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  ‘탐매(探梅)

통도사 홍매가 필 즈음이라 알아보니 아직은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꽃들도 "을씨년스럽다"는 원전인 "을사년스럽다"를 아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극우 파시즘이 탄생 하는 느낌입니다.극우를 대표하는 이가 여당 대권후보 1순위로 올라오고,국회난입으로 입법부를 부정하고,영장거부로 행정부를 부정하고,법원 난입으로 사법부를 부정하여 3부를 부정하는 대한민국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꽃인들 조금 늦게 피고 싶겠죠.

그럼에도 벌써 1월 중순이 지나가는 상황이라 기온을 살펴보니 어제와 달리 밤에도 이곳 부산은 영상의 기온으로 바뀌었습니다.그러니 곧 매화도 피겠죠.


* (참고) /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다의 의미가 맞습니다.다만 을사늑약의 그 을사년이 아니라 대기근이 든 정조시대의 1785년 을사년을 의미합니다.사실 을사년은 역사적으로 을사늑약(을사오적,을사의병) 뿐 아니라 을사사화가 일어난 해도 있었고,1605년 대홍수도 있었고, 1785년 대기근의 을사년도 있었습니다.별로 좋은 기억의 역사는 아니었습니다.을사는 "고통과 가난"을 의미하고 "그 어떤 낙도 없는 흔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1785년 을사년을 의미하니 결국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다의 의미로 출발했겠지만 이후 을사늑약으로 또 한번 을씨년스러운 해가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가까운 기억은 오래된 기억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정조 시대의 대기근도 고통이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일제 35년도 고통이었기 때문에 역시 을사년은 을씨년스러운 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가지마다 휘도록 눈이 쌓였건만

(大枝小枝雪千堆)

 

따뜻함을 알아차려 차례대로 피어나네

(溫暖應知次第開)

 

고결한 매화는 비록 말이 없어도

(玉骨貞魂雖不語)

 

남쪽 가지 봄뜻 따라 먼저 꽃망울을 틔우네

(南條春意取先胚)

 

 

 

 

 

- 김시습(金時習)[1435~1493]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이며,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아버지는 김일성(金日省)이고, 어머니는 선사 장씨(仙槎 張氏)이다.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세종은 시문(詩文)을 시험하고는 학업이 성취되면 장차 중용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단종이 왕위에 오른 뒤 3년 만에 쫓겨나자 서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시대 상황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방랑하면서 명승지에 정착하였고, 예전의 도읍지에서는 슬픈 노래를 불렀다. 특히 양주의 수락산(水落山), 춘천의 사탄향(史呑鄕)을 비롯하여 설악산과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등을 즐겨 찾았다. 늦게 혼인한 아내 안씨(安氏)가 사망하자 승려가 되어 강릉, 양양, 설악 등에 머물렀고, 1493년(성종 24)에는 병이 들어 부여 소속의 홍산현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을 마쳤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하여 무량사에 부도(浮圖)로 안치되었다. 생전에 자신이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 두 가지 화상(畵像)을 그려 놓고 찬(贊)을 스스로 지었다.

 

김시습은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 등을 공부하여 유가의 본지를 유지하였다. 유가 이외에도 불교나 도가 등의 제자백가서는 배우지 않고서도 섭렵하였다. 고금의 문적에 정통하여 다른 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저서로는 『매월당집(梅月堂集)』, 『금오신화(金鰲新話)』,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호남록(遊湖南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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