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동학혁명의 땅, 샘난다 샘솟는 우물고을에 씌여져 있는 땅의 역사

 

정읍(井邑)은 우물마을(井村)이 승격하여 우물고을(井邑)이 된 곳입니다.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생명수입니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경주 나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 탄강전설이 있어서 신성시하게 여겼습니다. 같은 물을 마시고 산다는 것은 공동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였습니다.

 

한국인의 문화와 원형으로 볼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일 것이고 지금은 식수가 수돗물보다는 대부분 생수를 사 마시고 있고, 두번째는 쌀로 밥이며 세번째는 김치 일것입니다.아마도 물,밥,김치만 있어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기본적인 생존은 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겠지만 특히 물은 한국인 뿐 아니라 세계공통으로 중요합니다.  

우물은 신성한 장소로 지명에 우물이 들어간 정읍은 전수조사를 통해 300개가 넘는 우물이 있다고 합니다. 정해마을 우물은 시암바다라는 뜻으로 정읍사문화제 채수의식이 치러지고 덕천 가정마을 우물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마신 우물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산외 여우치 빈시암은 동진강의 발원지라는 점, 산외 외목마을 우물은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 했다는 전설인 일명 ‘선녀 약수’로 널리 알려졌으며 약수의 효능을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정읍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가르는 도시로 광주와 전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단풍으로 전국 단위 인지도를 자랑하는 내장산국립공원이 자리잡은 고장이고 붕어섬으로 유명한 옥정호가 있습니다.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의 노래로 달이 높이 떠서 시장에 가 계신 남편이 위험한 곳을 디디지 않도록 기도하는 순박한 아내의 마음이 잘 드러난 정읍사(
井邑詞)가 유명한 곳입니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어귀야 내 가논 대 졈그를셰라"

 

정읍은 동학혁명의 땅입니다.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 ,국정을 보필해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염원이 동학혁명으로 나타났다고 봅니다.그런점에서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 일시: 2024-11.16 16:00 ~11.17 17:00
- 날씨: 밤 사이 약간의 비온 후 낮엔 흐림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610km

 

김명관 고택: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공동길 72-10
무성서원: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피향정: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산로 2951
동학농민혁명기념관:전북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15
황토현전적지: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하학리)
전봉준선생 고택:전북 정읍시 이평면 조소1길 20
보천교 중앙본소: 전북 정읍시 접지동부길 36

2024.11.16 16:00

토요일 오전엔 일주간의 세상담기 사진클럽 전시회가 끝나고 사진철수를 위해 연제문화원 솔갤러리에 참석했고 오후 4시쯤 부산을 출발했습니다.김명관 고택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했습니다.

 

2024.11.17 07:00

▷김명관 고택

 

김명관 고택은 조선 정조8년(1784)에 지은 집으로 조선 중기 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창하산을 등지고 동진강 상류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동남쪽으로 향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바깥 행랑채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하게 조화를 이룬 사랑채가 보입니다. ㄷ자 형태의 안채의 돌출된 부분에 부엌이 있고,반대로 안체를 감싸며 반대로 ㄷ자 형태의 안행랑채가 있습니다.바깥 행랑채도 2중의 ㄷ자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주인과 행랑채의 일하는 분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눈에 들어옵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터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으로 집터는 지네형국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명당자리입니다. 창하산은 모양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지네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청하산은 지네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창하산의 지네가 벌레[지렁이]를 먹고 자라는데, 벌레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집 앞에 연못을 파서 습기를 유지하여 주고 안산의 독계봉인 닭이 지네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연못 앞에 느티나무 64그루를 반달 모양으로 심어 지네를 감추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배산의 지네는 앞에 있는 연못에서 자라는 벌레를 먹고 안산의 닭은 지네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느티나무로 가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립자 김명관이 사망하면서 “이 집은 12대까지 운이 있는 집이니 팔지 말라”라고 유언할 정도로 명당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사당 측면에 있는 호지집 2채가 남아 있는데 도둑이나 강도 등 위험에 처하였을 때 주인이 호지집으로 피신하였다고 합니다.그리고 사당 옆의 호지집은 정읍 김명관 고택의 노비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노비가 기거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호지집은 요즘으로 치면 경호원 공간입니다.

▷무성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은 고려시대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에서 유래하며, 조선시대 서원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고려말에 없어졌던 서원자리에 1549년 신잠의 사당을 짓고 배향하다가 1696년 최치원과 신잠의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의 사액을 받았습니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 온 말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침 일찍이 마당을 쓸고 있는 분이 보여 인사를 했습니다.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서원 9개소 중 한 곳입니다.무성서원,소수서원,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필암서원,도동서원,병산서원,돈암서원이 9개소인데 저는 돈암서원 빼고는 다 보았습니다.

무성서원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태산사로 최치원을 중심으로 불우헌 정극인,신잠 등 7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태산사에 배향된 분 중에 신잠의 한시를 필사해봅니다.

醉後李花亭[취후이화정] - 申潛[신잠]
술 취한 뒤 이화정에서


此地來遊三十春[차지래유삼십춘] : 이땅에 와서 즐긴지 삼십 년
偶尋陳跡摠傷神[우심진적총상신] : 우연히 옛 자취 찾아보니 마음만 아프구나.
庭前只有李花樹[정전지유이화수] : 뜰 앞에는 다만 배꽃나무만 남아 있고
不見當時歌舞人[불견당시가무인] : 당시에 노래하고 춤추던 이는 보이지 않네.

신잠[1491년(성종 22)∼1554년(명종 9) =64세]은  조선 중기의 중종~명종 때의 문신, 서화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고, 현량과(賢良科) 출신입니다.

무성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47개 서원중 하나이며, 현재 서원내에는 태산사(泰山祠)·현가루(絃歌樓)·강당(講堂)·강수재(講修齋) 등의 건물이 있고,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있습니다. 

정읍 무성서원은 한말 을사의병기에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태인의병 창의를 결의한 곳으로 사적 제166호입니다.우측에 보이는 비석이 병오창의기적비입니다.

▷피향정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으로 호남 제일의 정자라는 의미입니다.피향정(披香亭)은 글자 그대로 연꽃에 핀 향기가 주위에 가득하다하여 향기가 이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형상화한 이름입니다.

피향정에서도 청소를 하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신라말 태산군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이 이곳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합니다. 피향정 앞은 연잎이 가득한 못으로 함벽루(涵碧樓)가 있습니다.여름엔 푸르게 젖었겠지만 지금은 가을이라 갈색으로 함갈루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9시쯤 문을 열것으로 판단하여 시간에 맞추어 가보았는데 맙소사 10시부터 문을 엽니다.그래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황토현전적지

 

동학은 인내천 정신 그대로 "다른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라"는 사상입니다.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여기서 사람(人)은 타인을 의미합니다.그럼으로 타인을 하늘처럼 대하라는 의미입니다.한자에서 "나"라는 것은 보통 我(나 아) 혹은 己(자기 기)로 표현됩니다.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격 수양에 힘쓰고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여기서 인(人)은 다른 사람을 의미하고,기(己)는 자기를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내천(
人乃天)이지 내가 곧 하늘이라는 기내천(己乃天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자신은 하늘처럼 여기고 남은 추상처럼 엄격하게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된 뉴노멀인가요? 

황토현 전적은 동학군이 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동학군은 1894년(고종31년)1월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응징했는데 이후 사태를 진정시키려 온 정부관리는 모든 잘 못을 동학군에게 돌리며 그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수만명의 농민군은 고부 북쪽의 백산에 집결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한다는 기치아래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습니다.동학군은 1894년 5월11일 새벽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동학혁명 기념일은 5월11일로 제정되었습니다.

전봉준 장군을 시작으로 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학군을 잘 표현한 조형물은 황토빛입니다.여기는 황토현입니다.

인내천의 사람 인(人)의 형태로 군상을 배열했는데 그 선두에 전봉준이 있습니다.

 

뒷 산 정상에 오르니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보입니다.그런데 보국안민의 보(補)가 "도울 보"가 아닌 保 "보전 할 보"자로 잘 못 각인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여기는 농민이라는 글자는 빠지고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그 당시는 직업이 대부분 농민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굳이 농민이라고 안해도 된다고 봅니다.그 당시는 농민이 곧 백성이요 지금의 국민이었습니다.여러 직업군 중에서 농민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이 동학혁명에 동참한 것이 아닙니다.

▷전봉준장군 고택

 

초가집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우리 집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50여년전 저도 저런 초가집에 살았는데 전봉준 고택에서는 아궁이가 좌측에 있지만 옛날 우리집은 정지(부엌)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1964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30달러 수준으로 후진국이었고,60년 지난 2024년 기준 34,653달러로 선진국입니다.


전봉준 고택 앞에는 우물이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로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살았을겁니다. 과거의 우물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이곳이 정읍이다보니 우물이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보천교 중앙본소

보천교普天敎는 한때 신도수가 600만이었습니다.그 당시 조선인구가 1800만이었으니 아이,노인을 빼면 거의 대부분 보천교를 신앙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1920년대 민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보천교를 일제가 ‘유사 종교’, ‘사이비 종교’로 매도해 철저히 파괴하려 했던 진짜 이유는 엄청난 신도수에 있을 것이고 두번째로 막대한 독립자금을 댔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교의 대명사, 보천교의 실체는 바로 항일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민족 종교였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와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 등에 전해진 막대한 독립자금의 출처가 바로 보천교였던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항일 투쟁에 나선 보천교인 출신 독립유공자만 154명입니다.이는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숫자입니다. 



600만 보천교 지도자는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이었습니다.월곡은 10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공부법인 한漢나라 서적을 탐독하였고, 19세기 후반기 국내외 정세에도 관심을 가져 동학東學에 가입해 활동한 지역의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체구가 장대하고 걸출한 인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춘 위인이었습니다.

월곡의 부친 차치구車致九(1851~1894)는 전북 정읍시 입암면 출신으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의 정읍 지역 접주였습니다. 1차 봉기 때 전봉준 장군과 함께 고부 관아 습격을 모의했던 20인방幇 중의 한 명이었고, 2차 봉기에서는 농민군 5천을 이끌던 수령이었습니다.

김홍규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보천교 조직의 목방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는데 김좌진 장군에게도 군자금을 제공하였습니다.그 당시 5만원이면 현재로 20억 정도로 추산됩니다.

 

단재 신채호의 부인인 박자혜는 보천교 여성가분인 선포사였습니다.
그 외 나용균,임규 등도 보천교 신자였습니다.

 

특히 십일전(十一殿) 건립공사 5년만에 완공되었는데 1929년 기사년 3월16일 낙성에 맞춰 천자등극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경찰은 불경행위라며 행사 자체를 금지시켰고 보천교 관련 건물을 폐쇄하고 교인을 검거하고 집회를 금지시켜 탄압하였고 일제의 집요한 음해공작으로 차경석은 1936년 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차경석 사후 3개월도 채 안된 그해 6월에 보천교 해체 명령을 내렸고 십일전을 비롯한 건축물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전주 역사 등을 짓는데 쓰였습니다.보천교는 동학의 한갈래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보천교 중앙본소는 대문만 멀쩡하고 대부분의 건물은 퇴락한 모습입니다.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거름이 되었고 여전히 일본을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기득권으로 대를 잇고 있으니 요즘에도 여전히 보국안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염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특히 한국인은 더 없이....

━━━━━━━━━━━━━━━━━━━━━━━━━━━━━━━━━

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