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정은 생곡 주변의 비지정문화재 포함 유적을 돌아보고 
명월산 흥국사를 돌아보고자 길을 나섭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일행이 한분 더 계셔서 중간 중간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진행했습니다.


물론 제가 나이가 어려서 더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르네시떼 입구에서 만나 명지근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한 후

녹산수문방향으로 갑니다. 


오늘 바람이 제법 불어서 응달진 곳으로 가면 추위가 느껴집니다.




* 녹산장락패총(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1527-2)


녹산수문 수능엄사 맞은편 공원에서 생곡의 장락 패총을 보러 갔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되돌아 나왔습니다.


장락 마을 안쪽에 산자락 끝지점의 돌로 쌓은 석축이 있고 그 아래쪽이 
패총지역으로 판단되었습니다만 이미 기초 경지정리가 끝난 분위기 였습니다.


패총 출토품 아래에는 청동기시대의 원형 점토대 토기,평저편,마제석기 등이 발견되었고 
윗 층에는 철기 시대 유물이 나왔다고 하는데 보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마을주민의 말로는 "여기 장락은 원래 포(浦)였다."고 합니다.


장락은 포구가 있던 곳이라 청동기시대부터 원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렵채취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마을 주민의 설명으로도 가늠이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큰 도로로 나와 생곡 형제 순교자 묘로 갑니다.

생곡(生谷)은 살아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인데 지금은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사곡(死谷)이 되고 있어서 마을입구 원망 가득한 플랭카드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 생곡 형제 순교자 묘(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69-3)


생곡동 배(裵)씨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曺)씨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창녕 조씨 석빈(曺錫賓)과 석증(曺錫曾)의 유해가,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선산을 앞에 둔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유교 집안이었던 창녕 조씨 가문에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제가 함께 목이 잘려 순교합니다.


순교한 이들의 시신을 조씨 선산에 매장하려 하였으나 사학죄인()이라 하여 문중에서 반대하였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배씨 집안(배정문 : 배문한 신부의 증조부)에서 그의 집 언덕에
묻어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신앙심이 별로 깊지도 않고 천주교도도 아니지만 이곳은 묘소의 분위기로는 최고였습니다.
저절로 신앙심이 우러날만한 장소였습니다.


바위 위에는 큰 십자가가 서 있고 형제의 묘 주변으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주제아래 빙 둘러
십자가 형태의 비석이 있고
그기엔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니다."는
글을 비롯하여 제14처까지 14개의 비석이 보입니다.


무덤 상석엔 "순교자 조석빈지묘,순교자 조석증지묘" 한자 글씨가
오석에 흰글씨로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큰 십자가 뒤로 백매가 피어 배경으로 보이고 무덤 앞쪽엔 정삼품목(正三品木)이라는 고목이 있는데 
왜 정삼품목인지 연유는 안적혀있습니다.아마도 이곳은 배씨집안 집성촌으로 배문한 신부의 정조부가
배정문으로 정3품
통정대부였기 때문에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라고 합니다.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詩禮里)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 대흥 · 대식 3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자료를 보니 놀랍습니다.

진례면 시례리는 저의 외가가 있던 곳이라 그쪽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듣
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입구 안내문을 보면 관헌은 먼저 형 석빈을 가차 없이 참수하고 나서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는데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참수되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 형제의 순교 사실에 관한 구전이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19-20일 부산교구에 의해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큰 십자가가 서 있는 곳에서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아래엔 생곡교회가 있습니다.






입구 아래쪽엔 배문한신부 생가가 있습니다.배문한(裵文漢) 신부는 수원카톨릭 대학장으로
1994년 8월5일 삼척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 3명을 구하고 선종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마음(馬音)마을 이가네 칼국수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흥국사로 갑니다.


마을입구의 비석을 보니 마음()은 하늘 말[천마산]이 울부짖는 ‘천마시풍형()’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주 최씨 일가가 중곡마을로 옮겨가고 

경주이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합니다.


嘶(시)는 "울 시" 입니다.

 


명월산 흥국사 입구에 도착하니 산 하나가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는 포크레인과 트럭이 쉼없이 오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근 공단조성에 필요한 토량으로 판단됩니다.




* 명월산 흥국사(부산시 강서구 허황후길 182 [지사동]) 


흥국사에 도착해보니 이 절집의 극락전이 가장 분위기가 좋습니다.
일반 기와 민가 같이 평범해보이지만 그 평범한 집 뒤로 대나무가 펼쳐져 있습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당우입니다.

극락전의 주련을 보니 명월산간흥국사(明月山間興國寺 명월산 사이 흥국사)라는
글이 맨 우측에 있습니다.


제대로 하려면 명월산하흥국사(明月山下興國寺)가 맞겠죠.


그 부분은 주련에서 빼고 읽으면 

無量光中化佛多 [무량광중화불다무량한 빛 가운데 많은 화신불 나타나시는데

仰瞻皆是阿彌陀 [앙첨개시아미타우러러보니 모두가 아미타불이로다

應身各挺黃金相 [응신각정황금상나타나시는 모습마다 황금빛 띠우시고

寶髻都旋碧玉螺 [보계도선벽옥라머리엔 아름다운 푸른 옥으로 두르셨네.





명월산의 유래는 안내판에 적혀있습니다.
가락국 수로왕이 허황후를 부인당[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에서 맞이하여

여기까지 와서 여러 신하들을 물리치고 단둘이 산으로 올라가 산골짜기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왕은 밝은달을 가리키며 허황후와 같다고 하여 명월산(明月山)이라 하고
그 당시는 명월사(明月寺)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명월사지가 되고 현재는 흥국사입니다.


중간의 비석은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입니다.
우측의 비석은 워낙 마모가 심하여 어떤 비석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극락전 안의 사왕석을 봅니다.

이천년전의 돌
분명 이렇게 유물이 있습니다.

양쪽엔 코브라 뱀이 보입니다.
설화라고 하기엔 유물이 있고 
역사라고 하기엔 기록이 아쉬우니....


여하튼 이 사왕석때문에 남방불교 유입근거설의 중요한 유물이 됩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고구려 제10대 왕인 소수림왕 2년이고 
백제불교는 고구려보다 13년 후인 인도의 마라난타스님이 침류왕 1년에 진나라로 부터 
불교를 전한 것이 시초이며 신라불교는 백제보다 더 늦은 제19대 눌지왕때 부터입니다.

물론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됩니다만...


그러나 향토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도래지는 김해라고 말하는데 
그냥 흘려 지나치기엔 유물이 너무 많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왔던길로 되돌아오다 1인당 입장료 5천원인
둔치도 무인카페 "금빛노을"로 들어가 커피,사과,옥수수튀밥에 고구마까지 구워먹으며 
세찬바람에 노출되었던 몸을 녹이며 휴식을 충분히 취한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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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Posted by 세벗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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