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흰구름처럼 허망한 매화꽃놀이에 가슴저리고

- 일 자 : 2003.3.9
- 산행시간 : 2003.3.9 10:40 ~ 16:00 (5시간 20분)
- 날 씨 : 약간 흐린 날씨에 약간의 눈
- 등반인원:70명
- 산행코스
▷ 진틀-병암계곡-정상-싸목재-어치계곡-지게교
- 횟수ː 2003-10회
- 산높이ː 1217.8
- 좋은산별ː★★★



08:00

꽃구경 시즌이 돌아오니 보통때보다 더 번잡스러운 시민회관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조용한 곳을 찾아
홀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돈다.

원래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는데 내가 이용하는 산악회 차량도 보통때보다 한대 더 늘어 두대다.

2호차에 몸을 실으니 저니와 설박사의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행 출발지에 도달했다.
논실과 먹방의 중간에 해당하는 진틀에서 출발한다.

10:40

타 산악회 인원을 포함해서 오늘 이곳 백운산은 장터분위기다.올라가는데 본의아니게 휴식을 해야 할 만큼
밀려서 올라가는 느낌이다.날씨가 포근해서 바닥은 눈이 녹아 상당히 질쭉하다.

병암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오늘 아이젠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눈밭이다.지난 주 내린 눈때문에
아직 잔설이 꽤 깊다.

11:41



봄꽃 산행을 왔는데 내 마음만 이미 봄이왔지만 산하는 아직 겨울이다.
일렬로 줄을 서서 오르는데 많은 인원때문에 빨리 갈수가 없어서 강제적 휴식을 하다보니 별로 힘들지 않고
오른다.

11:55


이제 정상을 향한 가파른 길로 접어든다.병암폭포 방향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며 가파른 등산길을 따라
오르는데 제법 땀이 많이 쏟아진다.

올라갈수록 눈밭이며 푹푹 빠지는 깊이가 만만찮다.따라서 러셀이 된 길로만 걷는다.매화꽃 산행을 왔다가
눈꽃을 볼 상황이다.꾸준히 앞을 따라 올라가니 제법 손이 시리고 겨울산에 온듯한 착각이 인다.
그러나 바람은 거의 없고 온도도 몸의 열을 식힐정도로 적당하다.등산하기 딱 좋은 온도다.

12:45



정상이 좌측에 보이기 시작한다.불과 5백미터만 더 올라가면 정상이다.
정상은 1217.8M인데 생각보다 산이 유순하고 오르기 쉬워 아마 첫 출발지가 500M는 넘는 것 같다.
1200M이상의 산을 이렇게 쉽게 오를 수 있는 곳도 더물 것이다.

12:50



거짓말 같은 눈꽃이다.아니 서리꽃(霜花)이다.3월에 이런 광경을 보다니.. 그것도 남쪽 산에서 신기할 따름이다.

13:12

좁은 산 정상에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붙어서 아우성이다.질서도 없고 등산길과 하산길도 뚜렷하지 않다.
슬슬 짜증이 난다.정상을 코 앞에 두고 그냥 내려가기는 싫고 즐을 서서 올라가려니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국민인데 이럴때는 미국처럼 질서 안지키는 사람들은 총으로
위협이라도 하고 싶다.



겨우 위태위태한 경사면을 등지고 올라 정상에 섰다.





지나온 길을 쳐다보니 새롭고 바로 앞에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도 보인다.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나니
하산길이 걱정된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참을 기다린 후 로프를 잡고 겨우 하산하여 이제 매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13:30

스패츠도 안하고 아이젠도 안했는데 눈이 장난이 아니다.눈이 등산화 속으로 들어오고 제법 미끄러지는
구간도 많다.한 20분 진행하니 먼저 온 일행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도 도시락을 꺼내며 합류하는데 우리 와이프가 오늘은 뭘 준비했을까?
쇠고기 국밥이다.산에서 먹는 식사는 특별한데 눈이 슬로비디오로 내린다.
하늘은 햇볕이 나는데도 많은 눈은 아니지만 눈이 내린다.

내 도시락은 우리 딸의 보온도시락인데 보온병에 따끈한 소고기 국을 넣고 원래 반찬통엔 밥을 넣어
식사시간이 되면 그냥 밥을 국에 말면 바로 쇠고기국밥이 되는 것이다.

당일치기 산행에선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김밥은 온도가 내려가면 딱딱하기도 하고 수분이 부족해서
잘 넘어가지도 않지만 국과 밥을 같이 먹으면 훨씬 수월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매주 국은 바꾸면 된다.
추어탕,미역국,쇠고기국....등등..

14:00

이제 본격 하산이다.
여기서 우격다짐을 한번 해볼까?

내 등산은 대한민국 주식챠트야......
왜?
....... 오를때는 낑낑대다가 내릴때는 씽씽 잘 내려가거든

내 등산은 성인비디오야......
왜?
....... 실제보다 더 쌕색거리며 호흡을 하거든


14년만에 등산을 하며 이상하게 등산은 잘 안되는데 상대적으로 하산은 땡초처럼 호탕하게 잘 되는게
이상할 뿐이다.

그런데 매봉으로 진행 도중 산행대장이 눈이 많아 걱정이 되는지 바로 하산하라고 한다.

그래서 싸목재로 내려와서 어치계곡을 지나 지겨운 도로를 따라 지게교에 다다랐다.매봉을 지나
매화마을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산행대장의 결정에 불만은 없지만 빨리 매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

16:00

산행대장은 매화마을에 있는 버스를 지게교로 안내하기 위해 갔고
뒤따라 내려온 설박사와 포켓양주병을 꺼내 한잔씩 먹는데 곧 올것 같은 차가 매화마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시간이 하릴없이 지난간다.



넘어진 김에 쉰다고 어차피 늦다면 여기서 즐길 수밖에...추워서 캠프파이어를 지피고 소주와 각종 안주를
순서대로 먹으니 2시간 뒤에 어둑 할 즈음 기다리던 차가 왔다.

술기운이 온몸을 타고 돌때 차창 너머로 벛꽃 같은 매화꽃을 보는데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원래
.....

매화나무나 벚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꽃이 먼저 핀다.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부터 보여준다.참으로 순수한 열정이다.나뭇가지의 어디에 그런 꽃이 숨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겨울에 그들은 한낱 불품없는 나뭇가지에 불과하다.색깔도 거무튀튀하다. 먼지가 쌓여있고,
가끔 새똥도 묻어 있고, 어떤 것은 검은 비닐 봉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어딜 보아도 아무데도 쓰일 데가 없는
무가치해 보인다.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꽃을 피워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나를 아름답게 한다.

- 정호승의《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중에서
....

버스안에서 설박사가 주는 고로쇠물을 먹으며 차창 밖 매화 꽃을 본다.
산악인 중 추운겨울 눈꽃산행을 해 본 분들이라면 영하 20도 이하의 강추위에 왠만 한 것은 다 얼어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그런 그곳에 있던 나무와 풀들은 다 죽은 것 처럼 보이지만 봄이되면 꽃을 피운다.

사람이라면 영하 10도 이하에서 제대로된 등산준비물을 챙기지 않았다면 단 2시간만에 탈진과
하이포서미아(저체온증)로 사망한다.이번 겨울에 포천에서 사고가 난 걸 기억 할 것이다.그런데 방풍의도
오리털 파카도 입지 않은 裸身으로 견딘 나무는 꽃을 피운다.그래서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감탄스러운 것이다.그래서 그런 씩씩한 매화 꽃을 보고 싶었는데....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은 봄꽃...

그래서 이외수는 3월을 이렇게 노래한지도 모르겠다.

.....

3月 - 이외수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으면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춘천에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은 꽃이라는 한 음절의 글자만
엽서에 적어 그대 머리맡으로 보냅니다
꽃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나요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 하나뿐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 때문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

그런데 그런 이치를 모르고 단순히 꽃이 이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을 비틀듯 꽃을 꺽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일까?

특히 추운겨울 따뜻한 방구석에서 방콕(?)을 한 사람일수록 아무생각없이 과감하게 꽃을 斷頭시킨다.
꽃이란 그 나무의 생식기가 아닌가? 생식기가 없으면 수분을 할수 없고 자식(열매)도 없는 법.
나 같은 땡초도 꺽지 않거늘 무지하게 꺽는다면 폐인이거나 마군이렸다.

땡초도 못될 산악인이라면 언제 알피니즘을 구할까?땡초도 法은 지키는데....산악인이라면 최소한의
향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땡초가 든든하면 진정한 알피니스트는 더욱 빛나는 법.아무나 땡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땡초는 산을 진정으로 알고자하는 참된 자세는 버렸을 지라도 한때 추구하고자
하던 정신과 그 멋은 그의 머리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

적멸보궁 가는길 -이산하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낏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

도낏날에 묻혀 줄 향기조차 없다면 산을 밟지마라.자연보호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山河라는 것은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후손에게서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진정한 산악인이라면 쓰레기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바위에 상처를 내지 말것이며 자신이 죽은 후 산에 무덤도
만들지 마라.시신을 병원에 기증하든지 아니면 화장하든지...

엄동설한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아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하나.매화

俗氣라곤 묻어있지 않은 순수의 표상.구불구불 휘어져 올라간 가지 끝에 音標처럼 피어난 꽃망울!

술기운에 환청은 더 깊어지고...

........

매화 옛 등걸에 세봄이 오니 맑은 향기 山家에 넘쳐흐른다.
가물가물 타는 심지 다시 돋우고 이밤을 함께 새는 두해 된 꽃.

<강희안의 "양화소록" 중에서>

........

한마리 제비가 봄을 못 만들지언정 매화가 피어야 정녕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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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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