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일원)부여는 사비스럽다.가을처럼 쓸쓸하다.전화의 흔적처럼,구드래 빛깔처럼

(부제:통일의 현장으로 가보는 가을답사.)

 


- 언제 : 2013.11.10  05:00~11.10  22:00

- 얼마나: 2013.11.10 10:30~17:30
- 날 씨 : 구름가득 이후 점차 갬
- 몇 명: 44명 (with W,D)
- 어떻게 :고적답사회 동행

개태사-왕릉원(능산리고분군)-부소산성-삼충사-반월루-낙화암-고란사-정림사지-국립부여박물관-궁남지
 

 

한때 부여는 백제의 왕도였다.그러나 지금 그 자리를 간들 별로 남은게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흡사 폐사지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폐사지에 가면 모두가 없어지고 가끔 다이아몬드같은 아주 단단한 보물만 한점 남아 있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쓸쓸한 가을과 닮았다.그래서 부여 답사는 가을에 가는 것이 오히려 좋을지 모른다.

 

사비성(泗沘城)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성(城)이다.반월성이라고도 한다.공교롭게도 일본말 "사비시이(さびしい)[·]"는 "쓸쓸하다"는 뜻이다.패전국 황성옛터 사비성의 사비스럽다가 일본말 사비시이가 된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쓸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제대향로가 능산리고분군 근처에서 발견된 이후 능산리고분군은 "왕릉원"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고,계백장군의 황산벌의 황산黃山이 지금은 천호산天護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다시 한번 찾아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컴컴한 새벽에 나와 고적답사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하니
아직 구름이 가득하다.전날 비가 내려 상쾌한 기분이 들고 점차 날이 좋아짐을 느낀다.

 

 

 

 

 

개태사(開泰寺)

 

고려 태조 왕건이 태조 19년(936) 후백제의 신검에게 항복을 받고 논산시 연산면 천호(天護 : 黃山을 천호산으로 개명)리에
창건한 화엄종 사원. 고려 태조는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베풀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음. 그 뒤 태조의 영전(影殿 : 초상화가
있는 전각)이 설치되고, 태조의 옷 한 벌과 옥대 1요를 보관.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태조의 영전에 나아가
길흉을 점쳤으며, 공민왕 11년(1362)에는 강화도천도 여부를 점치기도 함.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김.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 석탑, 쇠솥 등이 현존.

 

한편 13세기 중엽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교감을 책임진 승통(僧統) 수기(守其)가 주지로 역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개태사이다.왕건이 "태평성대를 연다"는 의미로
절이름을 지었다고 하고,이 앞의 벌판이 바로 황산벌이며 뒤로 보이는 저산이 황산이었으나
황산벌 전투 이후 하늘의 보호를 받았다는 의미로 이후 천호산으로 불리어진다.


불자로서 부처님 사진찍기가 곤란했지만
오늘은 역사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왔으므로 부득불 사진을 찍는다.

 

개태사 삼존석불이 인상적이다.
개태사 삼존석불은 왜적의 침입에 의한 불상의 훼손과 관련된 부처의 이적(異蹟) 전설이 있다.
혹시 불상의 얼굴이 태조 왕건의 얼굴형상인가 싶어 자료를 찾아보니
삼존석불은 조선시대 작품이다. 

 


 

 

 

개태사의 철확이라는 솥이 눈에 뛴다.된장을 끓였다는 솥으로 크기가 엄청나다.
이 솥만 보더라도 예전의 개태사 규모를 짐작 할 수 있다.

 

 



 

 

 

점차 구름한점 없는 가을하늘을 보여준다.개태사 5층석탑은 고려전기 작품이다.
개태사 뒤로 보이는 천호산은 가을을 맞아 오늘만큼은 누렇게 단풍이 들어
다시 예전의 이름 황산(黃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왕릉원이다.예전엔 능산리고분군으로 이름이 불리어진 곳이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왕릉원 근처 능사(가칭)의 현장은 폐사지 복원의 모습 그대로이고
뒤로 부여 나성이 절개되어 있다.판축기법 토성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일부 절개한 모습이다.

이 능사 사지는 1995년 발견된 사리감에서 "백제 창왕13년(567년) 정해공주가 이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창왕은 백제 위덕왕(554~598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이 재위 13년 되던 해에 아버지 성왕의 위하여 만든 사찰로 보인다.


역대 백제왕의 연표를 보면 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으로 끝맺는다.

 



 

 

백제 대향로 발굴덕분에 능산리고분의 가장 큰 무덤은 백제 성왕의 릉으로 판단되며
그곳은 무덤 내부의 벽화엔 사신도와 연자방이 있다.
연자방은 연꽃씨앗이 들어있는 모습으로 "환생,재생"을 의미한다.

 

 

 

 

쓸쓸한 백제 왕릉원으로 내려오니 갈대꽃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부소산성(扶蘇山城)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산성으로, 성왕이 사비에 천도한 전후 시기에
백제의 왕도를 수호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축조. 성 안에는 영월대지(迎月臺址)
영일루(迎日樓)군창지(軍倉址)낙화암,고란사,삼충사(三忠祠 : 성충,흥수,계백,궁녀사(宮女祠) 등이 위치.

 

 

구드래솥밥집에서 알밤탁주를 곁들인 식사를 마친 후 부소산성을 오른다.

 

삼충사에서 잠시 휴식하며 장시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단풍이 물들은 숲을 지나 삼충사에서 성충-흥수-계백의 이야기와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왕이 아니라 한때는
해동증자로 불릴만큼 효심이 뛰어났으며 뛰어난 외교로 신라를 고립시킨후 성을 70여개
빼았았던 영명한 왕이었음을 문화해설사가 강조한다.

 

그래도 재위 마지막 4년 정도는 성충이나 흥수같은 충신의 말을 저 버리고
나라를 빼앗기게 되니 그 누구든 자만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다.

 

반월루가 보이는데 그곳에 서니 부여와 백강(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화정을 지나니 낙화암이 있고 낙화암을 돌아나오자마자 좌측 아래로 내려가면 고란사이다.

 

 

 

 

고란사(皐蘭寺)

 

고란사(高蘭寺)라고도 하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扶蘇山)의 낙화암 아래에 위치한 사원.
백제 말기 국왕들이 노닐기 위한 정자, 궁궐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견해가 전함.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고려 현종 때 경에 백제의 후예들이 낙화암(落花巖)에서 희생된
삼천궁녀의 위로를 위해 세웠다고도 함.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
사원 뒤의 바위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남.

한편 낙화암 아래의 백강 물굽이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일화가 있는 조룡대(釣龍臺)가 위치.
 

 

은행나무 열매의 냄새가 진동하는 극락보전 앞을 지나 뒤로 가면 우물이 있다.
금강산 만장대의 만장천처럼 한모금 마시면 수명이 3년 연장된다고 한다.

백강으로 나오면 조룡대가 있다.조룡대는 백강이 백마강으로 불리어지는 이유다.

 

 

 

 

 

 

구드래의 어원도 알게 된다.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이제 다시 산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하산을 한다.

 

 

 

주차장으로 가는데 조각공원 근처 미마지 관련 사적비가 보인다.

미마지사적현창비(味痲之事蹟縣彰碑)다.


미마지(味摩之)는 日에 백제기악 전수한 '한류 원조'로 612년 백제인 미마지가 기악을

왜(일본)에 전한 것에
대해 일본 최초의 정사인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고
미마지가 전했다는 기악의 내용과 구성은 일본 법륭사
(法隆寺) 및 서대사(西大寺)의 자재장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당시 가면극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가면과 악기가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동경국립박물관과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돼 있다
.

 

 

 

 

 

그 다음 도착한 곳은 정림사지이다.

오층석탑에 씌여있는 소정방의 "대당평백제국비명"은 패전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소재의 백제 사원 터. 1942년 절터 발굴조사 때 정림사(定林寺)라는
명문의 고려시대 기와편이 출토. 이후의 박굴 조사 결과,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을 두른 장방형의 남북1탑식가람(南北一塔式伽藍) 형식으로 확인.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고려시대 때 조성된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 등이 현존.

 

 

 

 

 

 

 

 

그리고 인근에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았다.여기선 무엇보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 위함이다.

향로의 아래는 불교의 연꽃이 보이고 위로는 도교적 신선이 보인다.

아래는 물과 음을 나타내는 용이 보이고 위에는 양을 의미하는 봉황이 자리잡고 있으며
향로 윗뚜껑을 보면 산들이 보이는데 그 사이로 향의 연기가 빠져나오는 구멍이 있다.
향을 피우면 그 연기들이 흡사 산골짜기를 떠도는 운무처럼 연출 된 후 하늘로 오른다고 한다.

 

7세기 백제에서 만든 걸작이다.그 주변을 여러번 돌아보며 감탄하였다.
전면과 측면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궁남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으로 크기가 상당하다.그런데 예전엔 정말 엄청난 크기였으나
지금은 아주 그 일부만 정비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신선정원으로 연못 속에 세 개의 섬(삼신산=봉래산,방장산,영주산)을 꾸몄다고 한다.
백제 무왕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연꽃으로 유명하고 오늘은 국화축제로 인하여 국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제문화단지도 만들어졌지만 앞으로 백제유적들이 좀더 복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 되길 기원해본다.

 

 

 

 

 

 

 

 

 

 

노을지는 궁남지를 끝으로 답사를 마친후
함께한 분들과 함께
막걸리 한잔하며 다음 답사를 기약하였다.

 

 

 


━━━━━━━━━━━━━━━━━━━━━━━━━━━━━━━━━


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