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농포 정문부의 이상향인 진주엔 정온의 우곡정이 있다.

 

 

부산에서 도로사정이 좋은 야간을 이용하여 함안휴게소까지 접근 후 휴식을 취한 후 진주 사봉면과 이반성면 일대를 중심으로 한 문화유산 답사를 마치고 나니, 짧은 여정 속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첫 목적지였던 우곡정은 고려 말 충신 우곡 정온 선생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한적한 시골 들판같은 야산에 자리 잡은 정자는 비록 세월의 흐름을 겪었지만, 그 기개와 기품은 여전히 정자를 둘러싼 공기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정자에 앉아 바라본 들과 하늘은, 당시 선비들이 품었을 세상을 향한 생각을 잠시나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방문한 모순 정려비는 우곡정과 가깝지만, 그 의미는 또 달랐습니다. 조선시대 효의 표상인 모순의 효행을 기념하고, 유교 덕목과 국가 표창제도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문화재입니다.

 

정문부 농포집 목판과 바로 인근의 진주 충의사에서는 임진왜란 때 북변을 지킨 장군의 의로움이 떠올랐습니다. 목판이 담고 있는 기록은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이었습니다. 충의사 마당에 서면 엄숙함 속에 깃든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이어 찾은 김준민 신도비는 조선 말기의 인물과 그 공적을 기록한 귀중한 문화재였습니다. 비각 안에 정성껏 모셔진 비석은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었고, 그 앞에 서면 후손된 입장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오늘은 광복절이라 그 의미는 더 컸습니다.

 
 

- 일시: 2025-8-15 01:00 ~13:30
- 날씨: 구름있으나 대체로 맑음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210km

 

진주 우곡정 -> 진주 모순 정려비 -> 진주 충의사  -> 진주 중형조판소 김준민 신도비 및 신도비각

진주 우곡정: 경남 진주시 사봉면 우곡길 79-34
진주 모순 정려비: 경남 진주시 지사로 234 (등건마을)
진주 충의사: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22-8
진주 증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 및 신도비각: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 629번


 2025.8.15

 

▷우곡정

바위에 후손이 우정감고를 새겨 놓았습니다.

 

우정감고(隅亭感古)

 

하나의 충신이 되기보다 일만 번 죽는 것이 쉽다고 하건만 감상을 붙들던 그날 그 누구 함께 하는 이 있었던가
사리 판단이 밝아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를 먼저 내다 보았고 굳센 절개로 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움 속에 있음을 능히 알았다 동산의 솔잎은 예리한 바늘 되어 눈동자를 찔렀고 연못 앞 배롱나무의 붉은 마음은 화살을 맞았도다
여기 오르니 효행의 감동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그 공을 계승함에 내 성의 없음을 부끄러워 하노라

2006年 5月 후손 세움

 

우곡정은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우곡 정온(隅谷 鄭溫, 1337~1392)이 조선 태조의 역성혁명(고려→조선)을 반대하여 고향(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으로 내려가 은거하며 태조 2년(1393년)에 세운 정자입니다.

 

 

정온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는 충절을 지켜 벼슬을 거부한 뒤, 자신이 장님인 척하며 조정의 부름을 피했다고 전해집니다.

 

 

보호수에 버금가는 고목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정온이 솔잎으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는 것은 칠칠이 최북의 일화와 오버랩됩니다.칠칠이 최북은 조선 후기의 독특한 기인 화가로, 그의 이름 ‘북(北)’ 자를 둘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 스스로 불렀습니다. 그는 괴팍한 성격과 독특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일화들이 그의 기인다운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어느 벼슬아치가 그림을 요청했으나 최북이 응하지 않자 협박하려 하였는데, 최북은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고 하며 스스로 송곳으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습니다. 이후 늘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 외 최북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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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북은 금강산 구룡연에 가서 술에 취해 울고 웃으며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누군가 그를 구해 죽지 않았고, 곧 기이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휘파람을 불어 까마귀들이 놀라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2. 그의 성격은 불같고 괴팍하며 고집과 오기로 똘똘 뭉쳐 있었고, 술을 매우 좋아해 하루에 5~6되씩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주정이 심한 편이었습니다.

3. 최북은 붓으로 먹고산다는 뜻의 호 ’호생관(毫生館)’을 썼으며, 다양한 호와 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림 실력은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최산수’라 불렸고, 메추라기 그림이 특히 유명하여 ‘최메추라기’라는 별명도 있었습니다.


4. 그의 괴팍한 행동과 기행들은 후대에 과장되어 전해진 측면이 있으나, 그의 독특한 삶과 예술적 자부심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일화들은 최북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화가를 넘어 조선 후기 예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며, 무주에 그의 이름을 딴 최북미술관이 있을 정도로 그의 예술적 가치를 기리고 있습니다

 
 
 

우곡정(隅谷亭)은 모퉁이의 골짜기에 세운 정자 라는 의미입니다.

태조가 이를 확인시키기 위해 사위 이제(李齊)를 보내자, 정온은 솔잎으로 눈을 찔러 끝내 자신의 절개를 지킵니다.

 

경무공 이제의 현판이 우곡정 우측에 걸려 있습니다.

隅谷亭上先生詩
榛身迷義托青盲
取捨中間烈以霜
松葉豈能確節令名千載日爭光
景武公 李濟


우곡정에서의 은둔과 충의를 상징합니다.

"榛身迷義托青盲"

자신의 몸을 온전하지 않게 하여(榛身) 의리를 지키고(迷義), 청맹(앞 못 봄)을 핑계로 충절을 붙듦을 의미합니다.

"取捨中間烈以霜"

세상사의 취하고 버림 사이에서(取捨中間) 옳고 그름을 서릿발처럼(烈以霜) 엄정하게 구분한다는 의미입니다.

 

"松葉豈能確節令名千載日爭光"

 

솔잎으로 눈을 찔러 시력을 잃은 일(松葉)에서 우러나는 확고한 절의(確節)가 천년 동안 이름을 빛나게 한다(令名千載日爭光).


경무공 이제 '景武公 李濟'

 

라는 글이 검은 바탕과 붉은 테두리 액자 속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경무공 이제(景武公 李濟, 1365-1398)는 태조 이성계의 사위이자 조선 개국공신입니다. 그는 우곡 정온을 태조의 명으로 모셔가려 했으나, 정온이 청맹(겉으로는 멀쩡한 눈처럼 보이지만 맹인이라는 의미) 운운하며 그 명을 피한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조선 초기 정치 격동의 희생자였고, 시호가 경무공입니다.

 

우곡정 정온

進鳳山前戴笠人(진봉산전대립인) / 진봉산 아래 삿갓 쓴 사람은
人蔘花下舊王民(인삼화하고왕민) / 인삼 꽃밭 옛 나라 백성이라요
托盲去後今來見(탁맹거후금래견) / 장님을 핑계하고 돌아와 이제 보니
有目無言不死身(유목무언불사신) / 눈은 있어도 말 못 하는 죽지 않는 몸인데

 

이후 우곡정은 1849년(헌종 15년)에 중수, 1976년에 다시 수리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정자 앞뜰에는 정온이 낚시를 즐기던 연못이, 출입문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쓴 ‘절의문(節義門)’ 현판이 걸려 있어 그의 절의를 기리고 있습니다.건축적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조선 시대 정자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우곡정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과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이 깃든 역사적 공간이며, 현재는 전통과 신념을 상징하는 진주시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곡 정온이나 칠칠이 최북을 보면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눈 하나쯤은 그냥 찔러버리는 의기를 생각해보면 요즘과는 참 다르다라는 생각이 미칩니다.

 

진주 모순 정려비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이자 효자인 모순(牟恂)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워진 문화재입니다.비문은  "효자통정대부행좌사간모순지비"라고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모순(牟恂)과 효행을 보면 모순은 진주모씨로, 호는 '절강(折江)'입니다. 1417년(태종 17) 과거(식년친시)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좌사간을 역임했고, 세조 시기에 진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여가 강을 건너지 못하자 하늘에 통곡한 결과, 강물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효심이 널리 알려졌고, '절강'이라는 별호를 얻게 됐습니다.효행으로 중종 26년(1531년) 이전에 정려(효자에게 세워주는 문이나 비석)가 내려졌고, 원래의 비석이 훼손되어 1836년에 재건립되었습니다. 현재의 비석은 이때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진주 충의사

 

400년 보호수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여러 괴목들이 있습니다.괴목들만 보아도 정문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정문부가 후손에게 "진주에서 살아라"라고 한 의미는, 임진왜란과 이후 정치적 역경 속에서 겪은 고통과 고위 관직자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 벼슬을 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지만, 이후 이괄의 난 등 정치적 모함과 역모 혐의로 억울하게 옥사하게 됩니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마지막 유언은 "벼슬을 다시는 하지 말고, 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아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벼슬길을 멀리하고 전란과 권력 다툼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온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특히 정문부가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진주 지역의 풍토와 사람들을 좋아하여, 후손들이 고향인 함경도가 아니라 진주에 터를 잡고 살아가기를 바란 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아들들은 이 유언을 따라 진주로 내려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즉, 정문부의 이 말은 전쟁과 정치적 압박 속에서 가족에게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권하는 진심 어린 당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주는 그에게 살기 좋은 땅이었으며, 후손들이 그곳에서 안착해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충의사는 조선시대 명장 충의공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함경도를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고 북관대첩을 이룬 인물입니다. 그는 선조 21년(1588)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해 왜군에 맞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북관대첩이라는 큰공을 세운 것만으로도 지금 다시 논공행상을 한다면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공을 세웠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만큼 임진왜란의 상황에서 저평가 받은 인물입니다.

 

 

북관대첩비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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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鄭文孚)가 이끈 함경도 의병군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대군을 격파한 대승(북관대첩, 1592)을 기념해 후대인 1709년(조선 숙종 35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세운 전승 기념비입니다. 본래 이름은 ‘유명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有明朝鮮國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로, 비문에는 당시 의병들의 공로와 전공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요 내용 및 역사

  • 건립 배경: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에서 정문부 장군이 의병을 이끌고 왜군 2만2,000명을 격퇴한 북관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북평사 최창대가 주도, 이명필이 비문을 써 세웠습니다.
  • 규모: 높이 187cm, 폭 66cm, 두께 13cm의 비석에 1,500여 자의 한문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위치와 지정 현황: 원래 임명현(오늘날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에 있었고, 북관대첩비는 현재 북한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강탈과 귀환: 1905년 러일전쟁 중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어 일본 히로시마, 야스쿠니 신사 등지로 옮겨졌다가, 남북한과 일본의 오랜 협상 끝에 2005년 북한으로 반환되었습니다.

복제비 및 현대적 의미

  • 복제비 설치: 원본 반환 후 독립기념관, 경기도 의정부(정문부 묘소), 진주 충의사 등 국내에도 복사본이 세워져 있습니다.

기록적 가치: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북관(함경북도)에서의 의병활동과 국난 극복 노력, 민족 자주 정신을 상징적인 문서로 현창합니다.

 

초회왕(楚懷王)시는 정문부가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지은 시로, 중국 초나라의 초회왕(楚懷王)을 소재로 삼아 불우했던 왕의 운명을 읊었습니다. 초회왕은 진나라에 의해 망국의 아픔을 겪은 인물입니다. 조선 인조반정(1623년) 직후, 이 시가 당시 왕실 권력 변화와 연결되어 인조를 은연중에 빗댄 것으로 오해받아 정치적으로 문제시되었습니다.당시 왕위를 잃고 쫓겨난 광해군·폐주 인성군과 연관성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문부가 역모에 연루되는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정문부의 사망 원인은 '초회왕 시'가 역모와 관련된 혐의로 해석되어, 이괄의 난(1624년) 여파 속에 정문부가 역적으로 몰려 고문을 당해 옥중에서 사망한 것입니다.원래 북인의 인물이 아니었으나, 이 시와 과거 임해군 문제에 연루된 전력 등으로 여러 정치적 모함에 휘말렸습니다.후대에 억울한 죽음이 인정되어 신원이 복원되고 우찬성 및 충의공 시호를 받았습니다.

 

장판각으로 유추되는 건물입니다.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정문부 농포집 목판(鄭文孚 農圃集 木版)은 임진왜란 의병장 정문부(호: 농포, 1565~1624)의 시문과 문집인 『농포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책판)입니다.처음 제작은 1708년(조선 숙종 34년)에 정문부의 증손 정구(鄭耉) 등이 주도해 만들었습니다. 이후 책을 내거나 훼손·결실·증보 등의 이유로 1758년, 1890년, 1897년, 1910년 등 4차례에 걸쳐 추가·보완 제작되어 오늘날 총 191매 372장의 목판이 남아 있습니다. 1997년 신축된 장판각에 보존 중입니다.

 

 

진주 증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 및 신도비각

진주 증형조판서 김준민 신도비 및 신도비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준민(贈刑曹判書 金俊民, ?~1593)의 공적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와 이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입니다.

 
 

 

김준민은 조선 선조 때 거제현령, 합천의병장으로 임진왜란 1차 진주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2차 진주성 전투(1593) 때 동문을 지키다 전사했습니다. 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임명되고, 사후 형조판서로 추증되어 진주 창렬사 등에 배향되었습니다.

 
 

신도비의 내용은 김준민의 출신, 벼슬, 임진왜란 참전 및 공적과 진주성 승전과 순국의 자세 및 그의 뜻을 기린 후손들의 예우와 비문 작성 동기입니다.

 

신도비는 충절과 희생, 명예로운 죽음, 나라와 백성을 위한 김준민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어진 역사기록물입니다.

 
 

신도비는 거북 받침(귀부) 위에 세워져 있고, 머릿돌은 기와지붕 모양높이 225cm, 너비 83cm입니다.비문은 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이 지었습니다.비각(碑閣)은 내부에 용, 호랑이, 진주성 전투를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바깥은 진주성 같은 돌담으로 축성되어 있고 안과 밖 모두 화려하게 꾸며 무인의 신도비각답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오늘 하루의 답사는 단순히 문화재를 ‘본다’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와 시간의 깊이를 마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비록 이동 거리가 길지 않았지만, 그만큼 진주 곳곳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답사를 마친 감상을 읊어봅니다.

 

이상향, 진주 - 김영한

 

광복절 하늘 아래
사봉의 바람은 오래된 맹세를 품고 있었다

 

한 사내,
두 임금 섬기지 않겠다며
스스로 눈을 감은 자리
우곡정 연못 위로 솔잎 냄새가 내려앉는다

 

강물도 흐름을 멈추게 한
어머니의 상여 앞 눈물
돌 속에 새겨진 모순의 효심은
지금도 바람에 젖는다

 

북녘 추위를 뚫고
북관대첩의 북소리를 울린 장군,
그러나 역모의 사슬 속에서
후손에겐 "진주에서 살아라"
마지막 숨결로 남긴다

 

동문 붉은 불길 속
끝까지 칼을 쥔 김준민
푸른 용과 백호가 벽화 속에서
그의 눈빛을 되살린다

이 길 위에 서면
건물은 돌과 나무가 아니라
피와 맹세, 숨과 눈물이 된다

 

진주는 땅의 이름이 아니라
충절이 숨 쉬는 고향,
효심이 강을 멈춘 전설,
국난을 이긴 피의 기록

 

오늘,
나는 역사의 돌계단을 밟고
선조들의 심장을 건넜다
그곳에서
이상향의 숨결이 내 손에 닿았다

 
 

晉州懷古 -  仙文 金永漢

 

光復蒼穹下
士風懷舊盟

一夫不事二
自瞑落松馨

江水停流泣
慈輀淚雨縈
石中矛盾孝
今尚濕風聲

北塞寒霜透
北關大捷鳴
逆謀枷鎖裏
遺訓「晉州生」

東門烽焰熾
持劍到終程
靑龍白虎壁
炯目畫中甦

立此塵途上
樓臺非木石
血誓與呼吸
皆化淚痕成

晉州非地名
忠節故鄕情
孝止江流傳
克艱血史銘

今踏階前史
先人心臟經
觸余掌中際
理想鄕魂縈

 
 

진주회고

 

광복창궁하
사풍회구맹
일부불사이
자명락송형

강수정류읍
자이누우영
석중모순효
금상습풍성

북새한상투
북관대첩명
역모가쇄리
유훈'진주생'

동문봉염치
지검도종정
청룡백호벽
형목화중소

입차진도상
루대비목석
혈서여호흡
개화누흔성

진주비지명
충절고향정
효지강류전
극간혈사명

금답계전사
선인심장경
촉여장중제
이상향혼영

 

 

진주를 그리며

 

광복절의 푸른 하늘 아래,
옛 시대의 선비 풍모가 맹세를 되새긴다.
한 사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 하여,
스스로 눈을 감고 떨어지는 솔향 속에 산다.

 

강물도 흐름을 멈추게 한,
어머니 상여 앞의 빗물 같은 눈물.
돌 속에 새겨진 모순의 효심은,
지금도 바람 속에 젖어 울린다.

 

북녘 변방의 찬 서리를 뚫고,
북관대첩의 승전함이 울려 퍼진다.
역모의 쇠사슬 속에서도,
"진주에서 살아라"라는 유언을 남긴다.

 

동문의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칼을 끝까지 쥐고 나아간다.
청룡과 백호 그려진 벽화 속에서,
그의 눈빛이 다시 살아난다.

 

이 길 위에 서면,
누각과 대는 나무와 돌이 아니다.
피의 맹세와 숨결이
눈물의 자취로 변해 있다.

 

진주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충절의 고향이요,
효심으로 강물을 멈춘 전설이며,
역경을 이겨낸 피의 역사이다.

 

오늘, 나는 역사의 계단을 밟고
선인들의 심장을 건넜다.
그곳에서,
이상향의 혼이 내 손바닥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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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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