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제승당)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부제: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을 찾아서...]


- 언제 : 2006.7.9
- 날 씨 :습기 많은 더운 여름날
- 몇명:5명
- 어떻게:거제도 아우 집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 테마:문화유산답사


7월 8일 거제도에 있는 아우의 집들이를 갔었다.홈쇼핑에서 구입해서 처음 네비게이션을 구동해 보았는데
아파트 입구까지 참 편리하게 찾아 갈 수 있었다.왁자지껄한 시간이 지나고 하룻밤을 지낸 후
일요일 통영의 연화도를 돌아보려고 통영여객선터미널에 갔는데 배 출항시간이 맞지 않아서
한산도의 제승당을 둘러보기로 했다.자가 승용차까지 배에 실고 가서 섬 전체를 모두 둘러보았다.

 

 

충렬사가 이순신이 죽은 뒤에 지어진 이를테면 기념관 같은 것이라면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은 그가 통제사의 큰일을 맡으면서 손수 지휘하여 지은 집이다.

경내에는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한산대첩도 등 5폭의 해전벽화가 전시되어 있는 제승당과 충무공 영정이 모셔진 충무사, 활터인 한산정, 그리고 수루가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1593년 8월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 하였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던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을 받아 서울로 떠날때 까지 세해 여덟달 동안 머물면서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그곳은 1597년의 칠천량 싸움에서 우리 군사가 지게 되자 그때 경상 우수사이던 배 결이 거기 비축되어 있던 쌀과 무기 따위를 왜적에게 넘겨 주지 않으려고 불을 지름으로써 잿더미로 변하였다.

정유왜란 때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에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1739년에 유허비를 세우면서 "제승당" 이라 이름 하였고 1976년 지금의 제승당과 충무사, 한산정, 수루 등을 새로 짓고 경내를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승당"안에는 '노량해전도, 진중생활도, 우국충정도, 한산대첩도, 사천해전도' 등 5폭의 그림이 있으며 거북선 1/25 축소모형과 지자총통, 현자총통, 커다란 제승당 현판도 함께 전시되어있다.



제승당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지정번호 : 사적 제113호
·지정일자 : 1959. 8. 19
·소 재 지 :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

한산도의 이충무공 유적지는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제승당 일원의 52만5,123m2(15만9,128평)에 조성된 지상건물, 각종 비석, 동산문화재, 광장, 조경물 등과 풍치임야를 통칭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충무공은 좌수영 함대를 이끌고 그해(1592) 5월 4일 1차 출동하여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대승하고 5월 29일의 2차 출동에서 적의 주력함대를 궤멸시킨다.
이어 7월 4일 제3차 출동에서 세계 해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산 대승첩(7월 8일)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한산대첩으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 병진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어 8월 24일의 제4차 출동에서는 부산포에 집결해 있는 일본 함대 100여 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에 선조는 1593년 8월에 이충무공에게 당시 편제에도 없던 3도 수군 통제사를 제수하고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통괄지휘케 하는데, 이 무렵 이충무공은 한산도에 진영을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한산도 두억개(頭億浦)에 터를 고르고 진영을 설치하기를 정유년(1597) 2월 26일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3년 7개월 동안 하였는데 운주당을 비롯한 각종 공해, 창고와 부대시설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는 문헌상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불타버리고 폐허가 된지 142년만인 영조 15년(1739) 조경(趙儆) 제107대 통제사가 이곳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운주당(運籌堂) 옛터에 예대로 집을 짓고 제승당(制勝堂)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후 영조 30년(1760) 이충무공의 후손 이태상(李泰祥) 제121대 통제사가 낡은 건물을 중수하면서 유허비를 손질하고 비각을 뒤로 옳겨 세웠다.그로부터 117년 뒤인 고종 14년(1877) 공의 10세손 이규석(李奎奭) 제198대 통제사가 제승당 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옛 비는 그 옆에 묻어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발굴하여 2기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


건양 원년(1896) 통제영이 혁파되고 뒤이어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게 되자 지방 유림에서 제승당을 관리하였으나 재원 조달이 어려워 점점 퇴락하여 가고 있었다.이에 통영 군민들은 제승당의 퇴락을 두고 볼 수 없다하여 1932턴 3월 15일 「한산도 제승당 중건기성회」를 창립하고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한산도민들은 따로 「모충계(慕忠契),를 결성하여 「충무영당(忠武影堂)」 건립과 충무공 영정 봉안을 추진하여 1933년 6월 2일 「한산도 제승당 준공식」과 「충무공 영정 봉안식」을 동시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1976년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본 유적지에는 충무사(忠武祠), 제승당, 수루(戍樓), 한산정(閑山亭) 등 당우(唐虞)를 비롯하여 유허비 2기, 한글 유허비 1기, 통제사 송덕비 7기, 비각 5동과 5개문(내삼문, 외삼문, 홍살문, 충무문, 대첩문) 기타 부속건물이 있다.

※ 제승(制勝)이란 운주제승(運籌制勝)에서 나온 말이다. 《한서(漢書)》와 《사기(史記)》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군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쟁취한다(運籌於 幄之中 制勝於千里之外)"라는 기록이 있다. 운주당을 복원하고 제승당이라 이름한 것은 운주와 제승이 대구(對句)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산만의 거북선등대이며 배 뒤로 보이는 산에 한산대첩기념탑이 있으나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다.
제승당 입구로 잘 정돈되어 있고 팔손이와 동백나무를 비롯하여 키큰 해송이 멋스럽다.
활처럼 휘어진 제승당 가는길의 한산만
대첩문 좌측에 우물이 있다.안내문에 의하면 바닷가지만 물이 짜지 않다고 한다.지금도 콸콸 쏟아진다.
작은섬이지만 이 우물도 이곳에 통제영을 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대첩문을 지나 제승당 가는길로 키큰 나무때문에 운치가 있다.
제승당의 모습이며 내부엔 제승당이라는 거대한 현판과 총통이 있고 5폭의 해전벽화가 전시되어 있다.
우측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앉아"로 시작되는 시에 나타나는 수루가 있다.
수루의 모습이다.戍樓(수루)의 수자는 "지킬 수"자로 수자리에 쓰이는 그 글자다.바로 앞은 한산만으로
바다이며 멀리 산능선에 한산대첩기념탑이 흐릿하지만 보인다.수로 바로 앞 안내문에는 영어로
"한산도송"를 번역해 놓았다..."in the bright moonlight..."
수루 반대편에는 제승당을 지나 안쪽에는 과거 충무영당이라고 불리었던 충무사가 있다.
이곳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이 있다.제승당 내에서도 가장 경건한 장소이다.충무사 건물 우측 안내문에는
14전14승이라고 되어 있는데 최근엔 다소 적은 전투까지 합하여 23전23승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러 충무공 영정과 충무사는 찍지 않았다.옛날에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듯이...누가 뭐라고 해도
이순신장군은 나에게 있어 교육받은 그대로 "성웅"이다.알면 알수록 배울점이 많고 위대한 분이다.)

 

한산정에서 본 활터의 과녁이다.한산정은 최근에 지어진 정자이고 건너편 과녁사이에 바다가 있다.
밀물과 썰물때 활쏘기연습을 하여 실전(배 위에서)을 위한 훈련이었고,평화시에는 활쏘기대회를 하여
잔치를 열었다고도 한다.활쏘기대회를 마친 후 왁짜지껄하게 고기와 술을 마시는 수병들이 연상된다.
한국에서 과녁과 활쏘는 장소 사이에 바다가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이순신장군을 부각시켰다는 말이 많았다.그렇지만 박정희장군과
이순신장군은 "참군인"이라는 측면에서는 극과 극을 달린다.아마도 박정희 전대통령이 이순신장군에게
가졌던 콤플렉스가 있다면 이런 점일 것이다.

제승당을 나와 길을 한바퀴 돌아 한산대첩기념탑에 올랐다.탑의 중간 글씨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이고
탑 아래 안내글은 이은상의 글인데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거북 중간은 검게 물이 들었고,에폭시로 막아 놓았지만
상당히 붕괴 위험성이 높아보였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좀더 튼튼하게 보완을 하던지 아니면 철거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기념탑보다는 기념탑을 보기위해 접근하는 길 좌우측에 있는 100년 이상된 동백나무가 더 인상에 남는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
이순신과 넬슨.서양해전의 유명한 해군사령관과 동양해전의 유명한
해군사령관으로 비교해보자는 의도로 적어봅니다.

도고 제독의 변론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켜 일약 세계적인 해군 지휘관이 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에 대한 영웅적인 평가가 있을 때마다 이순신 장군을 거론하며 겸손해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영국의 유명한 해군제독 넬슨에 버금가는 군신(軍神)이라는 말을 듣고는,"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만한 인물이 못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이 있다면 오직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하사관도 못된다. "당시 도고 제독의 함대는 정부가 외국에서 빚을 끌어다 전함을 사들이고 해군을 적극 육성하는 등 국가적, 국민적인 차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지원을 받아 상당한 전력을 보유했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지원도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수적 열세에 놓여 있던 함대를 이끌고 다수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훗날 조정에 불려가 감옥에 갇히고, 수군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는 조정의 명이 떨어졌지만,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오니 . . . '란 말을 남기고 분전하여 결국 일본 수군과 23번 싸워 23번을 모두 이기는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전적을 남겼다.

아울러 도고 제독은 자신을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변론을 펼쳤다.
"나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나는 천왕 폐하의 부름을 받고 온 국민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단 한번의 싸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조차 버림받고 국민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여 수없이 일본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그가 지키는 지역에는 일본 군대가 한 발짝도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 그 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도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

일본 해군준장 사토-데쯔라로의 이순신장군 논평.
1926년 "조선지방행정" 제6권 2월호 "절세의 명장 이순신"에서 "장군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제적인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해군장군인 나로서는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로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과 조선의 이순신이 있다. 그 중에서 갑과 을을 정하라 한다면 서슴치 않고 이순신을 갑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영국의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그 인격에 있어서나 청의성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순신의 짝이 될 수 없다.

프랑스의 장군 "스후란", 미국의 장군 "아랏카트"와 같은 세계적인 명장들도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넬슨 이하의 인물이다. 로이테르는 인격과 역량, 경력도 이 장군과 비슷하지만 장군으로서 필요로 하는 창의성에 있어서는 한 수 꺾이는 것같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풍신수길의 목적을 좌절케 하였으며 바다를 제압하는 것이 국방상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실적으로 증명한 명장이었는데 중도에서 모함을 당하여 백의종군 하였으나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고 고통을 달게 받았으니 이 한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장군의 인격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장군은 군기에 엄하고 위엄이 있으며 부하 사랑하기를 친자식같이 하였으며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매사에 정성으로 임하는 모범적인 장군이었다.

장군은 평소 그의 뜻을 전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게 되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할 것이오, 만약 쓰이지 못하면 들에서 밭갈이 하는 것으로 족하다. 사람에게 아부하여 영화를 도모하는 것은 나의 큰 수치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로 그의 인격을 알아보기 충분하다.

영국 해군준장 G. A. Ballard 의 논평.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동,서양의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해군사령관의 비교.

동양의 이순신장군(1545~1598)
본관 덕수(德水), 자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서울 출생이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고 7월 한산도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도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다.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서양의 넬슨제독(1758.9.29~1805.10.21)
노퍽 출생. 1770년 해군에 입대하여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후, 프랑스의 혁명전쟁에 종군하여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싸웠다. 1794년에는 코르시카섬 점령에 공을 세웠으나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1797년의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도 수훈을 세웠으나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나폴레옹 대두와 더불어 프랑스 함대와 대결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1798년 나일강 입구의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여 ‘나일강의 남작’이라 불렸다. 그러나 나폴리 체재 중 알게 된 해밀턴 부인과의 친교로 일시 군무(軍務)를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1801년부터 다시 해상에 나갔고, 같은 해에 자작이 되었으며, 1803년부터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함대를 견제하였다. 1805년 봉쇄한 풀롱항(港)에서 탈출한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여, 그 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포착, 대담한 분단작전으로 이를 격멸시켰으나, 완승 직전에 적의 저격을 받아,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기함 빅토리아호(號)에서 전사하였다.


동,서양의 두장군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여러 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 4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4)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이 있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으로 존경 받고 있으며, 그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거북선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War Memorial Museum), 영국 해사박물관(Maritime Museum),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순신장군의 전공은 세계에서 가장빚나는 해전사의 선봉에 서있습니다.
넬슨제독은 영국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장에 나섰고 프랑스, 에스파냐 연합함대와 비슷한 전력에서 이긴것 입니다.물론 넬슨제독도 영국이 자랑할만한 세계적인 전공을 세운것 이지만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조정에서 버림받은 처지에서도 나라에대한 충성심과
애민정신으로 23번싸움에 한번도 진적이 없으니 그경이적인 이순신장군의 전공은 전세계 해전사에 누구도 따를수없는 전적을 세운것 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을 보면 그분의 인품을 알 수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세척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도 빛이 변한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충무공 전서' 중 15권에 실린 "진중음"으로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면서
충신의 굳센 의지와 장부의 기개 및 충혼을 표현한 말씀이다.

진중음... 즉, "진중에서 읊다"라는 의미이다.원문은 아래와 같다.

진중음(陳中吟) 1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쪽에서 위태한 몸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하니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른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다 사양하리오.

陳中吟(진중음)

天步西門遠 천보서문원
東宮北地危 동궁북지위
孤臣憂國日 고신우국일
壯士樹勳時 장사수훈시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讐夷如盡滅 수이여진멸
雖死不爲辭 수사불위사  

진중음(陳中吟) 2

삼백년 누려 온 우리 나라가
하루 저녁 급해질 줄 어찌 아리오.
배에 올라 돛대 치며 맹세하던 날
칼 뽑아 천산 위에 우뚝 섰네.
놈들의 운명이 어찌 오래랴
적군의 정세도 짐작하거니
슬프다 시 귀절을 읊어 보는 것
글을 즐겨 하는 것은 아닌 거라네.


진중음(陳中吟) 3

한 바다에 가을 바람 서늘한 밤
하염없이 홀로 앉아 생각하노니
어느 께나 이 나라 평안하리오.
지금은 큰 난리를 겪고 있다네.
공적은 사람마다 낮춰 보련만
이름은 부질없이 세상이 아네.
변방의 근심을 평정한 뒤엔
도연명 귀거래사 나도 읊으리.

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이다.주식과 선물,옵션 등 투자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흥분하면 투자를 그르친다.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격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시 후,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말씀이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십이 척이 있으니"

칠천량해전 이후 공께서 다시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라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임금의 밀지에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한 내용이다. 원문은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다. 이는 수군의 존속과 가치와 그 효용론을 강력히 주장한
공의 뛰어난 전략적 식견의 발언이라 하겠다.

必生卽死 死必卽生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씀이다.
원문은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군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이다.

차수약제 사즉무감(此獸若除 死卽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임진왜란 중 최후의 결전인 노량해전을 앞둔 1598년 11월 18일 밤 12시가 지날 무렵, 함상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향불을 피우면서, 겨레의 생명과 나라의 보존을 위한 최후의 염원을 담아,
하늘에 빌었던 내용으로 충무공의 "결사보국" 정신의 말씀이다.

전방급 신물언아사(前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1598년 11월 19일 아침, 마지막 노량해전의 대 격전 중 갑자기 날아든 총환이 뱃머리에서 독전하던
공의 왼편 겨드랑이를 맞혀 공께서 전사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왜군의 격퇴를 염려한 '애국의 유언'이다..

내 생각에 이순신장군은 피가 A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이순신 장군의 계책을 만전지계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한 전략을 세운다는 점이다.즉,필승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3전23승이 가능했고,그래서 해군은 거수경례 구호가 "필승"이다.
무신으로서의 담대함과 문신으로서의 지혜로움이 모두 묻어나는 이충무공의 또다른 가치는
난중일기라는 기록에 있다.난중일기라는 이름조차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전쟁 중에도 기록를 했는데,
평화시에 기록을 못 남긴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는 법이다.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125sec | F/6.6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51:02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160sec | F/3.3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29:16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320sec | F/6.6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34:15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320sec | F/6.6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21:44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200sec | F/3.3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56:38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80sec | F/3.3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58:48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200sec | F/6.6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44:28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60sec | F/3.3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41:39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125sec | F/3.3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2:41:03

 

PENTAX Corporation | PENTAX Optio WP | Pattern | 1/320sec | F/6.6 | 0.00 EV | 6.3mm | ISO-50 | Off Compulsory | 2006:07:09 13:50:13

 


━━━━━━━━━━━━━━━━━━━━━━━━━━━━━━━━━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가는 山中問答
風/流/山/行



Posted by 세벗 트랙백 0 : 댓글 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