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경상도 어원이 된 도시에서 지금은 신선 세계로 돌아 간 듯

 

- 일시: 2024-5-3 22:30 ~5.5 10:30
- 날씨: 맑음 후 5일 아침엔 비
- 몇명: 홀로

 

상주는 요즘으로 치면 도청에 해당하는 경상감영이 있던 곳입니다.1601년 감영은 대구로 옮겨지지만 경상도라는 말에 "상(尙)"이라는 글자가 들어 갔을 정도로 큰 도시였습니다.경천대가 있는 낙동강 수운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고 경상도에서 손꼽을 정도의 농업생산력으로 크게 번성했었던 곳입니다.그러나 구한말 일제가 경부선을 조령이 아닌 추풍령으로 관통하는 경로를 택했고 경부고속도로마저 이와 비슷한 경로를 만들어지면서 교통의 이점이 잃어버린 후 현재는 인구 9만명으로 시 승격기준에도 미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경상북도의 면적이 서울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큰 곳인데,면적으로 보면 상주는 경상북도 중에서도 안동시,경주시 다음으로 큰 3위입니다.대부분 낙동강 수계에 해당하지만 서쪽은 금강수계,북쪽은 한강수계로 들어가 산경표 백두대간의 동과 서를 넘나드는 특이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상주의 CI를 보면 쌀,곶감,누에고치의 모양을 따 삼백(三白)을 상징하지만 현재는 곶감은 여전히 유명하고 자전거박물관이 있어서 자전거도 떠오르고 최근엔 포도밭도 상당하게 재배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상주하면 나 같은 경우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본 아자개가 떠오릅니다.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와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의 출신지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당시 상주 가은현 출신입니다.이 곳은 당시에는 상주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문경시 소속인 가은읍 지역 출신으로옛 이름인 '사벌(沙伐)'은 오늘날 하위 행정구역인 '사벌국면'으로 그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으니 아자개가 문경 출생이었어도 후삼국시대 당시 주요 세력은 이 상주 일대에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김천시에 밀려서 경부고속도로에는 포함되지 못했으나 후에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통해서 고속도로 연선에 편입되어 지금은 부산에서 상주로 가는 길이 편합니다.

 

▷ 답사일정(風輪) :535km

석문사(옥량폭포)-견훤산성입구(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42)-장각폭포-상오리칠층석탑(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953)-상주견훤사당-상주신봉리석조보살입상-효자정제수기념관-옥연사-상주김준신의사제단비(상주시 판곡1길 15)-남장사 석장승-남장사-정기룡장군유적지-상주화달리삼층석탑-전 사벌왕릉-경천대

 

2024-5-3

 

상주휴게소까지 진입했습니다.

2024-5-4

아침 8시 출발하여 석문사로 향합니다.

 

 

석문사 (釋門寺)

 

우선 석문사를 찾아갈때는 길이 좁고 경사도가 상당히 가파르기 때문에 산 아래 쉼터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기 바랍니다.걸어가도 석문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고 우측 계곡의 풍광도 볼만하기 때문입니다.

석문사는 근처에 가면 예사롭지 않은 바위들이 많아서 석문(石門),즉 돌문인가 했는데 
釋門寺(석문사)입니다.석가모니를 뜻하는 석(釋)이니 "부처님을 맞이하러 나아가는 문"이라는 의미의 이름으로 보여집니다.이곳 사찰이 앉아있는 산은 백악산(855.5M)으로 백개의 암봉이 솟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철계단이 이어지는 끝에 양문형 내장고 문 같은 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보굴암
(
寶堀岩) 입구입니다.이름만 보면 보물있는 굴인데 이곳엔 기구하고도 애절한 사연이 있습니다. 

이곳은 서유영(徐有英)이 저술한 야담집(野談集)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 중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딸과 김종서(金宗瑞)의 손자가 금지된 사랑을 했다는 설화가 나오는 곳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플롯을 약간 비틀어 변화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설화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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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首陽大君)은 문종이 죽고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의 보호 책임자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왕위를 강탈한 대군이다.김종서는 문종 때 우의정, 좌의정이 되어 나이 어린 단종을 왕으로 모셨으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지략이 뛰어난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직접 가서 김종서를 살해한 다음 그의 두 손자인 승규(承珪), 승벽(承壁)까지 죽였으나, 장손인 승규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백악산(百岳山) 깊은 산중 보굴암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다음 죽을 때까지 철권 강압 통치를 감행하였으며, 세조의 독재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딸이 끝내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궁궐 박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극적으로 살아남은 김종서의 손자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궁에서 쫓겨난 이후 수소문한 끝에 자신이 사랑하는 낭군이 백악산 보굴암에 숨어서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보굴암으로 찾아와 부부로 인연을 맺게 되어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원수 집안 일것 같은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보굴암에서 피신 후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 내용입니다.

극락(極樂)은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이상세계입니다.이곳에 아미타불을 모신 것은 위 설화와 잘 어울립니다.현실세계에서 거의 있을 가능성이 희박한 이상세계에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백악산은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하는데 속리(俗離)는 세속을 떠났다는 의미이니 역시 이름자체가 신선세계나 이상세계를 잘 알려주는 곳입니다. 

 

▷옥량(玉梁)폭포

옥량(玉梁)은 옥으로 만든 대들보라는 의미인데 실제 대들보 같은 바위 아래로 폭포 물이 흘러 내립니다.옥은 아니고 화강암이겠지만 물빛 때문에 옥빛이 느껴져 이름은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근처 바위에 옥량폭포 한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견훤산성

견훤산성 입구(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42) 계곡 맞은편에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이곳에 주차를 하고 견훤산성입구 입간판에서 700M정도를 제법 가파르게 오르면 견훤산성이 나타납니다. 5월초순인데도 날씨가 여름날씨처럼 제법 무덥고 산으로 오르니 땀이 많이 흐릅니다.

낮은곳의 집수지 흔적도 보입니다.안쪽은 다수의 건물지가 보입니다.산성의 느낌은 삼년산성이 오버랩될 정도로 상당히 비슷하고 견고한 모습입니다.즉,견훤산성이라고 해서 후백제 스타일이 아니라 삼국시대 신라 석축 산성입니다.견훤산성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견훤산성은 해발고도가 541M이지만 인접마을에서는 175M에 불과하고 도보로 20여분 정도 오르면 되는 거점형 성곽으로 군현의 치소성 역할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반원형 치가 3개가 있는데 아주 정성을 들여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장각폭포


상오리칠층석탑을 보기 위해 가다보면 입구에 장각폭포가 있습니다.
속리산과 청화산·도장산이 감싸고 있는 용유리와 상오리 일대는 십승지의 하나인 우복동(牛腹洞)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우복(牛腹)이란 "소의 배" 안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져 전란이나 굶주림이 없는 축복 받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속리산 천왕봉 아래 장각(長角)동은 배를 깔고 누워있는 소의 뿔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장각폭포부터 이상세계에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물은 장각동 계곡을 흐르다 장각사 터를 지나 6m 높이의 폭포가 됩니다. 낙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수량이 많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사철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폭포 특성 상 비 온후는 아주 폭포크기에 비하면 아주 우렁찬 폭포를 볼 수 있습니다.


폭포의 오른쪽 위에는 금란정 정자가 세워져 있고 왼쪽은 장송이 들어선 소나무 숲이 있어 한층 더 운치를 돋우는데 금란정엔 백발과 흰수염의 노인이 신선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상오리칠층석탑(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953)

 

장각폭포를 지나니 바로 "경천애인 장각동 신선(神仙)마을" 표지석이 나옵니다.실제로 마을이름이 신선마을입니다.주차장소가 마땅치 않아 간이로 주차하고 목계단을 빨리 올라 보니 다소 투박하고 비례가 좋지 않아서 안정성은 떨어져 보이지만 경쾌하게 하늘로 치솟은 고려시대 석탑이 나옵니다. 예전에 이곳에 장각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또 한번 놀라게 됩니다.석탑 사진을 찍을때 보니 라디오 음악 소리가 들렸는데 사진의 하단 우측 기단 끝에 보이는 부분이 사람의 발(足)입니다.할아버지 한분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드러누워 풍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현재 낮온도는 26도 정도로 벌써 더위가 느껴질 정도이긴 합니다만 자주 전신선탠을 하시는지 구릿빛 피부에 제법 윤기가 흘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그래서 속세의 눈을 가진 저는 민망하여 탑을 한바퀴 돌아보지도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상주견훤사당 (尙州 甄萱祠堂)

청계동 마을회관에 주차를 하고 청계사 절까지는 갈 필요없이 좌측 하송3길 고갯길로 2~3분 오르면 바로 보입니다. 

"후백제 견훤왕조"라고 되어있고 문을 열어보니 아무것도 없고 신위만 있습니다.
甄萱(견훤)은 "질그릇 구울 견"에 "원추리 훤"입니다.원추리를 담은 질그릇이 연상되는데 사람이름치고는 흔하지 않아서 특이하다는 인상이 남습니다.

동제(매년 정월 보름 책임자를 뽑아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냄)를 지내는 사당으로 19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후백제대왕의 신위를 모시고 동제를 지낸다는 것도 특이한데 건물구조도 아주 단순한 모습으로 사당의 권위보다는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가 느껴져 좋았습니다.

 

상주신봉리석조보살입상 (尙州 新鳳里 石造菩薩立像)

주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산2-1번지로 되어있어서 산길을 오르게 되었지만 찾지 못하여 네이버지도로 검색하니 그냥 화령장지구전적비 옆 도로변에 있습니다.

많이 훼손되어 뚜렷하지는 않지만 3면 보관이 보이는데 고려전기 작품입니다.

효자정제수기념관

원래 구 사산초등학교를 2001년에 리모델링하여 기념관으로 만들었습니다.동상이 있고 아래에 그 내용이 나와있습니다.1974년 1월22일에 아버지와 아들이 동사하여 죽었는데 10살 아들이 아버지에게 옷을 입혀드려 자신도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추위에 장시간 노출되면 저체온증(하이포서미아 hypothermia)에 걸리게 되어 탈진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아버지는 눈구덩이에 빠졌다고 되어 있는데 빠지면서 외상을 입었다면 내,외적요인으로 저체온증이 더 빨리 발생했을것으로 보입니다. 12km떨어진 큰집에 가던 날 기온은 영하 20도에 내린 눈이 33cm 쌓였다고 합니다.

정제수군이 나이 10살이었다고 하고 1974년에 일어난 일이니 정재수군은 1964년생 정도로 유추되니 나와 같은 동년배로 보입니다. 

 

아버지 일어나셔야한다고 부르짓다 스르르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옥연사(玉淵祠)


정제수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제법 규모가 큽니다. 옥연사는 소재 노수신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사당과 강당이 있고 옥연사의 건물들은 야산의 남향사면에 배치되었는데 아랫쪽에는 강당이 있고 그 뒤쪽에는 근년에 건립한 종택(관리사)이 있으며 뒷편 약간 높은 위치에 오현양각과 불천위사당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노수신은 중종 38년(1543)에 문과 초시를 비롯해 회시, 전시에 모두 급제하였으며 영의정까지 지냈고 조선의 두보라고 할 만큼 시를 잘 지었으며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은 명종-선조 연간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학자ㆍ시인으로 중종 38년(1543)의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이후 성균관 전적(典籍)ㆍ수찬(修撰)을 거쳐, 이듬해 시강원사서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명종 즉위 후 윤원형과 이기가 일으킨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명종 2년(1547) 순천으로 유배되고 같은 해 9월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었고 진도에서 노수신은 19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노수신의
‘친구야 보고 싶다’에 해당하는 한시입니다.

 

由來嶺海能死人  고개와 바다 거쳐 오려고 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

不必驅馳也喪眞  힘들게 말달려 죽을 필욘 없네.

日暮林烏啼有血  석양에 숲의 까마귀 울음에 피가 있고

天寒沙雁影無隣  날씨 차가운 모래사장 기러기 그림자 짝이 없네.

政逢蘧伯知非歲  정이 거백옥이 49년의 삶이 잘못됨을 안 50살이 되었고

空逼蘇卿返國春  부질없이 소무가 귀국하던 때가 닥쳐왔네.

災疾難消老形具  질병은 없애기 힘든 늙은 형구(刑具)이니,

此生良覿更何因  다시 어느 인연으로 이 생애에 즐겁게 만날 수 있을까.

 

노수신은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을사사화에 연루되며 진도에서 19년이나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후에 해배되며 다시 정점에 오르는 삶을 구가하게 되지만 이 시는 바로 진도에서 유배할 당시에 친구들에게 보낸 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죽을수도 있으니 오지 말라고 하면서도 두명의 친구가 몹시도 보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상주김준신의사제단비(상주시 판곡1길 15)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상주성을 지키다 북천전투에서 순절한 김준신의병장을 추모하기위해 1850년경에 세운 제단비입니다. 김준신은 왜적이 쳐들어오자 솔령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칠곡 석전, 상주 북천 등지에서 왜적을 방어하다 전사하여 ‘의사’란 칭호를 정조로부터 받았습니다. 문이 잠겨져 있어 제단비를 보지 못했습니다.

▷낙화담 소나무

김준신제단비 앞쪽 오른쪽으로는 낙화담(落花潭)이라는 연못이 있고 그 중심에 멋진 소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520여년된 소나무입니다.김준신의사가 상주성전투에서 순절한 후 왜적이 들어닥치자 부녀자들은 왜적에게 능욕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심하여 마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고 합니다.노산 이은상이 1973년에 쓴 낙화담의적천양시(落花潭義蹟闡揚詩)가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남화담 두른 적석 사이로 메발톱꽃이 순절한 여인의 영혼처럼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하늘과 땅은 천지(天地)이니 주역(周易)의 64 괘(卦) 중 12번째에 위치한 천지비(天地否)는 "하늘과 땅이 꽉 막혀서 소통이 안된다는 뜻"을 가진 괘입니다.

▷남장사 석장승

조선후기에 건립된 장승으로 1832년(壬辰七月立)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못생긴 메주같은 얼굴에 머리 윗 부분은 세모난 민대머리이고, 눈썹과 눈동자 표시가 없이 좌우로 치켜진 툭 나온 왕눈, 왼쪽으로 비뚤어진 세모난 주먹코를 조각해서 오히려 민화를 보는 듯 친근합니다. 고려 초에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상주(尙州) 목사로 있을 때 비둘기 한 쌍을 구워먹은 부부에게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가(佛家)의 전설이 얽혀 있는 장승이라고 합니다.

남장사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없으므로 남장동을 지키기 위한 수호신으로서 이 장승을 세운 듯하다고도 합니다.귀중한 민간신앙유산입니다.

▷남장사

일주문 현판의 글씨가 고매하여 예사롭지 않습니다.자세히 보니 해강 김규진의 글씨입니다. 광서8(光緖八年)(1882)에 노악산남장사(露嶽山南長寺).입구에 대한제국 말기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에게 서법을 가르쳤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글씨라는 안내해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절집에 8가지 국가지정 보물이 있으니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특히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영산회 괘불도,감로왕도도 볼만합니다.

▷충의사(정기룡장군유적지)

임진왜란 때 바다에서는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맡았고, 육지에는 60전 60승 신화를 이룬 ‘충의공 정기룡’ 장군이 육지에서 왜군을 막아 한반도 명맥을 고수했습니다.

거창전투에서 왜군 을 격파한 후 금산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고 왜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방어하였습니다.

충의공 정기룡장군은 영남지방에서 크고 작은 수 없는 혁혁한 승전을 세웠고 특히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의 최중앙인 상주성 탈환에 성공하여 왜군의 북진을 차단했고 삼군 수군통제사까지 하면서도 명성은 가리어져 아쉬운 분입니다.1617년 3도 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통영의 진중에서 61세로 순직하였습니다.


상주화달리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화강암 석탑으로 아쉽게도 상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전 사벌왕릉

사벌왕릉으로 추정되는 묘로 상산 박씨의 시조 박언창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능이기도 합니다.사벌국은 경상북도 상주지방에 위치하였던 삼한 소국 중의 하나로, 일명 사량벌국이라고도 합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하여 있었으나 점해왕 때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고 그 뒤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다섯 번째 왕자인 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였는데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을 받아 929년 패망하였다고 합니다.

▷경천대

 

擎天(들 경,하늘 천)이니 하늘을 받든다는 의미로 읽혀집니다.깎아지른 절벽과 노송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빼어난 곳으로, 하늘이 스스로 내렸다고 해서 일명 자천대(自天臺)로 불렸는데 채득기 선생이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을 새긴 뒤 경천대로 바꿔 불렀습니다. 조선초 이 지역 출신의 선비인 우담 채득기 선생이 지은 정자인 무우정(舞雩亭)이 절벽 위에 위치하고, 경천대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조선시대 장군 정기룡이 하늘에서 내려온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도 전합니다.정기룡이 바위를 파서 말먹이통으로 쓰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무우정의 경천대감음 한시도 보입니다.

경천대는 수려한 경관 이외에도 임진왜란 때의 명장 鄭起龍(1562-1622) 장군이 젊었을 때 경천대에서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와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불모로 끌려갈 때, 동행한 雩潭 蔡得沂(1605-1646)라는 인물이 은거하여 산수를 경영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채득기가 자천대(경천대)를 읊은 작품 

奇巖斗起自成臺  기이한 바위 우뚝 솟아 저절로 臺를 이루니
翠壁東西碧水回  푸른 절벽 동서에 시퍼런 강물이 감돌아 가네
矗矗豈容人力築  저 우뚝우뚝한 돌을 어찌 인력으로 쌓았겠는가
層層應是化工裁  층층의 저 돌은 아마도 하늘이 만든 것 일거야
雲收玉柱珠簾捲  구름이 옥주봉에 걷히니 주렴을 거둔 듯하고
日射丹崖畵障開  햇빛 붉은 언덕에 쪼여 그림장 막 열어 놓은 듯 하네
最愛高標千百尺  제일 멋있구나 높이 우뚝한 천 백척은
直擎天闕任無頹  바로 하늘을 받들어 무너짐 없음을 맡겼네

(필사)

 

채득기가 이곳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곳이라 하여 자천대를 경천대라 명명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기존의 자천대로 불리던 곳을 경천대라는 공간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이로써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채득기가 자천동에 터 잡은 뒤로부터 자천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경천대가 채득기와 함께 인식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經綸不待費人裁  경륜은 사람의 마음 허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天爲詩仙刱此臺  하늘이 詩仙을 위해 이 臺를 만들었구나.

却恐名區塵跡汚  이 좋은 곳에 티끌 자욱 더럽힐까 걱정되어

故敎風雨洗蒼苔  일부러 바람과 비를 뿌려 푸른 이끼 씻어 가게 했다네

 

 

경천대가 있는 이곳 상주가 ‘商山’이라 하여 ‘商山四皓(상산사호 : 상산의 네 명의 노인들이라는 뜻으로 산 속에 은거하는 덕망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같은 덕 높은 은사가 살 만한 선비의 고장, 신선의 고을로 일컬어진 것과 상통합니다. 특히 상주지역은 낙동강 상류인 안동지역과 전통적으로 밀접한 인맥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퇴계의 제자인 류성룡은 상주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제자들이 스승에게서 이어받은 선비정신이 일상화하던 지역으로 인식된 것에서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2024-5-4


선산휴게소에서 휴식

2024-5-5 

부산으로 귀가


명칭은 "상주시(市)"이지만 그 속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으로 현세와 동떨어져 있는 세상이니 인간이 살지 않는 이상향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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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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