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산이 깊어 울고 왔다가 인정에 감동해 울고 간다는 물의 고장 

 

장수(長水)는 산이 높고 골이 깊습니다.해발 1,000m이상 되는 산이 무려 11개이고 장수땅의 평균 해발도 430m에 이릅니다.그래서 요즘같은 폭염에 부산은 밤에도 기온이 26도 이상 되어 한달 가까이 열대야이지만 장수는 22도 정도로 아주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장수는 오지마을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청정지역이기도 합니다.

장수의 인물은 2덕(德:방촌 황희,수절신 백장) 3절(節:의암 주논개,충복 정경손,순의리 백씨) 5의(義:백용성 조사,정인승 박사,전해산 의병대장,문태서 의병대장,박춘실 의병대장)로 대표되고 그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논개가 13살까지 나고 자랐다는 생가마을인 주촌마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부터 향교를 지킨 향교지기 정경손, 뜻하지 않게 주인을 잃은 후 혈서를 쓰고 연못에 뛰어든 순의리 백씨,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백용성 조사까지 장수엔 유난히 목숨 걸고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많습니다.

예로부터
무진장하면 우리나라 오지마을인데 장수는 그 무진장 중의 하나입니다.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쉽게 접근가능합니다. 긴 장(長)에 물 수(水)를 써서 긴 물이란 뜻을 가진 장수는 뜬봉샘으로 유명한 금강의 발원천이 있고 지명을 보면 계남, 계북. 장계. 천천 등 유독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습니다.


현재 청정지역 장수의 인구는 2만762명(2024.07)으로 한우 2만8천두보다 적다고 합니다.30여년 장수향교의 문화해설사는 장수인구가 2만 7000명 정도로 잘 못 알고 있었습니다.아마도 3만여명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 2만여명이 되었고 지금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노인은 많은데 아기는 보이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평균 해발이 높아서 주변지역보다 기온이 4~5도 낮아서 강원도와 비슷하고 일교차가 커서 과일의 당도가 높은데 사과 과수원이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절개의 고장이며 물의 고장 장수는 여름에 가면 좋은 점들이 많았습니다.  

 

- 일시: 2024-8.16 22:20 ~8.17 17:30
- 날씨: 가끔 비도 뿌렸지만 구름만 높을뿐 맑은 날씨
- 몇명: 홀로

 

▷ 답사일정(風輪) :443km

 

죽림정사(용성기념관,물빛공원):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죽림2길 31 죽림정사

장수성당 수분공소:전북 장수군 뜬봉샘길 51-3

장수가야홍보관: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473-2

의암사(의암공원):전북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 41

장수향교: 전북 장수군 향교길 31-14 장수향교

장수 역사전시관: 전북 장수군 장계면 장계리 960

백장 선생 유적: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산42-1

건재 정인승 선생 기념관: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용연정: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56-12(토옥동 계곡 입구)



 

2024.8.17 00:40 

 

철쭉군락지로 유명한 봉화산 주차장에서 휴식합니다.캠핑카가 몇대 주차되어 있었는데 온도는 22도로 아주 적당하여 휴식을 취하기에 좋았습니다. 

 

2024.8.17

 

죽림정사로 가는 도중 두동마을에서 봉화산을 다시 보게 됩니다.봉화산은 산 정상 근처에 봉화대와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어서 봉화산으로 불립니다. 

 

 

 

 

▷죽림정사

죽림정사는 독립운동가 백용성(白龍城) 조사 탄생성지입니다.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이시고 이 운동의 막후기둥이셨습니다.14세에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동학 최제우의 은적암과 같은 장소)에 출가하여 3년간 혜월화상의 지도를 받아 16세에 해인사 극락암에서 회월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하여 득도 사미십계를 수지하였습니다.

용성 스님은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하였는데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 :자각각타)"고 하여 서민들의 삶과 동 떨어진 산중불교 중심에서 불경을 한글번역 하는 등 사회변화에 맞추어 중생과 함께하는 대중불교로 전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경전 번역과 어록저술을 발간 유포하여 불교도의 안목을 높였고 백운산 화과원을 설립하여 선농일치로 사원경제의 자립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기지로 활용했습니다.독립운동 관련 1년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고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을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

- 일본법원 재판장에서

  

용성기념관의 주련은 오도송입니다.

백용성 진종 선사(龍城 辰鍾, 1864-1940)

 

金烏千秋月(금오천추월)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洛東萬理波(낙동만리파) 낙동강 만 리의 파도로다

漁丹何處去(어주하처거)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依舊宿蘆花(의구숙노화) 옛처럼 갈대꽃에 머무는구나.

 

8월 신라불교 초전법륜 성지(聖地)인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동 아도모례원 모례샘 근처에서 용맹 결사 정진 끝에 진실(眞實)의 지견(知見)이 열리어 보리도(菩提道)를 증오(證悟)한 오도(悟道)를 하시고  병술년 23세(서기 1886년) 때 낙동강을 건너시면서 지은 오도송입니다.

 


백용성 조사의 저서는 조선글화엄경,선한역대방광불화엄경,신역대장경,조선어능엄경 등 한글로 번역한 불교경전들로 근대 한국불교의 대중화와 방법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들입니다.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며 한글 번역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한 인물입니다.

 

또한 백용성 조사는 3.1운동을 준비 할 당시 만해 한용운이 "흰바탕 위에 푸른색의 대한반도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했고 천도교,기독교장로회측은 무방하다는 견해를 보였는데 용성 조사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에 대한 설명문을 내어주며 태극 원리를 설명하고 천도교 이상의 경지인 한울이나 기독교 이상의 경지인 천국이나 불교 최고 의상인 열반이 궁극적으로는 태극과 같으므로 모든이가 태극의 지리를 깨우치게 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아울러 "반도기를 사용하면 발해와 고구려의 옛땅을 포기하자는 선언임을 동시에 삼천리 반도강산만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한정된다"고 역설하여 결국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물빛공원

죽림정사 바로 옆 하천 건너편이 물빛공원입니다. 동화호에 이어지는 댐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천에는 낚시를 즐기는 2분이 한가로운 더운 여름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장수성당 수분공소

 

1866년 대원군이 천주교를 탑안하는 교령을 내린 이후, 외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운 공소입니다.1920년대 한옥 성당으로 공소(公所)는 천주교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천주교신자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 성당으로 정기적으로 본당에서 신부가 파견되어 종교의식을 행합니다.

뜬봉샘 방문자 센터 근처 안쪽에 있습니다.

▷의암공원(장수가야홍보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문이 잠겨 있어서 방문하지 못했습니다.장수가야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알고 싶어서 방문했습니다만 이에 대한 갈증은 장계면에 있는 장수역사전시관에서 해갈되었습니다. 


구름이 높게 오르면 일순 비를 뿌리기도 합니다만 탐방 때 비는 오지 않았고 부산으로 되돌아 오는 시간에 비를 뿌렸습니다.

맞은편 의암루 아래 길로 우측으로 들어가면 의암사가 나옵니다.

▷의암사 / 의암부인 주논개는 기생이 아닙니다.

의암사로 들어가니 우측에 논개생장향수명비가 있습니다.수명비(竪名碑)란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논개생장향수명비는 헌종 12년(1846)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서 세운 비석으로 장수현감 정주석이 비문을 지었으며 비문은 호남절의록 내용과 설화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이 비는 일제강점기 파괴 될 위기가 있었으나 장수군의 젊은 청년들이 맡에 묻은 후 곡식을 심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고 광복 후 비를 파내어 비각을 건립하고 비를 세웠는데 1974년 의암사 이전 후 현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의기( 義妓:의로운 기생)로 되어 있는데 안내문에라도 의기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내용을 첨가해주면 좋겠습니다.

 

논개의 충절을 읊은 변영로 시인의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는 시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 남강에서 왜장(倭將)을 껴안고 물에 빠져 순절한 ‘기생 논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기생이 아니었다는 것은 많이 알지 못합니다.

논개는 신안주씨인 주논개(朱論介)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1574년 9월 3일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나 17세 때인 1591년에 장수현감 최경회와 결혼합니다.가세가 기울어 후처로 갔다고도 전해집니다.

 

특이하게도 주논개는 4갑술(갑술년,갑술월,갑술일,갑술시)의 사주를 타고 태어나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를 짚어보고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며 이름을 논개(놓은 개="놓은"은 "낳은"의 사투리)라고 지은 것은 사주의 戌(개 술)이고 그렇게 이름을 붙이면 역신도 시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희는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됩니다.경상도에서도 인근 진주성만 점령당하지 않고 왜적과 악전고투하는 것을 안 최경희는 의병을 이끌고 김시민의 진주성을 지원해 승리를 거둡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경상우병사로 임명된 최경희는 수많은 군관민과 함께 싸웠으나 28일 만인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해 자결합니다.(제2차 진주성 싸움).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려고 칠월칠석날 잔치를 벌이면서, 조선인은 오직 기생만 출입을 허용한다고 하여 주논개는 부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변장하고 촉석루 연회장에 들어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투신합니다.그녀는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적장을 강에 밀어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리 열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 )와 춤을 추는 척하면서 깍지 낀 손으로 허리를 끌어않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적장과 함께 순절합니다.

이런 주논개는 어떤 충절인사에 못지않은 열사요, 의사입니다. 그러나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입으로만 전해오다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으로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나옴으로써 기생으로 잘못 알려지게 됩니다.
의암부인 주논개는 기생이 아니었으므로 의기(義妓)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순절할때 주논개 나이 19세때 였습니다.

 

오늘은 의암사 뒤로 배롱나무가 강낭콩이나 양귀비 꽃 만큼이나 붉은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의암사 현판글씨는 더 없이 추상같은 절의가 느껴집니다.




▷장수향교 

입구에 정축복비가 있습니다.정유재란 때 장수향교를 지켜낸 정경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헌종 12년(1846)에 세운 것입니다.정경손은 당시 장수향교를 지키는 노비의 신분이었는데 왜적이 향교에 불을 지르려하자 앞을 가로막고 "여기는 성전이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꼭 들어가려거든 나를 죽이고 들어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그의 기개에 감동한 왜장은 "본성역물법(本聖域勿犯: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이라는 글씨를 써주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호성충복정경손수명비(護聖忠僕丁敬孫
竪名碑)...성스러운 곳을 보호한 충복(충성스러운 종) 정경손의 이름의 비석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향교하면 그 고을을 다스렸던 관찰사,목사,군수의 선정비,송덕비,불망비가 대부분인데 노비였던 정경손의 비를 향교 입구에 있다는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예가 되기도 하지만 이 곳 장수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보여줍니다.

문으로 들어가면 촤측 비가 도열된 안쪽에 향교이건사적비가 있는데 그 내용은 예전 향교가 있었던 당곡(堂谷)은 
장마가 들면 물에 잠기는 등 습하여 터가 좋지 않아 현감 이선연이 유생 한익삼에게 감독하게 하여  터가 좋은 곳으로 옮겼다는 내용입니다. 

 

두번에 걸친 왜군의 침입으로 현존하는 234개의 향교 대부분이 훼손된 후 임진왜란 이후 다시 만들어졌지만 장수향교는 조선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2008년 4월 현재 310호까지 지정된 국보급 문화재와 1558호까지 있는 보물급 문화재에 포함된 향교 건물은 모두 4곳으로 강릉문묘 대성전(보물214호), 장수향교 대성전(보물272호), 나주향교 대성전(보물394호), 영천향교 대성전(보물616호)이 바로 그 것입니다.

강릉향교는 고려충선왕 5년(1313)에 세웠고,
나주향교는 태조7년(1398년),장수향교는 태종7년(1407),영천향교는 세종17년(1435년)에 세워졌습니다. 



장수향교 명륜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낮은 누각의 느낌인데 동량 아래 대들보는 더 굵고 좌측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지세를 감안하여 더 길어집니다.정경손 덕분에 617년된 향교 건축물을 보는 것이 됩니다.

행운스럽게 대성전 문이 열려 있었는데 향교는 본래 건물이 지어진 형식과 규모에 따라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의 3등급으로 나누어집니다.장수향교는 규모가 작은 소설위(小說位)에 해당했던 장수향교는 공자와 4성, 송조 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현만을 배향하게 됐습니다만 1949년 향교를 이끌고 있는 유도회(儒道會)의 결정에 따라, 대성전 좌우 동무와 서무에 있던 것을 대성전에 우리나라 18현을 함께 배향하기로 하여 현재는 총 2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천정을 보니 이중 처마에 대들보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상당히 웅장한 느낌이었습니다.

▷장수역사전시관

장수지역에 가야고분이 이렇게나 많이 산재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장수고분현황을 보니 동촌리 가야고분군 등 18개 지역에 240여 기의 고총이 발견되었다고 헙니다.

▷백장 선생 유적

2덕 3절 5의의 인물에서 2덕에 해당하는 분이 방촌 황희정승과 수절신(정신재) 백장선생입니다.백장 선생은 고려 공민왕때 대제학의 높은 벼슬에 있었으나 이성계의 반정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치악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편찬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분으로 조선건국 초 동요된 민심을 수습할 길이 없던 이성계 및 이방원은 백장선생을 불러들이게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이곳 장수에 유배되어 1418년(태종18년) 생을 마쳤습니다.

 

백장의 재실은 현재 관리가 상당히 부실해보였고 재실 내 마당엔 풀이 자라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재실 입구에 백장 선생의 묘가 있었고 근처에 신도비도 있습니다.

▷정인승 기념관

 

정인승(1897~1986) 선생은 애국지사이며 국어학자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10월 연행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고문으로 왼쪽 귀가 굳어 짝귀가 되기까지 했습니다.1936년에는 큰사전 편찬사업을 했고 1957년 한글날 21년간의 각고 끝에 큰사전 6권 완질을 펴냈습니다. 

함흥 감옥생활 확정 되기 전 세가지 기쁜소리(삼희성:三憘聲)가 있었는데 정인승,김윤경,이희승,이석린,이병기 다섯 사람은 홍천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 첫째는 "밥이요",둘째는 "취침",세째는 "우편이요"라는 소리가 삼희성이였다고 합니다.형을 확정 받은 감옥이 아니라 취조 중인 유치장이었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고 하니 이 3가지 소리는 우선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 이 기쁨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용연정

 

용연정은 양악리에 살던 정존성이라는 이가 소요하던 곳에 그의 손자 정기수가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정자 중간엔 1칸 밀실이 있습니다.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입구에서 덕유산의 토옥동계곡을 따라 약 1km 올라가면 층암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소를 이루는 용연이 나오는데 용연정은 용연 바로 옆의 언덕에 서 있습니다.

전면 중앙칸에 용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벽면에 한말의 우국지사인 연재 송병선(1836~1905)이 지은 기문과 심석 최병심이 지은 제액이 걸려 있습니다.


연재 송병선과 심석재 송병순은 형제입니다.

한말 우국지사 심석재 송병순의 시 "용연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小閣新成境最凉소각신성최경량 
壓臨飛瀑幾尋長 압림비폭기심장 
龍藏不起人間雨 용장불기인간우 
魚躍飜看碧上光 어약번간벽상광 
仙夢喚來時聽笛선몽환래시청적 
好詩詠罷更滿觴호시영파경만상 
主翁那得淸如許주옹나득청여허 
氣味曾同顧建康기미증동고건강

 

작은 누각 새로 지어 경내 모두 청량하고
굽어보는 폭포 몇 길이나 깊은지
용이 숨어 일어나지 않아도 인간 세상에 비 내리고
물고기 뛰어올라 뒤집히니 벽 위에 빛이 보이네
신선 꿈 불러올 때 피리소리 들리고
좋은 시 읊고 나서 다시 술잔 채우네
주인응은 어찌 청아한가?
정취가 건강의 고헌지와 같네

 

 

장수 양악탑(陽岳塔)은 본래 토옥동 계곡 입구의 계단식 논에 있었는데 탑이 있던 자리에는 심방사(尋訪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정확한 명칭과 창건시기를 알 수없어서 지명을 따라 "양악탑"이라고 했는데 고려시대 작은 석탑입니다.

용연정 위쪽으로는 1996년에 조성된 저수지인 양악댐이 있고,주위에 무병장수마을이 있습니다.한자를 보지 않으면 지명이 장수(長水)이지만 무병장수의 장수(長壽)도 떠오르고,군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인 장수(將帥)도 떠오를겁니다.
 

 

홀로 전세내어 용연정 정자에 누워있으니 주변 여름소리(?)가 많이 들리지만 소음은 아닙니다.이럴 땐 한시의 흉내 내어 주위 풍경을 소리와 빛깔 및 저의 심정으로 나열해 봅니다.

 

초록 숲 짙은 녹음 여름 날 구름 높고
용연정 그림자 계곡수 거꾸로 비치네
풀벌레소리 물소리 실바람 불어 오고
저 멀리 내 차 보이니 집으로 갈 시간

 

숲속의 꿩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날아오르자 덩달아 말이 놀라 실족하여 벼랑 밑으로 떨어져 현감이 목숨을 잃은 것을 뒤를 따르던 통인이 "타루"라는 두글자를 적고 순절한 것이 "순의리 백씨"인데 의암 주논개,충복 정경손과 함께  3절에 들어갑니다.5의에 들어가는 백용성 조사,정인승박사 이 외 3분은 의병대장입니다.전해산 의병대장은 31세에 옥사,문태서 의병대장은 34세 나이에 옥사했으며 박춘실 의병대장은 40세에 자결하였습니다. 

요즘 뉴라이트라는 "변종 극우 이데올러기"가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전우용 역사학자의 뉴 라이트 인간관 정의를 보면 "인간이란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동물이다". 얼핏 들어보면 설득력있게 들립니다만 요약하면 "주어진 조건에서 1)기회주의, 자기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2)이기주의,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3)물질 만능주의"를 "뉴라이트의 인간관의 본질"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타인의 생명을 경시하고 손쉽게 약탈하는 모습을 봅니다.또한 중국에서는 트럭이 전복되어 술병이나 과일이 쏟아지면 주인이 버젓이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쏟아진 적재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뉴라이트 인간관을 보면 앞으로의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전망됩니다.

우리나라는 광주민주화 당시에도 가게를 약탈하는 문화는 없었습니다.오히려 주먹밥을 만들어 내주어 대동(大同)의 모습을 보였습니다.도로에 물건이 쏟아지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서로 도와서 청소를 하고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드립니다.  

 
산이 깊어 울고 왔다가 인정에 감동해 울고 간다는 물의 고장 장수에서는 무엇을 중요시 하고 있는지가 더 느껴집니다.장수에서는 자신의 원칙이나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하고,정직하고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느껴졌고,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물질만능주의가 아닌 도덕을 중시하여 장수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임이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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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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