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엄흥도 후손이 숨어 산 울산 남부의 불교,고래, 처용암까지

 

울주 원강서원비와 율리 영축사지, 장생포와 개운포·처용암 일대는 단종 복위 운동의 기억, 사라진 사찰의 흔적, 근대 포경 산업과 민속 설화를 한데 엮어볼 수 있는 울산 남부권의 입체적 답사 공간입니다.

이번 문화유산 답사는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의 원강서원비에서 시작해, 청량읍 율리의 영축사지, 장생포 고래박물관과 고래고기 원조 할매집, 남구 성암동 개운포성지와 처용암에 이르기까지, 내륙의 서원과 폐사지를 거쳐 바다의 항구와 민속의 현장까지 두루 잇는 여정입니다. 단종·세조 대의 선비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원강서원비는 조선 후기 울산 사림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했는지 보여주는 묘정비로, 오늘날 다시 중건된 서원 경내에 서 있어 지역 유교문화사의 한 축을 이룹니다.영축산 자락에 자리했던 율리 영축사 터는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폐사지로,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산지 사찰이 어떻게 형성되고 소멸했는지, 불교 유적의 시간성을 사유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이 있는 고래문화특구는 선사시대 반구대 암각화에서 확인되는 고래잡이 전통과, 20세기 근대 포경 기지로서의 역사가 포개진 장소로, 국내 유일의 고래박물관과 고래생태 체험관을 중심으로 사라져가는 포경 유물을 수집·보존하고 고래 문화를 전시하는 해양문화의 현장입니다.이 일대의 고래고기 원조 할매집은 포경 산업의 기억이 생활문화와 식문화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체감하게 해 주는 장소로, 답사자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과거 장생포 마을의 생활사로 이끕니다. 남구 성암동의 개운포성지는 임진왜란기 해전과 연관된 군사·해방비 유적지로, 울산 연안 해역이 한반도 동남 해방 전략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보여 주며, 인근의 처용암은 처용설화가 구전과 지명, 풍물·무속 의례 속에서 어떻게 현전체험으로 재구성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민속 신앙의 무대입니다.

 

 

 

- 일시: 2026-2-7 08:30 ~15:00
- 날씨: 출발할때 약간의 싸락눈 날렸지만 대체로 맑음 
- 몇명: W와 함께


▷ 답사행로(風輪) :183km

 

원강서원비-> 영축사지 -> 장생포 고래 박물관 -> 고래고기 원조 할매집 -> 개운포성지->처용암

 

원강서원비: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727
율리영축사지:울산 울주군 청량읍 율리 822
장생포 고래박물관: 울산 남구 장생포고래로 244
고래고기 원조 할매집 본점:울산 남구 장생포고래로 135
개운포성지: 울산 남구 성암동 308
처용암:울산광역시 남구 신항로 562

 

원강서원비

 

원강서원비는 조선 후기 울산의 원강서원에 세워진 비석으로, 단종의 충신 엄흥도의 행적을 기린 것입니다.이 비는 1820년(순조 20년)에 세워졌으며, 높이 약 2.12m로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1998년 지정)입니다. 원강서원은 엄흥도의 후손과 유림이 1799년 원강사를 세운 데서 시작해 1817년 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94년 현재 위치(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로 이전하며 비석도 함께 옮겨졌습니다.

엄흥도는 단종 시신 수습 후 영월을 떠나 은신했으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손(특히 큰아들 엄호현과 손자 엄화 일족)이 단종 옷을 김시습에게 전달한 뒤 울산 언양(삼동면 금곡리)으로 피신했다고 전해집니다. 엄흥도의 아들이 셋이고 생존을 위해 흩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세거지’만 좁게 말하면 현재 가장 뚜렷한 집성촌은 문경 산양면 우마이의 영월엄씨 집성촌이고, 종가 논쟁과 관련해 예천·울산 계통이 핵심 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후손들 중 한 축은 울산에 뿌리내리며 엄흥도는 영월엄씨이지만 후손들은 산성엄씨로 불리게 되었고, 현종·영조 때 복권(추증 공조판서, 정문 세움) 후 종가(울산 온산읍 산성마을)로 인정받았습니다.서원 이전(1994년 공해지역 개발로 삼동면 둔기리로 옮김) 시 비석도 함께 이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엄흥도 본인은 울산에 가지 않았으나, 후손들의 정착과 충의 기림이 원강서원비 세워진 직접적 연유라고 합니다.

좌측이 진품 비석이고 우측은 똑같은 내용으로 새로 건조


엄흥도는 세조 때 영월 호장으로, 단종이 유배 중 사망하자 시신을 수습해 장릉에 은밀히 장사 지냈습니다. 그때 엄흥도가 한 말은 "위선피화(僞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으로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노라."였습니다.

세조의 보복을 두려워해 종적을 감췄으나, 후에 숙종이 공조참의로, 영조가 정문과 공조판서 증직으로 충의를 인정했습니다.

비문은 홍문관제학 조진관이 찬술하고, 동부승지 이익회가 썼으며, 비명(비 제목)은 이조판서 이조원의 전서(篆書)로 미술적 가치가 큽니다. 비는 사각 받침돌에 비몸과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엄흥도의 충절을 상세히 기록합니다.원래의 비석 글씨가 흐려져 새 비석을 옆에 세웠습니다.(조선충신영월호장)

진품 비석도 자세히 보면 글이 보임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 영화가 개봉되었고  엄흥도(유해진 분)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면 삼족을 멸할 수도 있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단종을 장사지낸 후 가족과 함께 영월에서 은거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엄흥도 묘소는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있음)

 

단종이 청령포(淸泠浦:맑고 서늘한.청룡포가 아님)에서 죽었던 이유는, 왕위를 빼앗긴 뒤에도 여전히 정치적 상징으로 남아 있어 세조(수양대군) 정권의 불안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한 유배가 아니라 “살려 두면 위험하고, 살리면 더 위험한 인물”을 격리·제거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세조로 즉위했지만, 단종은 여전히 정통 왕위 계승자로 여겨지는 상징적 존재였습니다.1456년 사육신(성삼문·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음모가 발각되면서, 단종이 “왕위 복귀의 구심점”이라는 점이 명백해졌고, 이 사건이 단종의 처형을 가속시키는 직접적 계기가 됩니다.원래 쿠데타세력은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강압정치(공포정치,독재)가 필수적으로 수반됩니다.

1457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됩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 같은 지형이라, 사실상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는 효과가 있었습니다.유배 자체도 일종의 정치적 격리·고립이었지만, 세조 입장에서는 “살려 두면 언제 또 반란의 명분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컸습니다.

정사(《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했다고 기록하지만, 야사와 후대 연구에서는 세조가 내린 사약 또는 교살로 죽임을 당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집니다.1457년 10월, 유배지가 홍수로 잠길 우려가 있어 청령포에서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긴 뒤, 세조가 보낸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관청 심부름꾼 복득이 단종을 사약·교살로 처형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또한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1440~1521)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정비로, 14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남편의 폐위·사망 이후 18세에 궁에서 쫒겨나 64여 년을 과부·실질적 노비 신분으로 동대문밖 정업원(淨業院 : 비구니 사찰 겸 승방(女僧房) 성격의 공간)에서 살아야 했는데 사후 177년만에 복권되어 왕비가 됩니다.

원강서원 출입문 좌측 비각 안에 원강서원비가 있고 서원 뒷쪽 야산엔 엄씨 묘지가 있음

그때의 상황을 엄흥도로 빙의하여 시로 구성해봅니다.



동강에 밤눈이 내린다
얼은 흙 위에 고요한 무덤 하나,
그 위로 돌아오지 못한 혼이
백산을 등지고 흘러간다.
몰락의 밤,
삼족이 함께 사라질 재앙도 두려움 아니었으니
남은 것은 단 하나—
흙바닥에 스민 임금의 붉은 자취.
나는 그 자국 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과 피가 한데 섞이는
이 밤을 오래 본다.




東江夜雪掩孤棺
一擔忠魂背白山
不計三族誅夷禍
只憐殞帝血痕殘

- 仙文 金永漢


東江夜雪掩孤棺 동강야설암고관  
一擔忠魂背白山 일담충혼배백산
不計三族誅夷禍 불계삼족주이화
只憐殞帝血痕殘 지련운제혈흔잔

동강(東江)에 밤눈이 내려 고요한 무덤을 덮고
한 어깨에 짊어진 충성스러운 혼이 백산을 등지고 있다.
삼족을 멸족시키는 화를 계산하지 않고
오직 죽어버린 임금의 피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애도할 뿐이다.


영축사지

 

불교 문화의 요충지로 영축사는 문수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울산에는 문수산이 있으며 문수사 사찰이 있고 문수경기장,문수야구장,문수초등학교,문수IC 등 문수가 여러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인도 영축산의 복제로 마가다국 영축산의 신령한 기운을 울산에 이식했습니다. 이는 법화경과 선종(염화미소)의 상징성을 포함합니다. 중국 오대산(청량산)과의 일치로  중국 산서성 오대산의 불교식 이름인 '청량산'이 울산으로 들어와 청량산이 되었고, 이후 문수산으로 명칭이 변천되었습니다.울산의 지명 중 '청량리', '청량사지' 등은 이러한 중국 신앙의 유입 흔적입니다. 문수보살 전설과 무거동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을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거(無去)'라는 지명이 유래하는 등 지역 전체가 문수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영축사지 폐사지는 발굴 중으로 철펜스로 쳐져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경주의 관문이자 독자적인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울산의 역사적·종교적 위상이 대단했습니다.울산은 신라 수도 경주의 외항으로서 경제·교통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영축산과 중국의 오대산 신앙이 이식된 불교 문화의 ‘1번지’였습니다. 특히 울산의 영축사(靈鷲寺)는 신라 전역에서 선정된 '전불시대 8처 가람지(前佛時代 八處 伽藍地)' 중 하나로, 신라가 과거 불타들이 머물렀던 성스러운 땅이라는 '불국토(佛國土) 사상'의 핵심 거점입니다.낭지(朗智), 원효(元曉), 지통(智通) 등 당대 고승들의 활동과 보현보살·문수보살 신앙의 결합은 울산이 단순한 공업 도시를 넘어 깊은 정신적 유산을 보유한 도시임을 입증합니다.

 

울산은 경주의 외항으로  ‘신라의 인천’에 해당합니다.경주는 수심이 얕아 대형 선박의 접안이 어려웠으므로, 울산이 실질적인 항구 역할을 담당했고 이는 현대의 서울과 인천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사신과 유학생의 출발지로 당나라로 향하는 당항성(경기도 화성) 길이 있었으나, 수도 경주의 지배층과 고승(자장, 범일 등)들은 안전과 편의를 위해 주로 울산에서 배를 타고 유학이나 외교 활동을 떠났습니다. 문화의 1번지로 외래 문물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지점으로, 중국의 불교 신앙과 양식이 직접적으로 수용되고 이식되는 통로였습니다.

 

전불시대 8처 가람지(前佛時代 八處 伽藍地)는 경주 (7처)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영흥사, 사천왕사, 흥륜사, 담엄사 신라 왕실 및 호국 불교의 중심지였고,울산 (1처) 영축사 (영축사지) 울산 지역 유일의 전불시대 성지였습니다.

영축사는 기운이 뻗치는 명당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예: 오대산 월정사와 같이 기온이 높아 눈이 먼저 녹는 지열 현상 등).또한  가섭불 신앙으로 이곳은 단순한 절터가 아니라 신라 불교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신성한 땅임을 증명하는 종교적 상징물입니다.

낭지 스님은 미랑(彌朗)과 신통의 시조로  초월적 수명과 신통으로 알려있는데 약 130~140년을 생존한 것으로 전해지며, 구름을 타고 다니는 '낭지승운(朗智乘雲)'의 주인공입니다.
중국과의 교류는 구름을 타고 중국 오대산 현통사를 왕래하며 법을 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는 울산과 중국 간의 활발한 해상 교류를 신비화한 것으로 해석됩니다.원효의 스승으로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던 원효에게 논문 지도와 같은 법을 전수하는 등 원효의 사상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지통은 울산으로 오는 길에 보현보살을 친견하고 계율을 받았습니다. 이는 신라 초기 문수 신앙 외에도 보현보살 신앙이 울산에 정착하려 했던 흐름을 보여줍니다.전통 신앙(태양신)과 불교의 결합을 상징하는 까마귀의 안내를 받아 낭지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기타 주요 사찰은 태화사(太和寺: 자장율사의 원찰이자 용(龍) 신앙이 결합된 사찰)와 망해사(望海寺: 처용 전설과 관련이 있으며, 용을 위해 지어진 사찰)이 있습니다. 

 

 

 장생포고래박물관

 

통상적으로 우리는 고래가 아주 거대하다는 것을 압니다만 실제 턱뼈를 보면 정말 크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게 됩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포경의 증거로 고래의 표현이 아주 세밀합니다.고래의 몸통, 지느러미,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 배에 탄 사람들이 작살을 던지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 이미 조직적인 포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고래고기 원조 할매집 본점

고래고기 모듬 (中)이 12만원이었습니다. 두사람이 먹기에도 양은 적어보였습니다. 지금은 포경은 안되고,고래고기 수급은 어업 과정에서 그물 등에 우연히 걸려 죽은 고래(혼획)뿐입니다.그래서 물량이 들쭉날쭉하고 공급이 제한적이다보니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육회가 나와서 먹었는데 육회가 없었으면 정말 먹을 것이 없을 정도 였을 겁니다.

 

고래고기 모듬의 3가지는 익히지 않은 생(生)의 상태였고 나머지 몇가지는 수육상태로 나왔습니다. 저는 익힌 것보다는 익히지 않은 쪽이 좋았습니다만 가게주인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익힌 것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개운포성지

개운포성지는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 일대, 옛 개운포 포구를 끼고 조성된 조선시대 수군 진영(성터)로, 경상좌수영이 자리했던 중요한 군사 요새입니다. 동시에 신라 헌강왕과 처용이 등장하는 처용설화의 배경지로 알려져, 역사·군사·설화가 겹쳐 있는 곳입니다.

개운포라는 지명은 처용설화가 실린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나오는 신라 헌강왕과 동해의 용(용왕)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집니다.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 일대에 놀러 나왔다가, 갑자기 짙은 운무(구름과 안개)에 둘러싸여 길을 잃게 됩니다.일관(해와 별의 움직임을 살피는 관원)이 “바다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고 아뢰자,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지으라고 명합니다.절을 세우겠다는 왕명을 내리는 순간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혔고, 이를 계기로 이 포구를 ‘구름이 개인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開雲浦)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이때 헌강왕의 명으로 세운 절이 울산 울주군 청량면의 망해사(망해사, 망덕사로도 전함)라고 전하며, 개운포와 망해사, 처용암이 하나의 설화권을 이룹니다.

 

 

처용암

처용 설화의 발생과 4가지 정도의 다각적 해석을 합니다.

울산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 세력 또는 지방 호족을 회유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해석하는 관점으로 헌강왕이 직접 울산에 내려와 지역 세력과 타협하고, 그 증표로 사찰(망해사)을 건립해 주는 대신 호족의 아들(처용)을 경주로 데려가 벼슬을 주고 관리하는 '상수리 제도'의 일환으로 봅니다.

무속적·벽사적 해석으로 처용이 역신(천연두 마마)을 물리쳤다는 내용은 전형적인 무속 구조를 띱니다. 헌강왕 자체가 남산신이나 금강산신이 춤추는 것을 독점적으로 목격했다는 기록은 그가 무당적 기질(신기)을 가졌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춤과 노래를 통해 귀신을 굴복시키거나 유희시키는 구조는 현대의 굿과 맥락을 같이 하며, 처용의 얼굴은 악귀를 쫓는 부적(벽사)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랍 상인 유입설로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이 중앙아시아 또는 아랍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처용을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인 상인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당시 신라의 국제적 교류 범위를 고려할 때, 우락부락하고 눈이 큰 이질적인 외모의 외국인이 신라인들에게 강력한 수호신적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도 신화 모티브의 결합으로 설화에 등장하는 용(龍)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용 관념(수행을 통한 승천)보다는 인도의 용족(Naga) 신화와 유사합니다.이는 울산 불교가 인도 전설의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세죽마을 일대에서는 약 6,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전해져, 선사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세죽마을은 울산공업단지(미포국가산업단지 등)가 들어서면서 환경이 크게 바뀌어, 1990년 전후부터 주민 이주가 본격화되었습니다.결국 마을은 사라지고, 지금은 해변 쪽에 ‘세죽옛터비’라는 표지석과 안내문만 남아 옛 마을의 존재를 알리고 있습니다.

현재 울산은 공업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하지만, 영축사지와 같은 역사적 부지를 재조명하고 사탑을 복원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울산 불교의 영험한 기운과 역사적 자산은 현대 울산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데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될 것입니다.

 

처용가비가 보입니다.한자를 번역해보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 내용입니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다니다가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사람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랴."

 

 

이번 여정은 한 지역 안에서 유교와 불교, 해양 산업과 민속 신앙이 서로 단절된 개별 유적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교차하는 복합 네트워크임을 밝혀 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이번 답사는 서원 비문에서 시작해 폐사 터의 적막, 고래박물관과 장생포 골목의 소리, 개운포 언덕과 처용암 바위에 스민 이야기들을 차례로 마주하며, 기록과 유물, 설화와 생활 기억이 중층적으로 얽힌 울산 남부의 역사·문화 경관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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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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