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평안한 새로운 세상의 꿈을 함께 꾼 사람들이 힘을 모아
- 일시: 2023-12.23~25
- 날씨: 대설주의보였으나 도로사정은 원만
- 몇명: 홀로
무안(務安)...."힘쓸 무,편안 안"이니 "평안한 세상을 위해 힘을 쓰겠다"는 의지가 담긴 지명입니다.이곳은 전라 서남부지역 동학의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무안에서도 주로 다닌 곳은 몽탄면인데 몽(夢)은 "꿈"이고 탄(灘)은 "여울"입니다. ‘여울’은 보통 ‘개여울’로도 부르는데 한자로 표현하면 灘(탄)이 됩니다. "시냇물, 또는 하천에 실려 내려온 흙이나 돌 등이 좁고 기운 지형에 쌓이면서 생긴 물의 길목"이고 다른 뜻은 "하천이 바다로 나아가는 하구에 토사와 자갈 등이 쌓여 생긴 너른 땅"입니다.몽탄을 이룬 강은 영산강으로 무안군 동쪽 경계를 흘러 남류하는 영산강입니다.그 영산강 유역의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몽탄면입니다.
몽탄,"꿈여울"이라는 지명도 예사롭지 않습니다.여울하면 1970년 정미조의 노래 "개여울"이 떠오르는데 그 가사는 김소월의 노랫말입니다.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라는 가사가 중간에 나옵니다. 김소월의 가삿말과는 달리 이곳 무안의 몽탄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않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꿈만 꾸지 않은 겁니다.함께 꾸는 꿈은 기적을 이뤄냅니다.행동하는 양심의 김대중 대통령은 신안군 하의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여러 섬들이 있는 곳이고 오늘 다녀 온 해제면 석산마을은 신안군의 지도읍과 같은 섬이었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695km
초의선사탄생지-청천사(동학집강소설치지)-인평공원 효자최공기실비( 孝子崔公記實碑)-동학혁명투사현창비(차뫼마을 차뫼경로당)-식영정-해주최씨삼의사실적비(석산마을회관)-무안초등학교-불무다리터(불무공원)-무안향교-무안약사석불입상-고막포전투지-나주역역사공원
대설주의보가 내린 상태이기 때문에 스노우체인을 구하고자 부산의 다이소를 비롯하여 몇곳 마트를 둘렀지만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부산지역이다보니 비치된 재고물품이 없습니다.겨울에는 북서풍이 불고 서해바다의 거칠 것 없는 환경이 호남 서해 바닷가 근처의 적설로 이어집니다.제가 사는 부산은 북쪽은 1차로 백두산이 막아주고 이후 위도로 첩첩히 가로막는 산맥이 있어서 차단되며 서쪽은 지리산과 소백산맥이 막아주니 별로 눈이 없습니다.
결국 고속도로휴게소에서 구할 생각으로 출발합니다.섬진강휴게소에서 구했는데 인터넷쇼핑몰의 2배 가격이지만 보험을 든다는 생각으로 부득불 구입했습니다.
▷초의선사탄생지: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 30
고속도로의 눈은 잘 치워져 있어서 무리없이 운행을 하였고,무안군 삼향읍으로 들어가니 제법 눈이 쌓여있어서 속도를 줄여 운행을 했습니다.미끄러짐이 없어서 체인을 감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멀리 압해대교와 삽진일반산업단지의 불빛이 횡으로 연결된 성탄트리 같습니다.
(내린 눈 밝게 빛나는 초의선사탄생지에 도착하여)
초의선사 선시
大道至深廣 如海活無尋 대도지심광 여해활무심
普作群有依 如樹覆凉陰 보작군유의 여수복량음
焉敢持不根 曾聞海潮音 언감지불근 증문해조음
況入君子室 共爲如實吟 황입군자실 공위여실음
月冷雪明夜 靜休諸緣侵 월냉설명야 정휴제연침
君看無生理 萬古卽長今 군간무생리 만고즉장금
대도는 지극히 깊고 넓으니 바다처럼 가없어 끝을 알 수 없네
보작에 중생들이 의지하는 것은 나무아래 시원한 그늘을 찾는
것과 같도다
신묘한 작용은 밝고 역력하니 굳이 이르자면 마음이라 일컫네
어찌 감히 무루근을 지녀 일찍이 해조음을 듣고서도
황망히 군자의 방에 들어서서 함께 진리를 읊조리겠는가
달빛 차고 내린 눈 밝게 빛나는 밤에 조용히 쉬고 있노라니
뭇 인연들 밀려오노라
그대 무생의 이치를 보았는가 만고의 세월도 결국 찰나일 뿐인 것을
(필사)
(일박)
2023-12-24
아침부터 눈이 많이 내립니다.우선 보통때보다는 늦게 출발합니다.초의선사탄생지는 눈 때문에 다선의 경지처럼 더욱 조용한 곳이 되었습니다.
▷ 청천사 집강소 설치지 : 전남 무안군 청계면 청천길 82 (청천리 488)
문이 잠겨져 있어서 들어가질 못했는데 춤추는 듯한 고목의 좌측에 큰 비석(청천사유허비)이 보입니다.동학집강소 설치지입니다.무안집강소가 설치된 이곳은 달성 배씨의 사당인 청전사(淸川祠) 뒤쪽 재각(재실:청천재)에 설치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을입구엔 팽나무와 개서어나무 숲이 있습니다.예전엔 이곳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였다고 합니다.배상옥과 동학군들은 집강소가 있었던 청계면 청천리 창포 포구에서 배를 타고 동학군의 민대들 연병장인 해제면 석용리와 해제면 임치진 무안 동학군 훈련 지휘본부를 수로를 이용하여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을 둘러보니 무안의 여기저기 동학과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습니다.그 중에서도 무안 대접주 배상옥은 무장의 손화중과 함께 가장 큰 세력이었는데 동학도가 5만~6만명에 이르러 전봉준과 김개남의 2배~5배가 되었다고 합니다.한마디로 배상옥은 잊혀진 영웅인 셈입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조선조정은 동학에 가담한 인물들을 배역자로 처단했습니다.그 가족들 역시 무자비하게 죽였고 동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성(姓)을 바꾸고 집을 떠났습니다.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동학의 괴수 ‘배상옥’이라는 이름은 입에 담으면 절대 안 되는 이름이 돼버렸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에 길들여진 학자들이 재평가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배상옥은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 라 불릴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주요지도자였습니다. 배상옥은 무안대접주였으나 영광과 함평, 무안, 장흥, 해남, 강진, 영암지역의 동학교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전남지역의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배상옥은 전주화약 이후 목포 진을 공격해 상당량의 무기를 확보하고 농민들을 무장시켰으며 삼향면 대월리와 해제면 석용리에서 동학군을 훈련시켰습니다. 대월리에서 실시된 훈련과 관련해 ‘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적산 일대에 동학군 초병이 지키고 대포를 설치하여 관군의 습격에 대비하면서 훈련했다’는 내용이 전해집니다.
후손들은 이후 배상옥의 시신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배상옥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무안 주민들은
“상옥아 상옥아 배상옥아 백만 군대 어디 두고 쑥국대(=사형장) 밑에서 잠드느뇨”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전해집니다.
▷ 효자최공기실비孝子崔公記實碑 :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649-2 (인평공원)
맨 우측의 하얀 비석입니다.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다가 관군에 체포된 최찬모가 잉어산에서 화형을 당하게 되자 아들 최윤삼이 불 속에 뛰어들어 아버지 대신 죽으려 했습니다. 이때 최윤삼은 한쪽 눈을 실명했고, 그의 효성에 감동한 관군이 최찬모를 살려줬다고 합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최윤삼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자최공기실비(孝子崔公記實碑)〉와 비각을 세웠으나, 현재 비각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 있습니다.
최찬모와 최윤삼이 살던 인평마을은 몽탄지역의 접주 김응문 생가와 그가 만들 무기제작소 터가 있는 차뫼마을 바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최찬모는 김응문 접주 휘하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안지역 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은 고막교 전투에서 배상옥이 이끄는 무안지역 농민군이 나주 수성군에게 패배하고 대접주 배상옥이 피신한 다음인 12월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규태(李圭泰)가 이끄는 좌선봉진군(左先鋒陣軍)이 무안읍에 도착한 것은 1894년 12월 11일이었지만, 이미 그 무렵 김응문(金應文) 형제를 비롯한 접주 및 지도자급 농민군이 70여 명이나 무안 수성군에게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서 30여 명은 무안 수성군이 이미 처형하였습니다. 무안지역 농민군은 선봉진이 무안에 들어온 다음에도 다수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일부는 구금되었습니다. 구금되었던 나머지 농민군과 이후 체포된 많은 농민군도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최윤삼의 아버지 최찬모도 이 무렵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동학혁명투사현창비 :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292-1 (차뫼길 28, 차뫼경로당)
김응문은 무안 대접주 배상옥과 친분이 가까웠고 몽탄면의 접주가 됩니다. 이곳은 다산(茶山)리인데 차뫼마을입니다.차뫼는 한자로 풀면 다산이 되니 다산의 순우리말이 차뫼입니다.차뫼는 뒷산 옥녀봉에 차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그러고 보니 이 곳엔 산과 관련하여 정겨운 순우리말 지명이 많이 보입니다.차뫼(다산),용뫼(용산),돌뫼(석산),배뫼(주산) 등......
김응문의 호는 다사(茶史)이고 그의 아버지 김광수의 호는 차은(茶隱)이었다고 하니 온통 차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김광수에게는 김응문(1849~1894), 김영구(김효문, 1851~1894), 김덕구(김자문, 1868~1894),김윤문(김학구) 등 4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록을 보니 그 중 3명이 같은날 처형을 당했습니다.현창비 뒤쪽에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김응문의 아들 우신(禹信)도 같은 날 무안형장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가사람들이 효수된 시신의 머리만을 수습해와 애기무덤을 만들었고 128년이 지난 2022년 4월 두개골을 그대로 발굴하여 정읍 동학농민혁명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김응문과 김효문 형제는 무안향교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안향교의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무안에서 신망이 높았다는 의미입니다.무안의 나주 김씨 장손이었던 김응문은 10칸이 넘는 집에 살면서 풍족한 생활을 했고 1894년 4월 둘째 동생 효문과 막내동생 자문과 큰아들 여정을 이끌고 동학혁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했습니다.
▷ 접주 김응문 집터/동학군 무기 제작지 :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265 (차뫼길 12)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첫집입니다.뒤로 옥녀봉이 보입니다만 흰눈이 이불처럼 덮었습니다.우측 헛간처럼 보이는 곳에서 무기를 제작한 곳으로 유추됩니다.
▷식영정息營亭 : 식영정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배뫼) 551외
조선시대의 정자로 영산강이 휘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나주임씨 한호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고 식영정은 승문원(承文院) 우승지(右承旨)를 지낸 한호(閑好)가 말년에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입니다.그는 조선시대인 1610년(광해군2)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16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여 영암군수, 진주목사, 남원부사 등을 지냈습니다. 이 정자는 그의 호인 한호처럼 한가로움을 좋아한다는 취지로 그림자가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식영정으로 불렀다고 전해집니다.안내판에는 식영(息營)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림자가 쉬어간다는 뜻이면 식영(息影),즉 "그림자 영影"자를 쓰야 할 것 같은데 "경영할 영營"를 쓴 것은 이상합니다.이곳은 배뫼인데 한자로는 주산(舟山)이 되겠네요.식영정이 배뫼의 꼭대기 돛 같습니다.
▷해주최씨삼의사실적비: 전남 무안군 해제면 동학길 79 (석용리 558, 석산마을회관)
주도로에서 마을안으로 1.2km더 들어가야하는데 중간쯤 갔을때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별다른 안내판이 없기 때문에 석산마을회관으로 입력하고 가면 됩니다.석산이니 이곳은 "돌뫼"이며 돌뫼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삼의사(三義士)의 죽음은 봉건제도 개혁과 나라를 위한 값진 희생이었다. 그러고도 패가망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해주 최 씨 후손들은 조상들의 애국정신을 열심히 교육하였고 생활이 어려웠을 때도 일본인에게는 전답을 팔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에서 농악 놀이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비문 일부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봉건국은 아니었고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국가였으니 그 부분은 고쳐야하겠습니다.
비문을 보면 동학혁명은 세계3대혁명으로 시작되어 있습니다.해주최씨 28대손인 최재익의 장남 민제 최장현(崔璋鉉, 1850~1894), 청파 최선현(崔善鉉, 일명 善泳, 1867~1894)은 장현의 동생, 춘암 최기현(崔寄鉉, 일명 炳鉉, 1866~1894)은 이곳 석산에서 태었났다"로 이어집니다.선현과 기현은 동학접주로써 동학농민군양성훈련을 지도하였으며 배상옥이 이곳을 찾아 동학군의 훈련을 지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고막포 전투에서 패한 후 은거하고 있을때 향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불의한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당한 끝에 1894년 1.2일 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장현의 둘째 15세의 원식이 체포당시 나주처형장까지 따라가 불더미 속에서 시신을 수습했다고 합니다.
동학군들이 드나들었던 포구는 현재 논으로 변해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봉대산이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방정각이라는 최근의 정자가 있고 고목 아래에 방정(芳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꽃다울 방芳"에 방년 18세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풋풋한 젊은이가 떠오릅니다.이 곳 우물을 마시며 동학군 훈련을 받은 곳입니다.
이곳엔 해주최씨삼의사실적비.방정이라는 동학샘.민대들 훈련장,유인박씨열행비가 있는데 삼의사가운데 한분인 최선현의 미망인 밀양박씨의 열행비(烈行碑)입니다.
앞에 보이는 들이 민대들입니다.둑을 막아 형성된 들입니다.
석산마을회관 앞에 돌뫼동에 대한 글이 보이는데 "언젠가 우리모두 돌아올 고향"이라는 글을 보니 이제 삼의사도 폭도가 아닌 의사로 재평가를 받아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무안초등학교: 전남 무안군 무안읍 면성2길 30 (現, 무안초등학교)
예전 무안관아 터입니다. 동학군 처형장소 중 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물무다리 터: 전남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127-21 (성남리 75-3 / 現, 불무공원)
동학군 처형지입니다.이 곳 이외 "붉은 고개"와 "차밭머리 터"에서 동학군 처형지로 봅니다. 불무다리는 불무제佛舞堤 저수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매립되어 불무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무안향교 :전라남도 무안군 향교길 20 (무안읍, 무안향교)
김응문 일가는 1880년대에 향교의 장의를 맡았고, 김영구는 1894년에는 향교의 재장을 맡았다고 합니다.경상도에서는 유학자들이 동학을 서학과 같다고하여 공격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향교에서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무안향교는 1394년 건립되었는데 조선의 개국이 1392년 8일이라는 점에서 볼때 무안향교는 개국후 1년반만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보입니다.
배상옥과 김응문 등 무안의 최고의 재력과 최고의 지성을 가진 분들이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은 이곳 무안을 다시 보게 됩니다.
오래된 향교에 어울리게 600년 된 보호수가 있습니다.
▷ 무안약사석불입상: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대사동길 15 (성동리)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약사사는 고려 태조 1년(918)에 남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하나 문헌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 위치에 있는 석불의 규모로 보아 이 자리에 고려시대부터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현재의 약사사 건물은 1972년 세운 것으로 왼손에 큰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불상의 뒷면에는 광배(光背)를 달았던 3개의 구멍이 있으나 시멘트로 막아 버렸으며, 지금의 광배는 최근 새로 깎아 만든 것입니다.
▷ 고막포 전투지 : 전남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 629
김응문 일가도 고막포 전투에 참여했고 동학군 수는 5만~6만 명, 수성군은 3,000여 명 규모였습니다.동학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대포와 소총 등 현대식 무기를 갖춘 수성군의 화력을 화승총과 시석(矢石), 죽창만으로 이길 수 없었습니다.
고막포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민보군에 쫓겼고 관군은 무안읍 ‘붉은 고개’(붉은 잔등), 청계면 창포 ‘바우백이’, 삼향면 ‘마갈잔등’ 등지에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했습니다. 붙잡은 동학군들을 무안읍 ‘불무다리’에서 처형하고 인근 ‘차밭머리’에서 시신을 겹겹이 포개어 불태웠습니다.또한 삼의사를 비롯해 13살 ‘소년 장수’ 최동린 등 783명 이상의 동학 지도자급들이 일본 정토군(동학 토벌대) 본부인 나주 순사청으로 압송돼 처형됐습니다.일본 동학토벌대는 동학 지도자급을 나주 순사청으로 압송하도록 지시한 후 총살, 돌살(突殺·착검하고 찔러죽이는 것), 타살(打殺), 소살(燒殺) 등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함평 고막천 석교는 보물 제1372호로 1273년(고려 원종 14) 무안 승달산 법천사의 고막대사가 도술로 이 다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목조가구식을 석조형태로 바꾼 보기 드문 돌다리인데 눈이 덮혀 자세히 볼 수없어 아쉬웠습니다.이 곳은 함평이며 강 건너 쪽은 나주입니다.
▷ 나주역역사공원: 전남 나주시 죽림길 26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용담유사에서 일본에 대해 "개 같은 왜적놈"이라고 했습니다.일본은 도덕성에 있어서는 완전히 빵점인 나라입니다.정유재란 당시 살아있는 사람의 코와 귀를 베고, 강제적인 성노예를 종군위안부라고 하여 자발적으로 따라간 것처럼 표현했고 그것마저도 안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최근엔 핵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고 있습니다.
특히 광복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소련과 미국에 의해 나라가 두동강이 났고 이후 6.25전쟁까지 이어졌으니 얼마나 우리민족에게 끼친 패악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를 중요하게 봅니다.우리나라에서 흥행하는 영화를 보면 모두 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한국인들은 정치와 역사에 관심이 커서 "서울의 봄,명량,국제시장,암살,택시 운전사,태극기 휘날리며,변호사" 등 흥행을 했습니다.역사를 되돌아보고 반성을 할 것은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흥행작을 보면 "귀멸의 칼날,센과 치히로의 행방물명,너의 이름은,모노노케히메,하울의 움직이는 성,벼랑위의 포뇨" 등을 보면 거의 애니메이션 만화영화수준이니 일본은 역사와 정치에 대하여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중에서 자민당의 1당 독재를 하는 나라답습니다.만약 반전영화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일본 자체가 전범국이니 코스프레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그나마 영화를 만들어도 역사를 왜곡해서 만드는 지경이니 "개 같은 왜적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일본은 한국의 동학을 보고 민주주의를 배워야 합니다.
소녀상을 보니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끌려가는 걸음 얼마나 무서웠나요.
돌아오는 걸음 얼마나 무거웠나요."
돌아오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대부분 일본군들이 다 죽였고 아주 극히 일부...한번 더 말하지만 아주 극히 일부만 살아서 돌아왔다는 점에서 볼때 위 문구도 어쩌면 역사왜곡이 될 수 있습니다.
나주에 "동학농민군희생자를 기리는 사죄의 비"가 거의 두달 전 세워졌습니다.한국과 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세웠습니다.이러한 움직임은 윤석열 대통령이 외신 인터뷰에서 밝힌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는 역사 인식과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 2017년 12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일본 홋카이도 대학 옛 표본 창고에서 방치된 채 100년만에 발견돼 반환된 진도 출신 동학 지도자의 두개골 사례처럼 직계 후손 찾기는 요원하기만 합니다.그나마 "사죄의 비"로써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씨앗 하나를 뿌렸다고 봅니다.
한국 시민과 나주시의 협력으로 비를 세우게 됐다는 글귀가 적혀 있고 사죄비에는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나주에 주둔하며 서남해 항일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학살작전을 전개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가 나주초토영에서 전봉준 장군을 심문했고 이후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공사와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교수형 판결을 받아 처형됐습니다. 그런데 전봉준은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3-12-25 (진주휴게소)
129년이 흘렀습니다.조선 재정의 주류를 이루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 세가지 수취체제가 변질되어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인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맞서고 열강들의 침략 야욕에 분연히 맞서 싸웠습니다.동학군이 꿈꿔온 세상,대동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미진한 부분은 바꾸어 가는 중이라고 봅니다.
무안의 동학을 보면 최고의 재력과 지성인들로 동학군을 훈련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곳과 다른점입니다.특히 경상도는 유림에서 동학을 배척했지만 전남 무안에서는 깊이 받아들였다는 점이 특이 할 정도로 다릅니다.배상옥은 백마를 타고 다녔고 이곳 사람들이 가진 애향심과 제대로 된 방법론을 알았으며 실천했습니다.배상옥은 대한민국 개국공신으로 대접해야한다고 봅니다.
https://youtu.be/UJSnNkYrfH0?si=f6n0aNE7KL-fgf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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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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