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석탑에서 시작하여 이장곤의 의리가 여전히 머무르는 금호재까지
—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소설 내용처럼 이장곤과 봉단은 임꺽정의 부모일까?
오늘 탐방은 창녕의 3층석탑이 품은 불교 미학에서 시작해, 통도사 포교당(통도사의 지역 포교 역할로서, 신라시대의 유적지 인왕사 터를 배경으로 한 전통적 맥락을 가짐)을 지나 창녕박물관의 이야기와 금호재의 묘소에 이르는 순환은 하나의 문화유산 잡사로 엮이는 여정입니다. 각 장소는 서로 다른 시대와 주제를 품고 있지만, 모두가 우리의 뿌리와 맥락을 묻게 하는 연결고리입니다.
숭고한 석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3층석탑은, 우리 삶의 덧없음 속에서도 형상으로 남아 있는 시간의 기록입니다.창녕 포교당은 지역 사회와 불교의 만남이 만들어낸 생활의 흔적을 보여주며, 지성의 흐름이 어떻게 공간을 채워 가는지 생각하게 합니다.창녕박물관은 발굴된 이야기들을 현장 밖으로 꺼내어 지역의 정체성과 변화를 다층적으로 제시합니다.금호재의 묘소는 개인의 삶과 가족의 기억이 어떻게 공간과 대를 잇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오늘 탐방은 올해 마지막을 보내는 시간 속에서 지나온 시간의 문의를 열고 현재의 맥락으로 이어주는 작은 여정이 되었습니다.
- 일시: 2025-12-31 08:00 ~14:00
- 날씨: 맑음
- 몇명: W와 함께
▷ 답사일정(風輪) :200km
술정리 동 3층석탑 -> 창녕 포교당 -> 창녕박물관 -> 금호재 ( 금헌 김장곤 묘소)
술정리 동 삼층석탑:(국보 제34호):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창녕 통도사 포교당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창녕박물관: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 금호재: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 265
▷ 술정리 동 삼층석탑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의 조형 감각을 잘 보여주는 국보급 석조 불탑으로 도심 한가운데에서 이중기단 위로 단정하게 올라선 삼층의 몸돌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과 비견될 만큼 안정된 비례와 정교한 결구 수법을 자랑합니다.통일신라시대에 창녕 일대가 정치·군사적 요충지로 부상하던 시기의 불교 신앙과 왕실 후원을 반영하며 1962년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었고, 왕경 장인이 파견되어 세웠을 가능성이 클 만큼 완성도가 높습니다

▷ 창녕 통도사 포교당
통도사의 법맥을 잇는 작은 전통 사찰로, 지역 불교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1939년 창건 이후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 옮겨온 문화재 불상을 통해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특징입니다.법당(적멸보궁)에 봉안된 목조 석가여래 좌상은 조선 후기(1730년) 작품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이며, 원래 창녕 관룡사 삼존상 중 하나였습니다.6·25 전쟁 당시 화재로 관룡사가 소실된 후 1978년 청운 스님이 이 불상만 이운해 현재까지 안치되어 있습니다.

적멸보궁 건물 뒤에 진신사리탑이 있습니다.양산 통도사 축소판 같은 느낌이 듭니다.

▷ 창녕박물관
창녕박물관은 창녕 지역의 선사부터 가야·신라 시대 고분 유물을 중심으로 한 전문 박물관으로 교동·송현동 고분군 바로 옆에 위치해 현장 유적과 연계된 체계적 전시를 통해 비화가야 문화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가야·신라 고분 출토 유물(금귀걸이, 은제허리띠, 금동뿔잔 등 166종 276점)을 토기·마구·장신구·무구로 분류 전시하며, 중앙 모형관으로 고분 축조 과정을 설명합니다.야외전시장에는 청동기 석관묘, 고려 방형묘, 삼국 석실묘를 이전 복원해 교육 자료로 활용합니다.

박물관 내에 금헌 이장곤의 교지가 있습니다.

▷ 평지마을 물푸레나무 (경남 창녕군 대합면 평지리 632번지)
금호재로 가는 길에 수령 150년된 평지마을 물푸레나무를 보았습니다.마을에서 당산나무로 모시는 왕버들 2그루는 수령은 오래되어 보이지만 보호수 지정은 아닙니다.

▷ 금호재
창녕 금호재는 조선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 이장곤 선생의 제향을 위한 재실로, 지역의 전통 건축과 인물 숭배 문화를 보여줍니다. 용흥사 부속 건물을 옮겨 재건한 이곳은 산자락과 저수지 사이에 자리해 자연과 어우러진 한옥 양식을 띕니다.솟을대문(태화문), 유정문, 강당(금호재 본채), 사당이 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화강암 축대와 담장이 안정감을 줍니다.원래 용흥사 부속 건물로 1695년까지 사용되다 1966년 현재 위치로 이전·재건, 흥선대원군 서원철폐 후 영암서원의 제향을 이어받았습니다.

금호재 우측 파밭너머 대나무 터널 길을 따라 북동쪽 1km 지점에 이장곤 선생의 묘소가 함께 자리합니다.
▷금헌 김장곤 묘소
이장곤(李長坤) (1474~1519)은 호가 금헌(琴軒)으로 알려진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그는 벽진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연산군 시기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도주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474년(성종 5년)생으로, 1495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문과에 출사했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로 유배된 후 함흥으로 도주해 백정의 딸과 결혼하며 은거 생활을 했으나, 중종반정 후 복관되어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습니다.
1512년 여진족 침략을 격퇴하고, 1514년 명나라 정조사로 파견되었습니다. 학문과 무예에 모두 뛰어났으며, 영조 때 기묘명현으로 추인되어 시호 '정도(貞度)'를 받았습니다.
맨 먼저 금헌 이장곤 묘도비가 보이고 뒤로 고리백정 봉단(정경부인중화양씨지묘)의 무덤 뒤로 이장곤 부부의 묘가 보입니다.

금헌 이장곤의 한시 송별도해제입니다.
바다를 건너가는 아우와 이별하며(送別渡海弟)
여주(驪州) 여강(驪江) 강가 우만(祐灣)에서 이장곤(李長坤,1474~1519)
태어나서 이 세상에 함께 사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으랴 / 생동일세녕비행(生同一世寧非幸)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한 몸에서 나누어진 사람인데 / 황아어군일체분(況我於君一體分)
백발가를 큰소리로 부르며 지는 해를 바라보니 / 백발고가간낙경(白髮高歌看落景)
망망한 넓은 바다에는 칼자국도 남지 않는 듯하네. / 망망창해검무흔(茫茫滄海劒無痕)

이 시에서 이장곤은 형제 유대와 인생무상을 함께 배치하여, 떠나는 이를 축복하면서도 세속 풍진 속에서 각자의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비애를 드러냅니다.
금헌 이장곤의 글씨는 병조판서답게 필체가 호방하고 기세가 좋으며 거침이 없으면서도 정돈된 느낌입니다.
금헌 이장곤이 백정의 딸과 혼인한 이야기는, 거제 유배와 탈출·함흥 도피·중종반정 이후의 재등용까지 이어지는 설화 형식으로 전해지며, 사료에 자세한 정사는 남지 않았지만 민간 설화와 야담, 후대 기록에 반복 등장합니다.
거제 유배와 도망자 신세
1504년 갑자사화로 이장곤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연산군이 그를 잡아 죽이려 한다는 낌새를 보고 나졸과 금부도사까지 대항하며 탈출해 함경도 쪽으로 도망칩니다. 도망자 신분이 된 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북방 지역, 특히 함흥 일대로 몸을 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함흥의 고리백정 집안과의 인연
설화와 야담에 따르면, 함흥에 도착한 이장곤은 어느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젊은 처녀를 만나는데, 처녀가 우물물에 버들잎을 띄워 보낸 것(왕건과 같은 이야기로 이런 클리셰는 처녀의 현명함을 상징)을 인연의 징표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처녀는 소·돼지 같은 가축을 잡고 버드나무로 바구니를 엮어 파는 ‘고리백정’ 양주삼의 무남독녀 봉단으로, 신분상으로는 양수척·백정 계층에 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장곤은 신분을 숨기고 이 집에 머물며, 생활력 있고 어질게 살림을 꾸려 가는 봉단에게 마음을 두게 됩니다. 한 설화에서는 우물가에서 첫눈에 반한 뒤 곧장 그 집을 찾아가 “처녀가 띄운 버들잎을 인연으로 여기고 청혼하러 왔다”고 말해 혼인이 성사되었다고 전합니다.
양반과 백정의 결혼, 그리고 의리
조선의 법제와 신분제 아래에서 양반과 천민(백정)의 혼인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는 도망자 신분으로 신분을 숨긴 채 양주삼 집의 사위가 되어 백정들과 섞여 사는 삶을 택합니다. 이 때문에 유기나 고리 만드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해 집안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았다는 야담도 있으나, 봉단은 묵묵히 그를 감싸며 살림을 꾸렸다고 전해집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사면이 내려진 뒤, 이장곤의 신분과 과거 경력이 드러나면서 그는 다시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제수받게 됩니다. 이때 이장곤은 중종에게 자신이 천인 출신 아내와 살고 있다는 사실과, 곤궁할 때 자신을 숨겨주고 보살펴준 인연을 끝까지 버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정경부인 중화양씨지묘
봉단을 ‘정경부인’으로 세우는 장면
법제로는 양반과 천민의 혼인을 인정하기 어려웠으나, 설화에 따르면 중종은 그의 의리를 높이 사 “곤궁할 때 지켜준 그 아내를 버리면 그대는 더 이상 충의로운 신하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꾸짖고, 오히려 그 아내에게 정경부인의 작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후대 글에서는 “백정의 딸을 정경부인으로 삼게 한 임금의 결단” 또는 “백정의 딸을 버리지 않은 의리의 사나이 이장곤”이라는 표현으로 이 장면을 강조합니다.
이후 봉단은 신분상으로는 천인 출신이었음에도 병조판서 부인, 즉 정경부인으로 예우받았다고 전해지고, 이 부부의 이야기는 ‘고리백정의 사위 병조판서 이장곤’이라는 제목으로 각종 야담·강연·대중 매체에서 반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보면 임꺽정은 식민지시대에 발표된 한국 소설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대하소설입니다.이 작품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각1권씩과, 「의형제편」 3권, 그리고 말미가 미완으로 남은 「화적편」 4권을 포함하여 전10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소설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지는 것이 봉단편으로 봉단은 바로 이장곤과 결혼하여 나중에 창녕에 묻히게 되는데 봉단의 묘는 이장곤의 묘 앞 정경부인 중화양씨지묘(貞敬夫人 中和楊氏之墓)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금헌 이장곤 부부묘
임꺽정 설화와의 연결
또 다른 흥미로운 갈래로, 일부 전승에서는 봉단의 외사촌이 임돌이며, 임돌의 아들이 소설과 설화로 유명한 의적 임꺽정이라고 설정하여 두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이 계통의 이야기에서는, 백정 집안과 양반 출신 사위, 그리고 임꺽정 가계가 한 족보처럼 엮여 조선 전기 신분질서와 민중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서사로 재구성됩니다.
요약하면, 백정 딸과의 혼인 이야기는 정사보다는 야담과 설화의 층위가 강하지만, 사화의 피바람 속에서 도망자였던 양반이 천민 집안에 숨어들어 그 인연을 죽을 때까지 저버리지 않았다는 ‘의리’의 상징으로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회자되었습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소설의 줄거리를 보면 연산군의 폭정 속 양반 이장곤(교리)이 귀양길에 봉단(백정 딸)과 결혼해 임꺽정을 낳고, 중종반정 후 창녕에 정착하나 임꺽정은 부모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백정 신분의 차별로 범죄를 저지르며 청석골 화적으로 성장합니다.피장 편에서 동료들과 모임을 이루고, 의형제편에서 칠장사에서 6두령과 의형제를 맺으며 대규모 화적패를 조직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이장곤과 임꺽정 사이에 부자 관계는 확인되지 않습니다.이장곤(李長坤, 1474~1519)은 조선 전기 벽진 이씨 문신으로 연산군 시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 유배 후 탈출해 함경도 함흥에서 백정 딸(봉단, 정경부인 중화양씨)과 결혼한 실존 인물입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이장곤은 임꺽정의 아버지로 설정되어 봉단의 조카(임돌 아들) 임꺽정을 외손자로 연결짓는데 이는 야사와 설화를 바탕으로 한 픽션으로, 실제 임꺽정(林巨正)은 명종 때 양주 백정 임돌의 아들로 기록되며 이장곤과의 혈연은 전해지지 않습니다.즉, 소설적 창작입니다.역사적 사실은 이장곤은 중종반정 후 병조판서까지 올라 창녕에 묻혔으나 임꺽정(사망 1562)의 탄생(약 1530년대) 시기와 맞지 않아 부자설은 불가능합니다.민간 설화에서 천민 부인과의 의리 있는 삶이 임꺽정 이야기와 융합되어 소설화되었습니다.
▷금헌묘석상(경남 유형문화재 제296호)
이장곤 부부묘 뒤에 금헌 묘석상이 보이는데 생김새는 제주도의 돌하루방처럼 생겼고 특이 한 것은 장검이 아닌 철퇴를 쥐고 있는 모습입니다.

술정리 삼층석탑의 고요한 균형에서 창녕박물관의 가야 숨결, 금호재와 이장곤 묘역이 품은 의리의 서사까지, 오늘 여정은 시간의 켜를 따라 걸으며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한 뜻 깊은 답사였습니다.
탕방을 마무리하며 금헌 이장곤에 대한 노래를 읊어봅니다.
李將坤義頌 - 仙文 金永漢
臨難堅心不改誠 임난견심불개성
流離北地隱其名 유리북지은기명
井邊浮葉傳奇緣 정변부엽전기연
白丁娥女結終生 백정아녀결종생
貴賤之間存厚義 귀천지간존후의
君臣之外見孤情 군신지외견고정
中宗嘉嘆忠臣意 중종가탄충신의
義烈千秋照史靈 의열천추조사령

臨難堅心不改誠 난세 속에서도 마음을 굳게 지켜 성심을 잃지 않았고,
流離北地隱其名 북쪽 땅으로 흘러 숨어 살며 이름을 감추었다.
井邊浮葉傳奇緣 우물가에 띄운 버들잎이 전설의 인연이 되어,
白丁娥女結終生 백정의 딸과 평생의 정을 맺었다.
貴賤之間存厚義 귀천을 넘어 깊은 의리가 있었으며,
君臣之外見孤情 신분을 넘어 순수한 인정이 드러났다.
中宗嘉嘆忠臣意 중종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義烈千秋照史靈 그 의로운 이름은 천추에 역사에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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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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