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제국이 민국이 된 씨앗은 수운 최제우와 최부자집의 최진립으로부터
고조선 이후 왕국과 제국의 형태를 지속하다 시민(국민)이 주권자로 바뀐 분기점으로 3.1운동을 꼽습니다.이 운동을 통해 백성이 아닌 국민, 시민으로서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고 신분제가 유지되던 시대에서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즉, 5000년 역사 중 시민의 역사는 겨우 100여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3.1운동은 당시 2천만 인구 중 10%인 200만명이 참여했습니다.그 이전엔 당연히 동학혁명이 있었습니다.동학혁명으로 제국의 비뚤어진 생각과 외세로 들어 온 일본군에 의해 30만명의 농민군이 죽임을 당했지만 "노비문서를 소각한다"는 신분제를 없애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신분제 철폐가 제국이나 왕국에서 백성이 주인되는 민국으로 변하는 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왕국이나 제국은 신분제 사회였습니다만 동학혁명으로 신분제를 없앤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동학이라는 사상이 혁명이 되는 것입니다.동학은 수운 최제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수운 최제우는 용담유사에서 자신 집안의 최진립 장군을 언급합니다.
[ “우리 선조 험천 땅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 같은 이내 절개 금석으로 세울 줄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선조의 충의와 절개는 용산에 남아 있네. 해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우리 임금님 성덕을 다시 돌아보네.”]
여기서 언급된 선조가 바로 최진립 장군입니다.최진립의 큰형 최진흥이 최제우의 7대조가 되며, 경주 최부자집과는 친가 방척 친족관계에 있었습니다.수운 최제우는 자신의 여종 둘 중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다른 한사람은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이런 생각의 단초는 아마도 "옥동과 기별"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옥동과 기별은 최진립 장군의 종(노예)이었습니다.최부자집은 최진립 장군과 운명을 같이 한 노예인 옥동과 기별의 제사도 지냈습니다.조선시대 신분제가 확고한 상황에서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만 종(노예)도 의(義)를 다했다면 충분히 예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꾸로 풀어보면 이런 사연이 "나비효과"를 불러 7대 이후 수운 최제우도 신분제 철폐를 생각했고 이후 동학혁명으로 좀 더 규모가 커졌으며 이후 규모가 극대화되며 3.1운동으로 커졌다고 봅니다.나비의 날개 짓이 태풍이 되었다고 봅니다. 최진립 장군 이후의 후손들의 형태를 보면 뭔가 일관성이 느껴집니다.물론 다소 비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가풍이라는 것을 무시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한 가문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알수 있는 일단면을 보여줍니다.이후 2대 최시형 시기에는 며느리도 하느님이라고 하여 여성의 인권을 높였고,3대 손병희 시기에는 사위인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용어를 만들며 아동의 인권도 높이게 됩니다.즉, 첫 시작은 노비를 대우해주었고 그 다음은 신분제 철폐의 노력과 운동,그리고 여성인권,아동인권으로 전개되었습니다.
- 일시: 2025-3-2 11:30 ~15:30
- 날씨: 대체로 흐린 가운데 가끔 이슬비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175km
.최진립 정려비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513-1
.충의당,충노각,회화나무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충의당길 15
.용산서원,최진립 신도비: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
.최진립 장군 묘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 157 (울산과학기술원 교수아파트 입구.별다른 안내판이 없어서 결국 찾지를 못함)
2025.3.2
오랫만에 맞는 연휴이지만 비가 계속 내려서 두문불출로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잠시 햇볕이 보여서 바로 경주로 향합니다.
▷ 최진립(崔震立) 정려비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재종숙 최봉천,아우 최계종과 하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습니다.병자호란때도 참전하여 용인 험천에서 전사하였습니다.청백리로 기록되었고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1592년 7월 27일, 권응수와 최진립의 조선군과 의병 연합군이 영천성을 탈환한 후 경주성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경주성에는 일본군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병력이 1,000~2,000명 있었고, 조선군은 약 1만 명의 병력으로 연합작전을 펼칩니다. 전투 개시는 이시카와야스카쓰의 500병력이 경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북상하고, 부산첨사 김호는 1,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하합니다.조선군은 8월 2일 경주 내남면 노곡리에서 일본군과 마주치며 전투가 시작됩니다.
전투 진행은 조선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일본군이 도망치고, 최진립과 최신린은 측면에서 공격합니다.김호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많은 일본군이 전사합니다.잔당을 추격하여 열박재에서 전멸시킵니다.최진립은 이 전투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합니다.아무래도 최진립은 이곳이 자신의 고향 주변이었으니 지리적 잇점을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충의당
최진립은 1568년 경주에서 태어나 3살 때 외가로 이주합니다.그의 고향인 충의당은 원래 흠흠당이었으나 1760년에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충의당은 최진립의 살림집이었고 충의당은 사랑채의 이름입니다.

신사명변(愼思明辨)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신중하게 생각하고 명쾌하게 변론하라"는 의미입니다.나쁜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좋은 평판을 얻는 자세로 읽힙니다.

최진립의 호, 잠와(潛窩),는 '집이 물에 잠긴다'는 뜻으로, 비슷한 호를 가진 이명준선생과 함께 청백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글은 69세의 최진립이 병자호란에서 전장에 나가며 한 말입니다."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라는 老者雖不能獨戰不能死耶(노자수부능독전불능사야)라는 글씨입니다.최진립은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에서도 활약했지만 여기서 청군에게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고 장렬히 전사합니다.

최진립 장군 동상 아래에는 충노 옥동과 기별의 모습이 보입니다.옥동과 기별은 주인의 충성심에 감화받아 최진립과 함께 순절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이를 기억하여 제사를 모십니다.조선시대 종에게 절하는 행위에 대한 비난이 있었으나, 후손들은 이를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옥동과 기별을 모시고 있습니다.
활인당(活人堂)이라는 이름은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최진립의 손자 최국선(崔國璿, 1631∼1682)은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신념으로 마을 어귀에 초가를 지어놓고 곳간을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살렸고 최국선의 베풂은 '경주 최부자' 가문의 상생과 나눔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최진립의 셋째아들인 최동량은 개간 수리 사업으로 큰 재산을 축적하였고 부는 장남 최국선에게 이어지고, 그 차남 최의기에게로 전해져 19세기 후반 경주 향교 옆으로 세거지를 옮겼습니다.
최동량은 소작료를 적게 받아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으며, 최국선은 가훈에 따라 흉년 시에 땅을 사지 않고 재산을 1만 석 이하로 유지하였습니다.12대 최준은 일제 강점기 동안 모든 재산을 임시정부와 국권회복단에 기부(마지막 최 부자로 불리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했고, 그의 동생 최완은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습니다.해방 후, 최준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교를 세우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명문가가 어떻게 노력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최부잣집 6훈은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입니다.

4백년 회나무가 충의당 근처에 있습니다.바로 뒤에 충노 옥동과 기별의 충노각이 있습니다.
'故忠奴玉洞寄別不忘碑(고충노옥동기별불망비)'가 있는 '忠奴閣(충노각)' 비각입니다.
'主爲忠臣不爲忠奴乎(주위충신불위충노호)'라 쓴 빗돌이 보입니다.'主爲忠臣不爲忠奴乎'는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는 뜻입니다.용인 험천 전투에서 최진립이 자신을 평생 동안 모시느라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도록 하라" 하고 명령했을 때 두 노비가 주인에게 대답한 말이기도 합니다.


▷최진립 신도비
1699년 최진립을 향사하기 위해 용산서원을 건립한 후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습니다."정무공 최선생 신도비"입니다.
신도비는 1740년에 세워졌지만, 귀부는 무려 1000년이 넘는 시간차를 두고 무열왕릉(661년 조성)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귀부의 머리 형태, 고사리 장식, 연꽃 문양, 거북목의 보상화 등 불교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귀부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고분군에서 유래했을 가능성, 경덕왕릉 등 다른 왕릉에서 가져왔을 가능성, 혹은 신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려 했을 가능성 등 역사적 미스터리입니다.


▷용산서원
최진립 장군을 제향하는 용산서원은 강당, 사당 숭렬사우, 교육 공간인 민고당, 신도비 등을 거느리고 있는데 청풍루는 정말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 훼철된 이후 1924년에 다시 세워진 건물입니다.


▷용당 나루터
매화꽃이 피고 있습니다.


매화꽃이 한송이만 피더라도 곧 봄이 다가옵니다.
回眸觀歷史 帝國變民國 身份制度廢 平等社會成
若欲返王國 此乃反動行 日帝征韓論 李承晩改憲
朴正熙維新 全斗煥光州 尹錫悅戒嚴 皆為反動行
梅花一朵開 春風拂面來 重歸和平境 方得春意濃
회모관역사 제국변민국 신분제도폐 평등사회성
약욕반왕국 내시반동행 일제정한론 이승만개헌
박정희유신 전두환광주 윤석열계엄 개위반동행
매화일타개 춘풍불면래 중귀화평경 방득춘의농

역사를 뒤돌아보면 제국에서 민국으로 변하고 신분제가 철폐되며 평등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의 발전이라면 이 상태에서 거꾸로 다시 왕국이나 제국이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은 반동(反動),혹은 퇴행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발생한 일제의 정한론,이승만의 4사오입 개헌,박정희의 유신,전두환의 광주학살,윤석열의 비상계엄이 반동에 해당합니다.
다시 시민의 힘이 살아있는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기원합니다.그래야만 봄이 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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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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