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예학이 향약과 두레의 협동으로 이어지고,결사대 정신이 연무대로 이어지니 

 

논산은 충남 중남부에 위치, 행정구역상 동쪽은 계룡출장소, 서쪽은 부여, 서남쪽은 전북 익산, 북쪽은 공주와 접하고 있습니다. 동남쪽 일대는 계룡산맥과 대둔산 줄기가 만나는 험준한 지형이나, 서북부는 남서부와 함께 해발 60m 내외의 평탄한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논산은 개인적으로 40여년만에 찾았습니다.파르라니 머리를 중머리처럼 깍고 입소한 연무대(논산훈련소)는 20대 젊은 청춘으로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장정에서 군인으로 거듭나는 곳입니다.왜 여기에 훈련소를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남한의 중간에 위치하여 한반도 징집된 젊은이들이 접근의 용이성이 우선 떠오르고 둘째는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가 떠오릅니다. 

 

한국은 원래 산성을 중시하고 먼거리에 있는 적을 최대한 많이 죽이는 활이나 쇠뇌,신기전과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 등 화포에 진심인 민족입니다.지금도 국방부는 포방부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이유가 있습니다.대한민국 육군은 자주포 보유량이 총 보유량- 2100여문 (K-9 자주포 1000여대,K-55 1000여대)로 세계2위인데 1위가 러시아입니다.그런데 러시아가 러우전쟁으로 많이 파괴되어 현재 실질적으로 한국이 1위입니다.

우리는 적을 최대한 많이 죽이고 우리는 덜 죽는 전법을 사용했습니다.이순신장군도 판옥선을 성으로 만들고 학익진으로 근거리 보다는 멀리서 화포로 적을 죽였습니다.일단 전쟁이 나면 산성에서 농성을 하며 기회가 닿으면 성문 밖으로 나와 공격했습니다.논산은 그 옛날 황산벌이 있었던 곳이었으니 계백,성충,흥수가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5천 결사대로 4전4승을 하였지만 김유신의 신라군이 5만이니 열배가 되는 군사수에 중과부적으로 밀려 지게 됩니다.대한민국의 평범한 젊은이가 연무대에서 담금질되어 군인으로 태어나는 곳이 이곳이니 만약 전시가 되면 결사대의 정신으로 국토와 국민을 보호하는 곳으로 이곳보다 뜻깊은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또한 논산은 조선시대때는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예학(禮學)을 정립했습니다.예학이란 성리학의 발달로 나타난 예법에 관한 학문으로 특히 상장 제례(喪葬祭禮)를 중시했습니다.임진왜란으로 흐트러진 사람의 도리를 다시 일깨웠다고 보면 됩니다.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향약과 두레로 품앗이 협동정신으로 평시에도 함께하며 살았으니 논산은 한국의 생존법이 압축된 고장입니다. 

 
 
 

- 일시: 2024-12.31 00:30 ~2025.1.1 10:30
- 날씨: 밤에는 영하 6도였지만 낮은 대체로 맑음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650km

 

명재고택(노성향교)
노성면사무소
돈암서원주차장
계백장군유적지
미내교(미내다리)
임리정(죽림서원)
견훤왕릉주차장
성삼문의묘(근처까지 갔으나 묘가 너무 많아서 찾지 못함)

 

2024.12.31 00:30

12월30일 한국증시는 폐장일이었지만 저는 올라운드 트레이더라서 미 증시가 열리는 11:30분부터 딱 한시간 트레이딩을 하고 익일 00시30분에 바로 논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피로감이 느껴져서 함안휴게소에소 휴식했습니다.

 

2024.12.31 08:30

충분히 휴식하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명재고택으로 향했는데 도착해보니 중간 휴식을 자주하다보니 10시 30분쯤 되었습니다.

 
 

▷명재고택

계룡산 줄기와 대둔산 줄기에서 발원하는 금강의 지류들이 북서쪽에서 합류해 남으로 흐르다가, 논산천에서 다시 합류, 강경에서 금강 본류와 합쳐지며 큰 강이 됩니다.이 강은 지도상에서 우리나라 3대 강의 하나인 ‘금강’으로 불립니다. ‘비단같이 아름다운 강’이라는 의미로  비단 강이 흐르고 있는 유역은 논산의 곡창지대로 지역민의 젖줄입니다.논산은 강이 흘러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곳입니다.천연적인 지형으로 강과 산을 끼고 있습니다.

논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2차 봉기시기에 공주전투 이후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역입니다.논산에서 남북접 동학농민군이 결성돼 공주성 전투에 나섰고, 후퇴한 동학농민군이 논산 곳곳에서 전투를 치러 진격과 후퇴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지역입니다.전라도 전봉준 중심으로 바라보던 동학농민혁명의 시선을 돌려 전국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학농민군은 원평 전투와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했습니다. 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은 가혹한 토벌전에서 희생됐습니다.논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2차로 봉기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총결집했던 곳으로 4000여 명에서 출발한 전봉준의 군대가 논산에서는 10만 대군으로 불어난 것이 이를 방증하는 대목입니다. 

동학을 궤멸시키다시피한 세력은 외부세력, 즉 일본군이었습니다. 이전엔 동학의 가장 큰 적은 유학자 집단인 사림(士林)이었지만 논산 노성의 유림들은 동학을 그렇게 핍박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동학을 환영하지도 않았지만 탐관오리들의 작태가 심하니 그런 세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못 본 체하거나 동조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재고택에서 앞산을 바라보니 흡사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기도 하고,연꽃잎이 중첩된 듯 포개진 산그리메가 한폭의 동양화입니다.

민란의 주모자들은 유치복을 비롯 윤상건(尹相健)·박관화(朴寬和)·이성오(李成五)·윤상집(尹相執)·윤성칠(尹成七)·윤자형(尹滋馨) 등으로, 노성 지역 대표적 종가인 파평윤씨 노성종중에서 상당수 참여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논산 동학농민혁명 때 적선 덕에 소실위기를 넘긴 명재 윤증 고택입니다.명재 윤증(1629~1714)선생은 조선시대 학자로 본관은 파평이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고 합니다.명재고택은 조선후기 양반주택의 대표로 전통한옥의 모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특히 장독대가 압권입니다. 예학에 밝았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행실을 한 것입니다.그래서 명재고택이 살아남았다고 봅니다.

장독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오리모양의 돌 솟대가 보입니다. 한국인 고유의 심성이 느껴지는 솟대가 장독안의 장이 맛있게 익기를 기원하고 명재고택도 난세에 살아남은 이유로 보입니다.인내천이니 사람 인심이 바로 하늘의 마음입니다.

 

명재고택의 우측은 둔덕이 있는데 좌측은 노성향교의 대성전 큰 건물로 인해 안정감이 더해져 편안한 위치로 느껴집니다.

▷노성향교


노성향교는 1380년 고려우왕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합니다.대성전에 모셔진 분은 우리나라의 18현과 특이한 것은 송나라 2현만을 모셨는데 매우 이례적이지만 이유는 알수가 없다고 합니다.

 

▷노성면사무소(노성관아)

 

논산 동학혁명 1년전 노성민란(魯城民亂)이 일어났던 노성관아.현재는 노성면사무소입니다. 노성민란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노성 현감의 탐학 행위에 반발해 논산지역 농민들이 일으킨 민란으로 전운소(轉運所; 조세 양곡의 뱃길 운반을 맡아보던 지방관아)에서 운송하다 남은 미곡 400석 중 200석을 전 노성 현감이 착복했는데, 1893년에 부임한 현감 황후연(黃厚淵)이 농민들에게 이 200석을 대신 물어내도록 하자, 이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원래 사림파와 훈구파로 시작하여 동인,서인,남인,북인 등 4대 당파로 분화되며 여당과 야당이 견제하며 나름 잘 작동을 했는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감시가 소홀해져 삼정의 문란이 생겼고 결국 동학혁명으로 연결됩니다.
삼정의 문란이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운영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지방 관아의 수탈도구로 전락하여 문란해진 일을 말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爲國丹心誰有知"라고 하여 "나라를 위한 나의 단심을 그 누가 알아줄까"했지만 이후 반복되며 그대로 계승되고 또 계승되어 지금은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의지를 안고 아이돌 응원봉을 반짝이며 즐겁고 발랄하게 저항하는 무상급식세대가 이어받고 있습니다.우리세대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면 지금 세대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릅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너무도 막막했을 녹두장군은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이라고 부르는 요즘 세대의 노래를 들으면 지하에서 아주 기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시래천지개동력 운거영웅불자모
愛民正義我無失 爲國丹心誰有知
애민정의아무실 위국단심수유지

좋은 때 만나면서 온 천지 합쳤더니
영웅도 운에 대해 도모 길 막막해라
백성을 사랑하는 의리 나라위한 단심을.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서원 9개중에 한 곳으로 오늘 저는 돈암서원을 끝으로 둘러보며 9개 모두 방문하게 되었
습니다.  

사계 김장생은 시조는 1부 밖에 전하지 않고 벼슬도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84세를 살았으니 그 당시를 기준해보면 이름 그대로 장수하였습니다.서울 출신으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습니다.

김장생의 저서로는 『상례비요(喪禮備要)』 4책을 비롯해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합니다.

김장생은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산앙루의 규모에 압도됩니다.산앙(山仰)이란 시경 소아편 거할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뜻,행실)을 따라가네.(고산앙지 경행행지 / 高山仰止 景行行止)에 나왔습니다.

주련은 소강절의 세한(歲 寒 <宋, 邵康節 詩>)입니다.

 

松柏立冬聽 (송백입동청) 송백은 가히 겨울에 이르러 더욱 푸르나니

方能見歲寒 (방능견세한) 저 푸른빛으로 보아 한겨울임을 능히 알겠네

聲順風裏聽 (성순풍리청)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푸르름이 배었거늘 

色更雪中看 (색경설중간) 흰 눈 속에서 그 푸르름이 더욱 빛나고 또 빛나는 도다

 
 


응도당 건물도 너무 멋있습니다.돈암서원의 큰 강당입니다. 중용27장에 나오는 "고왈  苟不至德/구부지덕 至道不凝焉/지도불응언"으로 "진실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양성당 앞에 큰 비석이 있는데 "연산현돈암서원비기"입니다.

 

돈암서원에 특별한 한가지가 더 있으니 꽃담입니다.숭례사 사당을 둘러싼 꽃담은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알려줍니다.


김장생을 모신 사당 앞에 태극문양의 문이 있고 좌우로 꽃담의 붉은 글씨가 보입니다.박문약례(博文約禮)로 " 문헌을 통해 널리 익히고 이미 익힌 것을 다시 예로써 요약한다는 뜻"입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널리 학문을 닦고 예절을 바르게 함"을 나타내 것인데 君子 博文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군자 박문어문 약지이례 역가이불반의부 ; 군자가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점을 갖추면,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가 출전입니다.

 

좌측의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좋은 날씨 부드러운 바람의 뜻으로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측의 지부해함 (地負海涵)은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 주듯 포용하라라는 뜻으로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400년 향나무가 있는 곳은 정회당입니다.

▷계백장군 유적지

김유신의 신라군 5만명이 3곳으로 공격하고 계백의 5천 결사대가 3개의 군영을 차리고 맞붙은 황산벌 전투를 보면 현재 한국의 처지와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많아서 한국은 어떻게 방어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백장군 유적지에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있습니다.


계백장군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처자식을 모두 죽인 후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합니다.그동안 김유신도 독한 사람이라고 여긴 것은 그의 아들 원술이 임전무퇴를 하지 않고 후퇴한 것을 두고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었고 이후 김유신 사망 후 원술이 집으로 찾아왔는데 김유신의 처 지소부인도 원술을 외면합니다.

그런데 계백장군을 보니 한층 더 처절합니다.
 
화랑 관창의 죽음 이후 결국 김유신은 압도적인 군사의 수로 4전 5기를 이루게 됩니다.


백제계백장군지묘가 우측 능선에 보이고 그 아래 충장사가 있습니다.

▷강경 미내교(미내다리)

조선 영조 7년(1731)에 건립된 것으로 옆 강의 이름이 미내천입니다.3구의 아치 형태인데 홍예석을 돌려쌓았습니다.제법 다리규모가 있고 무엇보다 예쁜 다리입니다.  
 

▷임리정

1626년(인조4년) 사계 김장생이 건립한 건물로 후학을 가르쳤던 곳입니다.원래 황산정이었
으나 임리정 앞의 임리정기비에 의하면 《시경의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하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입니다. 

임리정의 위치가 절묘합니다.금강이 내려오다 낙화암 근처에서 한번 꺽어지고 임리정 앞에서 반대로 한번 더 꺽어지는 지점으로 흡사 태극을 그리는 것 처럼 보이는데 임리정은 두번째로 꺽이는 그 바깥쪽 높은 곳에 지어졌습니다.바로 옆에 죽림서원이 있습니다.

김장생의 한시를 필사해봅니다.

親朋此外有誰其(친붕차외유수기) - 金長生(김장생)

爲松亭子竹爲籬(위송정자죽위리)
소나무로 정자 만들고 대나무 울타리 삼아,

深深孰我知(운학심심숙아지)
구름 낀 골짜기 깊으니 나 홀로 있는 줄 누가 알리.

庭畔徘徊有一鶴(정반배회유일학)
뜰에 한 마리 학이 배회하니,

親朋此外有誰其(친붕차외유수기)
친한 벗이 이 밖에 그 누가 있으리.

金長生(김장생) 詩
자신의 시조를 한시로 쓴 것.

( 金長生 時調)

 

▷전견훤왕릉

후백제 견훤(867~936)의 무덤으로 정확한 명칭은 전(傳)견훤왕릉입니다.견훤은 상주 가은현의 아자개의 아들로 900년에 완산을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웠는데 한때 가장 강성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장남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고 이후 견훤은 도망쳐서 고려로 망명(귀부)하여 왕건과 함께 아들 신검을 공격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킵니다.

견훤이 임종시에 완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고 지금도 날씨가 좋으면 전주의 모악산이 보인다고 합니다.묘지명은 후백제왕견훤릉입니다.

 

동학혁명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오년(1894) 일제의 총칼 앞에 좌절 또는 실패하였다고 말들을 합니다.물론 그때 동학혁명만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학혁명운동은 좌절을 넘어 의병혁명운동, 3.1만세혁명운동, 임시정부혁명운동, 독립혁명운동으로 끊임없이 계승되었습니다.

또 일제로부터 해방 후 3.1통일혁명운동, 4.19혁명운동, 5.18혁명운동, 6.10혁명운동, 10.29촛불혁명운동으로 끊임없이 계승되었습니다. 또한 최근 윤석열 정부의 불법계엄령에 맞선 12.3혁명운동으로 다시 승화되고 있습니다. 이번 12.3 혁명운동은 윤석열 정부가 완전 퇴진 및 탄핵될 때까지 계속될 전망입니다. 그리고 남북평화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동학혁명운동은 쉼없이 계승되고 재현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의지가 지속되는 한 이어질 것입니다.대통령이 자국민을 죽이는 역사는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 비일비재했습니다.우리는 이런 자를 "사람이 아니다(非人)"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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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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