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우금치 패배와 전봉준의 체포 후에도 이어진 전라도 최후 항쟁지
남도의 하늘은 유난히 깊고, 장흥의 바람은 오래된 이야기를 싣고 흐릅니다.석대들 들판과 마을, 갯마을 어귀마다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숨결과, 굳건한 사상의 자취가 서려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늘이 되고자 했던 동학의 외침, 부패한 세상에 맞서 평등을 꿈꾸던 농민들의 혼, 그리고 나라의 수난 앞에 몸과 뜻을 바친 선열들의 결기가 이 땅의 흙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오늘 제가 걷는 이 길은 단순한 문화유산 탐방이 아니라, 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순례입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기록은 억눌린 민심이 피워낸 정의의 불꽃을 전하고, 석대들 전적지의 바람은 그 불길이 지나간 자리의 절절함을 새깁니다. 장흥향교의 고즈넉한 기둥 사이에는 유교의 도덕과 인간의 품격을 지키려는 옛 선비들의 숨결이 머물고, 천도교 장흥교구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이념이 신앙으로 성숙한 자리를 보여줍니다.
회진면 신상리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은 묵묵히 희생한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을 증언합니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그 탑 앞에서, 우리는 나라의 존엄을 위해 삶의 미미함조차 서슴없이 내어놓았던 선조들의 넓은 마음과 깊은 뜻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양리의 영회당에 들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장흥읍성 방어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과 장졸 95인을 기리는 사당으로, 관군의 충절을 상징하는 유적임과 동시에 동학과 관군의 대립 속 화해와 역사적 성찰의 장으로 기능합니다.
장흥의 유산은 돌과 나무, 건물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상, 그리고 기억의 결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서사입니다. 저는 그 서사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지키며,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갔는지를 봅니다.
오늘의 답사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마음이 만나는 길이며 그 길 위에서 저는 역사를 눈으로 보고, 사상을 가슴으로 느끼며,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금 묻습니다.장흥의 산과 들, 바람과 바다가 오늘도 묵묵히 이야기합니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쉰다.”
- 일시: 2026-1-18 05:00 ~18:30
- 날씨: 맑음
- 몇명: W와 함께
▷ 답사행로(風輪) :566km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석대들 전적지) -> 장흥 동학군 묘지 -> 천도교 장흥교구 -> 장흥향교 ->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수령 450여년) ->독립자금헌성기념탑 -> 영회당 -> 남미륵사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읍성로 2)
장흥 동학군 묘지(장흥공설공원묘지 4구역)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금산신기길 131
천도교 장흥교구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충열교촌길 35(교촌리 25)
장흥향교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교촌남외길 33(교촌리)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324-8
독립자금헌성기념탑 (전남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 379-3번지 마을 입구)
영회당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78 (예양4길 17-9)
남미륵사 (전남 강진군 군동면 풍동1길 24-13)
▷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석대들 전적지)

장흥 석대들 전투는 1894년 동학혁명 말기, 전봉준 등 주력 지도부가 체포된 후에도 장흥 지역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의 저항을 펼친 격전지로 평가됩니다. 이 전투는 동학군이 우금치 패배 이후 전라도 남부에서 재결집해 강진, 장흥 일대를 점령하며 항전을 지속한 맥락에서 벌어졌으며, 약 3만 명 규모의 동학군이 참여했습니다.
석대들 전투는 1894년 12월 12일부터 시작되어 15일 새벽 일본군 선제공격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인환·이방언 등 장흥 대접주가 이끈 동학군이 산림에서 유인되어 패배했습니다. 수백 명의 희생자와 무기 상실로 이어진 이 전투는 전라도 최후 항쟁지로서 동학혁명의 끈질긴 투쟁 의지를 상징합니다.
전투의 핵심 의의는 지도부 붕괴 후에도 민중 주도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 지속되었다는 점으로, 동학혁명의 민족·민주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장흥 주민과 소년 장수 최동린 등의 역할은 지역적 연대와 후속 항쟁(3·1운동으로 계승)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단순 군사적 패배를 넘어 혁명 정신의 불멸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동학군 지휘관 역할 요약
* 이방언: (남도장군·장태장군)장흥 동학군 총사령관으로 벽사역·장녕성 함락 주도, 석대들 전투 주력부대 지휘 및 선봉 공격 감행. 저명한 유학자로 혁명을 이끌었기 때문에 동학군을 농민군이라고 특정하는 것 보다는 동학군이 올바른 표현
* 이인환: (대접주)저명한 지식인으로 대흥면 대접주, 6연승(회령진성·흥양현·벽사역·장흥부·강진현·병영성) 주역, 석대들 전투 참여 후 체포·총살
* 이사경: 석대들 전투 핵심 지휘관으로 농민군 부대 이끌고 관군·일본군과 맞서 싸움
* 구교철: 석대들 항쟁 부대 지휘, 전투 후 밀려난 동학군 재집결 노력
* 김학삼: 석대들 전투 참전 지휘관으로 후위 및 지원 역할 수행
* 최동린: (소년 장군)당시 17세.젊은 지도자로 석대들 패전 후 옥산·고읍천 전투 지휘, 체포 후 처형
* 윤성도: 15세 소년 뱃사공으로 600여명 동학군을 구한 영웅으로,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야밤에 동학군을 배로 섬(생일도, 금일도, 약산도)으로 실어나른 인물

장흥의 동학혁명은 1894년(갑오년) 전라도 지역에서 전개된 동학군의 최후 격전지로, 외세 침략과 조선 정부의 부패에 맞선 항쟁의 상징입니다. 이 지역은 전국 동학혁명의 4대 전적지(황토현, 우금치, 황룡, 석대들) 중 하나로, 수만 명의 동학군이 모여 일본군·관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1894년 봄 장흥에 동학 교세가 확산되면서 각지에서 패한 동학군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방언, 이인환 등 장흥 대접주들이 이끌고 12월 4일 벽사역을 기습 점령한 데 이어 장녕성(장흥부사 처형), 강진성, 강진병영을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동학군의 여세를 몰아 영암 진출을 노린 작전이었습니다
일본군(미나미 소지로 대대장 등 250명)과 관군(120명)이 장흥으로 집결하자 동학군 3만여 명은 석대들 전투(12월 15일)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화력 열세와 배후 공격으로 2시간 저항 후 무너졌으며, 수백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어 옥산 전투(17일)에서도 고읍천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부용산, 천관산 등으로 피신했습니다.
지도자로 이방언(남도장군), 최동린(소년 장군), 윤성도(뱃사공) 등이 활약했으며, 김재계(후일 3·1운동 주도자)의 어린 시절 증언이 전투 상황을 생생히 전합니다. 장흥은 동학혁명의 반봉건·반외세 정신이 최후까지 이어진 곳으로, 국가 사적 제498호로 지정되어 기념관과 유적지가 보존되었습니다.

특히 이소사(여성 선봉장/당시 22세)는 말을 타고 장흥부 함락 지휘, 석대들 전투에서 선봉 역할로 활약했는데 그림 속의 이소사는 여성 홍의장군 같기도 하고 장흥판 잔다르크 같은 이미지입니다.
특이한 것은 동학군도 전투에 임하면 군대처럼 조직되고 싸워야하는데 여성과 소년이 지휘층에 있다는 점입니다.여성이든 소년이든 능력이 있으면 인내천 그대로 하늘이 된 것으로 장흥이라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대목입니다.장흥(長興)…이름 그대로 길게 흥할 곳입니다.

517M의 억불산 아래 탐진강 젓줄로 펼쳐진 석대들을 바라봅니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1894년 12월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격전으로, 전봉준 체포 후에도 지속된 항쟁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동학군 3만여 명이 일본군·관군 연합부대(약 370명)를 상대로 벌인 전투로, 화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저항을 펼쳤는데 눈에 선한 듯 그때의 긴박함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통상적으로 동학혁명이 우금치 전투에서 끝났다고 알려진 것은 잘못된 인식이며 혁명의 마침표는 가장 치열했던 석대들 전투에 찍어야 합니다.
연대별 주요 과정
12월 3일: 장흥 대접주 이방언 중심으로 동학군 모집 시작, 벽사역 기습 점령 및 장흥부사 처형으로 장녕성 함락.
12월 4~11일: 강진현·병영 공격 성공, 화약고 폭파 및 관군 전멸로 세력 확대. 일본군·관군(미나미 소지로 등) 나주·능주 경유 장흥 집결.
12월 12~13일: 조양(남문 밖) 전투 발발, 동학군 수천 명 패배 후 어산촌 후퇴. 관군·일본군 추격으로 20여 명 포살.
12월 15일: 석대들 본격 전투. 동학군 선제공격(장녕성 북서 산봉우리) 후 배후 공격 당해 들판 유인, 2시간 사격전으로 수백 명 희생·대포 4문 상실 후 붕괴.
12월 17일 이후: 옥산 전투(고읍천 3~4시간 공방) 패배, 동학군 4~5천 명으로 줄어 부용산·천관산 피신. 20일·29일 경군 증원 도착으로 소탕.
▷ 장흥동학군 묘지 (장흥공설공원묘지 4구역)

▷ 천도교 장흥 교구
장흥교구는 천도교(동학의 후신)가 1906년 4월 동학혁명 후예 강봉수 등에 의해 장흥군 교촌리(장흥향교 인근)에 설립한 지역 교구로,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며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18호로 지정된 장흥교당은 1917~1918년 재건되었으며,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교육 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했습니다.
동학혁명(1894) 말기 장흥 석대들 전투 등 최후 항쟁 후 살아남은 동학도들이 천도교로 재편되며 1906년 교구를 세웠습니다. 김재계 선생 등 교구 인사들이 주도한 모금으로 초가 교당을 건립, 이후 일제강점기 사회·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장흥교구는 1919년 3·1운동 주도(김재계 등 체포), 신간회 장흥지회 사무실 사용, 무인멸왜기도 등 일제 반항의 중심이었으며, 지역 청년·문화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석대들·영회당 등 장흥 동학 유적군과 연계되어 동학농민혁명의 후속 항쟁 의의를 보여줍니다

▷ 장흥 향교
장흥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현유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 유교 교육 및 교화를 목적으로 창건된 전통 향교로, 600여 년간 장흥 지역 유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인조 8년(1630년)에 중수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향교 앞에는 다양한 비석들이 있는데 척사윤음비(斥邪綸音碑)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조선후기 서학과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전통 문화를 수호하라는 국왕의 윤음(綸音)을 비석에 세긴 것으로 당시 사회상과 종교 관련 내용을 파악할 자료로 가치가 높습니다. 윤음(綸音)은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훈유(訓諭)나 명령문서입니다.

장흥향교의 은행나무는 명륜당 앞 외삼문 양편에 우뚝 선 약 400~500년 수령의 고목 두 그루로, 조선 중종 때 진사 백문순이 식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 (수령 450여년)|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산서마을 입구에 자리한 약 400~50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제481호(2007년 지정)로, 세 그루의 후박나무가 한 무더기로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 수관을 이루는 희귀한 노거수입니다. 높이 11~13m, 가슴높이 둘레 최대 3.2m 규모로 내륙에서 드물게 큰 후박나무 군락이며, 마을 당산나무로서 민속적·학술적 가치를 지닙니다

▷ 독립자금헌성기념탑
장흥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은 일제강점기 장흥군 회진면 명덕리(덕도) 주민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공덕을 기리는 기념탑으로, 손의암 도주(손병희)의 교령에 따라 235명의 의사들이 헌신한 업적을 기념합니다. 2006년 덕도 신덕리 동구에 지역 주민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천도교 신도들의 독립자금 모금 운동을 상징하는 장흥의 보훈 유적입니다.
235명 헌성자 명단을 새긴 비석은 지역 주민들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역할을 하며, 장흥의 '문림의향' 전통을 보완하는 항일 유산입니다.
기념탑 보존 회장님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고 이곳이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와 그의 부친인 한승원 작가의 집도 이곳에서 산쪽으로 손짓하며 소나무와 대나무가 보이는 아래쪽에 집이 있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한승원과 한강 작가는 전라남도 장흥 출신의 대표적 문인으로, 장흥의 문학적 풍토와 '문림의향(文林義鄕)'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 영회당
동학군이 견고한 장흥부의 동헌(장흥성)을 점령하자 주변 관료들은 모두 도망갔지민 장흥부사 박헌양은 "나라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 내가 도망갈 수가 있느냐"며 96명의 병졸과 함께 성을 지키다 전원 사망했습니다. 영회당은 장흥읍성 방어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과 장졸 95인을 기리는 사당으로, 관군의 충절을 상징하는 유적입니다. 동학군의 장흥성 침공에 맞서 순절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898년 건립되었으며, 순무사 이도재가 '영회당'이라는 명칭을 내렸습니다.
영회당(永懷堂)...懷(품을 회)는 품는다,임신한다,생각한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극에서 회임(懷妊)이라는 말이 나오면 임신했다는 의미입니다.아마도 여기서 영회당의 의미는 영원히 생각한다.즉 영원이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판단됩니다.

영회당을 보면 3.1. 지식인 지도자 이방언과 김한섭의 비극이 오버랩됩니다.장흥 동학혁명의 비극은 동문수학한 두 지식인, 이방언과 김한섭의 대립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 이방언: 당대의 모든 대유들과 교류한 저명한 유학자였으나, 주자학적 정통주의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 그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지금 우리의 인간 세상을 구할 길이 없다"며 민족의 멸망을 막기 위해 '인간 평등'과 '사인여천'을 내세운 동학을 받아들였습니다.
• 김한섭 (오남): 이방언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주자학의 길을 버리고 '천하의 몹쓸 학문'인 동학을 따르는 이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성군(守城軍)의 입장에 섰습니다.
• 비극적 결말: 두 친구는 결국 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김한섭은 동학군에게, 이방언은 동학군이 제압당한 후 장흥서초등학교 자리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3.2. 혁명의 도화선, 벽사역 사건으로 전국적인 혁명의 기폭제가 된 사건입니다. 벽사역을 관장하던 이용태가 금품을 수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이 사건은 단순한 '나쁜 군수 놈을 치워 달라'는 지역적 요구를 넘어, "이 정권을 갈아야 되겠다"는 혁명적 구호로 발전했습니다. 동학군은 "서울로 쳐들어가서 탐관오리들을 전부 갈아버리고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동학군과 장흥부사의 상황과 이방언과 김한섭의 사례에서 보 듯 이 사건은 '조선 민중이 서로 죽이는' 비극이었으며, 그 궁극적 책임은 일본군을 끌어들인 고종입니다.
석대들과 영회당 두 곳을 모두 돌아본 것은 동학과 관군의 대립 속 화해와 역사적 성찰의 장으로 보았고 다른 곳과 달리 장흥의 동학 유적군 전체에서 관점의 완전한 균형으로는 바라보지는 않지만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백성과 국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동학군을 보게 되고 민국이 아닌 제국의 임금인 고종과 일본군, 이후 대한민국의 기득권이었던 친일세력으로 인해 최근까지도 동학군을 탄압한 수성군의 희생이 더 높게 기려졌다고 봅니다.그동안 감춰졌던 역사들이 재발굴되고 다시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는 계기는 느리지만 국민의 시각으로 정권의 추가 바뀌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 남미륵사
남미륵사는 강진에 위치하고 있지만 장흥과는 거리가 6km 정도로 가깝습니다. 남미륵사는 장흥 인근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풍동리에 위치한 현대 사찰로, 1980년 석 법흥 스님이 창건한 세계 불교 미륵대종 총본산입니다. 장흥을 지나 강진으로 가는 국도 2호선 근처에 자리 잡아 장흥 동학 유적 탐방 후 방문하기 좋은 장소로, 동양 최대 규모의 황동 아미타불상과 다양한 불상·석탑이 특징입니다.

조선말 정약용은 제도를 개혁하여 조선을 연장하려고 했고 서유구는 생활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최제우는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습니다.제가 오늘 둘러 본 장흥은 강진 바로 옆입니다.강진하면 떠오른 정약용의 시가 있습니다.
'애절양(哀絶陽)'....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목격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시 '애절양'은 이 시대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갓 태어난 아기에게 군포(軍布)가 부과되자, 이에 절망한 아버지가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잘라 항의한 참혹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세도 정치 하에서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은 극에 달했고 국가 시스템은 완전히 썩어 민중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학자인 정약용과 서유구는 개혁으로 지옥의 세상을 연장하려고 했습니다.
임금의 세상,일본군의 세상......그러나 동학혁명으로 30만명이 죽으며 촉발된 그 민중의 힘은 결국 3.1운동과 임시정부,군부통치를 지나 문민정부로 이어졌고 참여정부와 지금은 "국민주권"정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국민주권 시대를 염원합니다.
(전제왕권->식민지 지배->민중봉기->민족자결->권위주의->민주화 전환->참여 민주주의->주권 민주주의) ...불과 130여년만에 권력이 왕에서 국민으로 넘어왔습니다.
한승원 작가와 한강 작가..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유는 바로 장흥에서 살았고 두 작가는 장흥향교 은행나무, 천도교 장흥교구 등 지역 유적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장흥은 그들의 출생지이자 창작 배경으로 문림의향을 현대 문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는 장흥의 역사·문화가 현대 문학 거장 배출의 토양임을 증명합니다.동학군의 전라도 최후 항쟁지인 장흥의 3만명의 죽음이 결국 한강 작가가 말한 "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살릴 수 있는가"라는 화두가 광주민중항쟁을 지나 평생의 화두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장흥에서 많은 것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長興血淚照蒼旻
東學餘燼啓民魂
海上孤燈傳義氣
人天同體續乾坤
장흥혈루조창민
동학여신계민혼
해상고등전의기
인천동체속건곤
- 仙文 金永漢

장흥의 피눈물, 하늘을 비추고,
동학의 남은 불씨, 민중의 혼을 깨운다.
바다 위의 외로운 등불, 의기(義氣)를 전하고,
사람과 하늘이 하나 되어 천지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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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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