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달구벌 대구엔 경주의 월성 같은 달성이 있다
- 일시: 2024-2.17~18
- 날씨: 새벽엔 영하2도였지만 낮은 대체로 따듯
- 몇명: 홀로
대구는 보수의 수도이고 광주는 좌파의 수도처럼 느껴지지만 원래 좌파의 수도는 대구입니다.5.18광주 민주화 운동 이전에 4.19혁명이 있었고,4.19는 3.15 부정선거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그 시작은 2.28 민주화운동입니다.해방 직후 대구에서 10월 항쟁으로 친일파 청산의 목소리가 가장 컸던 도시이며 1907년 무능한 조정을 대신하여 일제에 진 빚을 민중이 십시일반하여 국채보상운동이 펼쳐졌는데 꼭 90년 뒤 IMF당시 시민들의 금모으기 운동으로 연결됩니다.
조선말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사도난정,혹세무민의 누명을 쓰고 처형된 곳인 관덕정 자리에 순도비가 있으며 그 외에 일제강점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저항시인 이상화,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런 이육사 ,사법살인이라는 오명을 쓴 인혁당 사건의 속을 들여다보면 백호대살 해인 갑진년(1964년) 대구지역 교사들의 자발적 공부 모임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사건입니다.그리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고향도 대구입니다.
▷ 답사일정(風輪) :247km
신숭겸장군유적지-대구박물관-경상감영공원-최제우순도비-달성공원
2024-2-17
▷신숭겸장군유적지
대구는 부산에서 가깝기 때문에 밤 10시쯤 늦은 시간에 부산을 출발하여 대구에 11시 조금 지난 시각에 도착했습니다.
(일박)
2024-2-18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은 원래 공산이었는데 신숭겸을 비롯한 고려개국공신 8명을 뜻하여 팔공산이 되었다고 합니다.그 외에도 대구의 지명은 왕건과 연관이 많습니다.
군위는 왕건이 이곳에서 군사 사열을 받았는데 위세가 좋다하여 지어진 지명이고,지묘동은 신숭겸의 뛰어난 지혜와 묘책으로 왕건을 구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반야월은 왕건이 견훤에세 쫒겨 한밤중에 도착하니 달이 중천에 떠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그외에도 안지랑,불로동,무태,안심,달비골도 왕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 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입니다.고려개국의 1등 공신인 신숭겸 장군은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의 기병장수였습니다. 그런데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동료 기장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습니다. 고려 태조 10년(927)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였고 왕건이 이곳 공산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왕건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왕건을 그 틈을 이용하여 홀로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왕건은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춘천인 광해주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뤘으며 신숭겸이 순절한 이곳에 순절단과 지묘사(미리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고, 토지를 내려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합니다.사진은 순절단(殉節壇)의 모습입니다.
▷대구박물관
박물관은 9시에 개관을 하기 때문에 야외의 석조물을 먼저 살펴봅니다.4층석탑이 있어서 근처에 가보니 원래는 5층석탑인데 가장 위쪽의 옥개석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우리나라는 삼수문화로 1,3,5,7,9 등 홀수를 중시합니다.삼재사상이 탑에도 나타나는데 중국은 음양으로 이진수를 중시하여 중국의 탑은 짝수입니다.중국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8도 짝수입니다.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비틀고 있는데 원래 중국은 만리장성의 북쪽은 오랑캐 땅으로 보고 중국역사에 편입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중국영토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여 고구려를 비롯하여 부여,옥저,동예를 편입하여 왜곡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동이족과 관련있는 치우천왕도 중국의 시조로 편입하여 삼조당을 만들었습니다.그곳에 한민족의 조상인 염제신농씨, 치우천황, 그리고 중국 역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헌원과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사실 황제헌원도 동이족이었으니 중국의 시조는 동이족이 되는 것이고 중국의 한족의 뿌리는 하화족(夏華族, 화하족華夏族)인데 동북공정하듯이 시조를 공정하는 중국입니다.
중국과 한민족의 차이점들이 많은데 일단 언어측면에서 중국과 어순이 다릅니다.중국과 다른 한민족의 근원을 살펴보면 빗살무늬토기,성벽에서 튀어나온 치,유전자로는 고동북유형,옥기,적석총,고인돌,비파형동검,온돌,개마무사,밑받침 없는 동복,편두,순장풍습,마늘과 쑥을 약재로 사용한 점,호형대구,각궁,철제마갑등을 들 수 있습니다.그래서 일정시대의 서요하지역의 요하문명은 중국문명이 아닌 고조선문명입니다.
한국어 기원은 9000년전 중국 동북부 요하의 농경민이라는 것을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의 마티너 로비츠 박사 연구진이 “언어학과 고고학, 유전학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한 결과 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트랜스유라시아 어족(語族)이 신석기 시대에 중국 랴오강(遼河,요하)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이주 결과임을 확인했다”고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밝혔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일정시대의 서요하지역의 요하문명(홍산문화-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이 곧 고조선문명이 더 확실해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지금까지는 그보다 훨씬 뒤에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전 세계로 이주하면서 비슷한 체계를 가진 언어들이 퍼졌다고 알려졌었는데 잘 못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언어학과 고고학, 유전학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한 결과"입니다.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기사내용 more)
https://youtu.be/Fh6ihH7FjZ0?si=FY49TLUPzWyYAYZJ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입니다.고려 현종 22년에 세운 탑으로 맨 위층 지붕돌이 사라져 지금은 4층처럼 보입니다.기단부 바닥돌 명문이 보이는데 "특별히 국가가 항상 편안하고,전쟁이 영원히 그치며 백곡이 풍성하게 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탑을 공경하여 만들고 영원히 공양하겠습니다.태평11년(1031) 신미년 정월 일"의 내용으로 한자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대구박물관 입구에 당간지주를 복원해 두었는데 가장 위쪽은 용두의 모습입니다.
드디어 개관 시간이 되어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주 작은 반가사유상이 보입니다.
당간지주의 용두 실물이 있는데 생각보다는 큽니다.용두 턱 속에 도르래가 달려있습니다.
우리나라 한복의 모습도 보이는데 일상속의 옷이 아니라 예술작품처럼 느껴집니다. 한복조차 중국의 것이라는 지경이니 시조를 공정하는 것을 보면 중국측에서 보면 이것쯤은 문제가 되지도 않겠지요.땅덩어리는 커서 대국인가 했는데 생각하는 소갈딱지는 소국이라 평균해서 중국이라고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딱 맞는 말입니다.
▷경상감영공원
경상감영(慶尙監營)은 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하에 경상도(慶尙道)를 관할하던 감영(監營)입니다.현대의 도청(道廳)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홍매가 핀 것을 보고 박제가의 위인부령화 한시가 떠올랐습니다.
爲人賦嶺花 위인부령화 - 박제가(朴齊家)
毋將一紅字 무장일홍자
泛稱滿眼花 범칭만안화
花鬚有多少 화수유다소
細心一看過 세심일간과
재를 넘으며 만발한 꽃을 바라보며 읊다.
'붉다'는 하나의 단어를 가지고
온갖 꽃 통틀어 말하지 말라.
꽃술엔 많고 적음 차이가 있으니
세심하게 하나하나 보아야 하리.
하늘 아래 똑 같은 꽃은 없습니다.그래서 '그냥 붉은 꽃'은 없습니다. 대상은 나와의 관계 속에서 특별해지는 것이기에 눈 앞에 꽃을 보고 그냥 붉은 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붉은 색이라도 꽃의 모양이나 빛깔ㆍ향기도 제 각각 다릅니다.
'그 소리, 그 빛깔, 그 향기'를 가릴 마음에 여유를 두어야 합니다. '붉은 꽃'이 내게 와 건네는 말을 알아듣게 되면 나는 '나의 소리, 나의 빛깔, 나의 향기'와 비로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 안에 홍매가 핍니다.나태주 시인이 조그만 풀꽃 하나라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한 말과 통합니다.
개인적으로 투자와 트레이더를 모두하는 삶을 살면서 숲과 나무 모두 살피는 것을 직업병처럼 여겨 특히 이 시가 마음에 듭니다.
절도사 이하는 모두 하마하라는 하마비입니다.
절도사이하개하마(節度使以下皆下馬)
절도비 좌측 건물이 선화당(관찰사 집무실로 임금의 덕을 배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의 뜻)이며 뒤의 건물은 징청각(경상감영 관아에 부설된 처소)입니다.
▷최제우순도비
동아쇼핑과 현대백화점 사이에 있습니다.아주 거대한 닭 형상의 녹색 조형물 근처에 있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좌도난정(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주장으로 세상을 어지럽힘)죄목으로 이곳에서 1864년 효수되었습니다.제가 태어나기 딱 100년전이었군요.
제 차가 커서 이곳 근처는 주차 할 곳이 없어서 경상감영공원 근처 우체국 옆 사설 주차장에 주차하고 이곳까지 걸어 왔습니다.
▷달성공원
달성(達城)은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만든 토성입니다.규모는 약 380M,남북 약470m로 전체길이는 1,300m입니다.전체 모습은 오각형에 가깝고 우리나라 경주 월성과 형태가 유사한 평산성입니다.
달성은 청동기 시대 부터 지역의 중심을 이루던 집단이 그들의 생활근거지를 이용하여 쌓은 토축성으로 여러차례 중,수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달성이 지금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05년이고 그후 일제의 침략수행과 식민지 지배의 일환으로 1914년 대구신사가 이곳에 세워졌으나 1966년 8월에 신사건물을 해체하고 공원 내부를 정비하여 오늘과 같은 동물원 겸 공원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수운 최제우 동상이 있습니다.(대신사수운최제우상)
뒤로 관풍루가 보이는데 원래 관풍루는 경상감영 선화당 남쪽 정문인 포정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었는데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진 것입니다.현재 누각은 복원 된 것입니다.
(홍매 꽃잎을 먹는 직박구리)
달성서씨 유허비가 보입니다.달성 서씨하면 저는 풍석 서유구가 떠오릅니다.
정약용,서유구,최제우는 조선후기 동시대 사람입니다.
생몰연대를 보면 정약용이 서유구보다 2살 많고,정약용은 최제우보다 62살 많지만 정약용은 74세를 살았고 서유구는 81세를 살았으며 최제우는 40살을 살아 정약용과 최제우는 12년 겹치는 시기가 있습니다.
정약용 (丁若鏞, 1762년 ~ 1836년),
서유구 (徐有榘, 1764년 ~ 1845년),
최제우 (崔濟愚, 1824년 ~ 1864년)
정약용은 "조선의 제도 개혁"을 꿈꾸웠고,서유구는 "사대부 일상" 개혁을 꿈꾸었지만 최제우는 개혁이 아닌 "혁명"을 꿈꾸었습니다.다산 정약용은 조선 최고의 스타인 반면 풍석 서유구는 조선의 무명스타입니다.정약용은 18년이라는 정치적 유폐기를 거쳤고 서유구도 18년 정치적 공백기를 가졌습니다.두 분 모두 초계문신입니다.다산 정약용이 한미한 집안이었다면 풍석 서유구는 대구(달성)서씨의 후예로 최대문벌 출신으로 다산이 문제적 모범생이라면 풍석은 모범생 그 자체였습니다.
정약용은 이상적 통치 목표 ´경학·경세학´ 몰두했고 서유구는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지식은 외면했습니다. 다산은 농사를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했고 풍석은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닌 체험으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습니다. 풍석은 이상을 추구하되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습니다.
실현할 수 없는 지식은 ‘토갱지병, 즉 흙으로 끓인 국 즉 토갱(土羹)이요, 종이로 만든 떡 즉 지병(紙餠)이라 비판하고 이상적 기준을 제시하고서 현실을 이상으로 밀고가려 했던 다산의 방법론과는 대조적입니다. 풍석의 이용후생론은 바로 이런 실용학이었습니다. 풍석의 평생 역작 ‘임원경제지’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개혁은 일상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게 풍석의 신념이었습니다.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 후기에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론을 편 실학적 농촌경제 정책서로 16부분 52책 113권의 방대한 분량인데 풍석 서유구 홀로 펴낸 백과전서로 실로 놀랍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는 정약용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약용의 애절양 한시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哀絶陽 丁若鏞 ]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통곡소리 그칠 줄 모르고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청문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이 시는 1803년 어느 백성이 자신의 양근(陽根)을 끊은 것을 슬퍼하며 지은 시로, 당시 심각한 군정(軍政)의 문란을 노래한 다산의 대표적인 사회시(社會詩) 중 한 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해가는 조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제가 유지되도록 조선의 사대부로서 노력을 한것입니다.
그에 비해 수운 최제우는 이미 조선은 죽었다고 보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고 혁명을 했습니다.
달성공원 안쪽 좌측으로 가면 테니스장이 나오는데 테니스장 근처에 대구신사 도리이 유적이 있습니다.테니스장 바닥을 고르는 롤러도 도리이(일본어: 鳥居 とりい) 의 기둥으로 보입니다.
대구 달성공원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면 부산은 용두산공원에 있었습니다.달성공원내 대구향토역사관 내부로 가면 과거 대구신사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테니스장 근처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보면 대구신사에 사용되었던 석재물이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일겁니다.
일본 때문에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났지만 사파현정으로 달성공원 내 일본신사는 없애버렸고 관풍루 근처에 수운 최제우 동상이 들어섰다는 점을 보면 시련은 있어도 옳은 가치는 죽지 않고 민중의 마음속에서 지속되며 이후 3.1운동,5.18민주화운동,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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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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