거 영토(죽령 이북) 반환을 요구하며 협상을 결렬시키고 김춘추를 감금했다.

 

• 나당 동맹의 단초: 고구려의 거부로 퇴로가 막힌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게 되었고, 이는 고구려를 남북에서 압박하는 '나당 연합군'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2 외교 정책의 경직성

 

• 국내 정치용 강경책: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 현실 인식 부족: 신라의 성장을 과소평가하고 당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 변화를 무시함으로써 고구려를 국제적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다.

 

 

5. 고구려의 멸망과 사후 평가

5.1 사후의 내분과 멸망 (668년)

 

• 후계 구도의 붕괴: 665년경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남생, 남건, 남산)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 배신과 투항: 장남 연남생은 동생들에게 쫓겨 당나라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이는 고구려의 방어 체계를 내부에서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허망한 결말: 700년 역사의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공격과 지도부의 분열로 인해 연개소문 사후 불과 3년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5.2 시대별 평가의 변천

 

6. 결론: 연개소문이 남긴 역사적 교훈

 

연개소문은 개인적 역량이 뛰어난 장수였을지는 모르나, 국가 경영 측면에서는 치명적인 한계를 보였다. 그의 독재는 고구려 내부의 결속력을 자발적 동의가 아닌 공포로 유지하게 했으며, 이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극심한 분열로 폭발했다.

 

또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외교적 유연성을 포기하고 선택한 강경 일변도의 정책은 강력한 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자충수가 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은 단순히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연개소문이라는 1인 독재 체제가 지닌 구조적 모순과 후계 관리의 실패에서 비롯된 '내부적 붕괴'의 산물로 평가된다.


高句傾頹起一門
獨裁血刃裂乾坤
安市城頭風雪烈
三韓終屬新羅尊

- 仙文 金永漢

 

 

高句傾頹起一門 고구경퇴기일문
獨裁血刃裂乾坤 독재혈인열건곤
安市城頭風雪烈 안시성두풍설렬
三韓終屬新羅尊 삼한종속신라존

 

高句傾頹起一門
고구려의 기울고 망함이 연개소문 일가의 집권에서 비롯되었고

獨裁血刃裂乾坤
연개소문의 독재와 피의 쿠데타가 천지를 갈라놓았다

安市城頭風雪烈
안시성 전투에서 당의 추위와 격전을 이겨낸 군사적 승리, 그러나 그로 인한 국력 소모로 

三韓終屬新羅尊
결국 삼한은 신라의 지배 아래 통일되었다.

 
 
 
 
 (PS)

어차피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고 가정을 했다고 해도 그 결과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가정법은 무리요 억지처럼 보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지나간 과거보다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위한 공부입니다.역사에서 “가정”(what‑if)을 하거나 사건을 “복기”하는 것은 단순한 상상 놀이가 아니라, 과거를 더 깊게 이해하고 인과관계를 짚어내기 위한 중요한 방법입니다.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가정적 복기는 우연성,필연성을 따져 결과론적인 해석을 피하게 됩니다.

또한 현재를 성찰하는 도구가 됩니다.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결국 고구려를 망하게 했습니다.쿠데타가 일어나면 강압정치(독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현대에서도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과거에는 정치는 모두 왕과 군사적 실력자들이 했지만 지금은 국민 개개인이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하는 집단지성의 시대라서 더욱 과거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현재를 더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고실험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물론 저 생각이 틀릴수도 있습니다.다만 제 짧은 소견으로는 사람사는 세상은 변주는 있지만 본질적인 부분에서 비슷한 맥락을 많이 발견하게 해주어서 역사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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