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남산)무지개를 보기 위해서는 가끔 비를 맞아야 한다.

- 언제 : 2010년 11월14일 10:30~17:00
- 얼마나: 2010.11.14 11:30~16:00
- 날 씨 : 맑음
- 몇 명: 3명(W & D)
- 어떻게 : 자가승용차 이용
▷부처골감실여래좌상-탑골마애조성군-보리사 석조여래좌상-미륵곡 마애여래좌상
-통일전-남산리 절터-전 염불사지-서출지
- 테마: 문화유산답사여행
- 호감도ː★★★★

 



경주 남산은 노천박물관이다.워낙 많은 불상들과 탑들이 지천에 놓여있어서 몇번 다녀왔다고 해도 머릿 속에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곳이다.그래서 몇 개의 코스를 만들어 시리즈로 다녀오려고 계획을 세웠다.이왕 가는 길에 가족과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서 토요일 저녁에 의중을 떠 본 결과 동행하겠다고 한다.

 

막상 일요일이 되니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는다.나 혼자 다녀오는 길이라면 등산코스가 주를 이루는 경주 남산 중에서도 서남산 코스를 선택하겠지만,산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니 되도록이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로에 인접한 코스인 동남산 코스를 선택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일요일 아침부터 뭉기적 거리며 좀체 자리를 뜨질 못한다.혼자라면 아침 새벽에 출발하여 멋진 사진도 찍을 수 있을터이지만 결국 나의 꾐에 내가 걸려든 형국이다.자충수를 후회하며 독려한 결과 그래도 10시 반에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늦게 출발해도 오늘 코스는 충분하다.가족들과 여러번 경주를 찾았지만 오늘 가는 코스는 나도 초행길이다.1년 내내 나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런대로 괜찮은 코스가 나오면 동행을 해보지만 항상 후회를 한다.문화유적을 보는 수준도 다르고 뭔가 걷는 코스만 나오면 맥 빠지는 몸짓이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래도 어쩔 수 없다.석달에 한번 정도는 동행을 해야 누가 보더라도 나는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 가끔은 비를 맞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처음 찾은 곳은 감실부처님으로 유명한 부처골감실여래좌상이다.주차를 하고
500M를 걸어올라가면 볼 수있는데 중간에 대나무 숲이 나오면 두갈래 길이
나온다.이때 오른쪽으로 오르면 된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불곡 석불좌상, 보물 198호)

부처골이지만 완전히 골짜기는 아니고 골짜기에서 산등성이로 좀 올라 있는 곳에 있다.
바위높이 3.2m가 되고, 밑 너비가 4.5m 되는데,그 속을 90CM 정도 파 들어가서 감실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흡사 부처가 돌집 속에 앉아 계신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 가장 일찍 조각된 7세기 초의 작품이라고 하며 유홍준 저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에도 상세히 나와 있듯이 상당히 친숙한 모습이다.친근,조순,인자한 신라여인을
모델로 한것으로 고신라불상의 백미라 할 수 있다.선덕영왕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있다.

 

 

 

 

 

 

 

탑골마애조성군으로 가려면 옥룡암으로 가면 된다.옥룡이 들어 앉을 위치엔

계곡이 있는데 여기는 당단풍이 빨갛게 물들었으며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관음전도 일부러 비질을 안했는지 돌계단이든 마당이든
단풍낙엽으로 깔려있었다.

 

 

 

 

 

옥룡암 뒷편 바위에 마애불을 비롯한 다양한 것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9층 목탑의

모습,천마도,비천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인물 묘사가 굉장히 서양
분위기가 나는 모습이 보였고,과거 신라에서는 볼 수 없었을 야자수 같은 남방의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여기 명칭은 탑골인데 아마도 바위에 새겨진 9층 목탑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아내는 경주를 여러번 왔지만 이런 곳은 처음 왔다며 무척 좋아하는 눈치다.
아마도 단풍과 색다른 마애불에 매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불상은 그게 그거 같이 모두 비슷비슷하다.그렇지만 이곳은 분명히 다른
분위기를 낸다.그것은 아마도 신인종이라는 종파의 분위기 때문으로 보인다.

 

탑골 부처바위 마애조상군(탑곡 마애조상군, 보물 201호)

높이 10m, 둘레 약 40m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마애조상군의 만다라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신인종(神印宗)계통 사찰의 조각이라고 한다.


남면에는 삼존불과 독립된 불상이 있고, 동면에는 본존과 보살이 있고 하늘에서
날아 내려오는 7구의 비천상이 있으며, 북면에는 9층목탑과 7층목탑이 있고
그 가운데에 연화대 위에서 설법하는 부처님이 계신다. 서면에는 바위면이 좁아
부처님 한 분과 비천 두 구가 있다. 바위 남쪽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다.

 

 

 

 

 

 

 

백과사전에서 신인종을 찾아보니 고려초에 성립된 밀교계통이라고 한다.

 

신인종 [神印宗]은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 명랑(明朗)을 종조로 하는 불교의 한 종파이다.

 

밀교 계통의 종파로 고려초에 성립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종조(宗祖) 명랑(明朗)은

사천왕사 창건에 관련된 고승이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은 귀국하여 이 사실을 조정에 전했는데, 신하들이 당시 용궁에서 신통력을 배워왔다는
명랑법사를 모셔와 대책을 상의하자고 권했다.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처 절을 다 짓기도 전에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이 들리므로
오색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장을 만들어 유가명승 12명과 문두루비법으로 기원을
드리자 사나운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뒤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문두루비법은 신인법(神印法)이라고도 하며 《관복정마봉인대신주경》에 나오는 밀교적
비법이다. 이 비법은 고려초에 명랑의 후예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에게 이어졌다. 고려 태조
가 국가를 일으킬 때 해적이 침입하였는데, 이 두 승려가 문두루비법을 사용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두 고승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라는 절을 세웠으며, 신인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불교 종파는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이 종파만은 순수하게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치가 있다. 조선초까지 이어져 11종(宗)에 들었다고 하며,
억불숭유 정책으로 7종으로 축소될 때 중도종(中道宗)과 합쳐져 중신종(中神宗)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등산도 별로이고 문화유산답사도 별로인 딸은 예쁜 단풍을 귀에 꽂고
광녀(狂女)놀이를 하고 있다.

 

 

보리사는 비구니 사찰로 보인다.상당히 깔끔한 인상이다.
뒤쪽 한켠에 최근 만들어진 불상 같이 상당히 보존이 잘된 불상이 보인다.
아내와 딸이 수군대고 있어서 물어보니 낼모래 시험으로 참여하지 못한
아들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보리사 석조여래좌상(미륵곡 석불좌상, 보물 136호)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불상이다.8각의 대좌위에 앉아
있으며,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화불과 보상화, 그리고 당초무늬로 장식되어
상당히 화려하다.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상을 가는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그 예가
드물다고 한다.딱 한눈에 보아도 통일신라시대 직품인데 8세기 후반의 제작
으로 보이며 전체높이 4.36m, 불상높이 2.44m의 대작이다.

 

 

 

보리사 주차장에 보면 이정표가 있다.그길을 따라 제법 가파르게 150M
를 오르면 미륵곡 마애여래좌상이 나온다.얇게 음각되어있고 입술이 도툼한
모습이다.


미륵골 마애여래좌상(보리사 마애석불, 지방유형문화재 193호)
보리사 절 앞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로 150m 정도 올라
가면 경사가 급한 산허리 바위에 좌상이 새겨져 있다.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헌강왕릉이 나온다.왕능치고는 형태가 상당히 심플하다.
왕릉에 올때 마담 느끼는 것이지만 소나무 숲이 만들어내는
운치가 좋다.

 

헌강왕릉(사적 187호)

헌강왕(憲康王, 875~886)은 신라 최성기의 왕으로서 이때에 서라벌에는
모든 집들이 기와집이었고, 밥은 숯으로 짓고, 거리에는 노래 소리로 가득했던
태평성세였으며,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능은 흙으로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장대석을 4단으로 쌓아 보호석으로 삼았다.



헌강왕 시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왕 6년(880)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들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하고는 다시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하였다.

 

헌강왕릉 근처에 헌강왕의 아우였던 정강왕릉이 있다.
능의 모습과 분위기가 헌강왕릉과 비슷하다.

정강왕릉(사적 186호)
정강왕(定康王886~887)은 재위 1년만에 병환으로 돌아가시게 된 왕으로서,
왕 2년(887) 봄 정월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고 강설을 들었으며,
이찬 김요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아들이 없어 유언으로 여동생(眞聖女王)이
왕위에 올랐다.

 

 

 

통일전에 들러 참배하고 남산리로 간다."전 양피사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있듯이 양피사로 추정되는 곳이다.

 

남산리사지 쌍탑(남산리 삼층석탑, 보물 124호)

 

동서로 나뉘어진 이 남산리 쌍탑 주위는 민가가 들어차서 옛 자취를
더듬어 볼 수가 없다. 서탑은 이중 기단의 일반 양식이나 통일중기에 나타난
탑의 기단부에 팔부중상이 잘 남아 있고, 동탑은 광대한 이중의 지대석 위에
세운 전탑의 양식을 띠고 있다.

 

 

 

차를 몰아 꼬불꼬불 제법 해매었는데 알고 보니 전 양피사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리 절터(염불사지)

 

서탑은 탑재가 거의 제자리에 무너져 남아 있고, 동탑의 탑재들은 옮겨져
동방동 소재 이거사지 탑재와 합하여 현재 불국사 역전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이 절에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스님이 있었다. 늘 아미타불을 염하는데
그 소리가 성안에까지 들려 3백 60방 17만 호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소리는 한결같이 낭랑하였다. 그로써 그를
이상히 여기며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를 모두 염불스님이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른 이름이다.

 

 

두부와 칼국수를 먹고 난 후 마지막으로 둘러 본 곳은 서출지이다.
나는 예전에 한번 본 곳이다.

 

서출지(사적 138호)

 

서출지는 통일전 주차장 바로 남쪽에 있는 연못으로서 이 연못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이 즉위하신 지 10년 되던 해(488) 정월에 왕궁을 명활성에서
월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정월 보름 신하들을 거느리고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이르기를,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찾아 가
보시오." 하였다.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 하였다. 남산 동쪽 피촌(양피사촌)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한참 구경하고 있다가, 문득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
버리고 길가에서 헤메고 있었다.


 

이 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겉봉에 쓰기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떼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
라고 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은 서민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겨 떼어보니, 그 글에 「거문고갑을 쏘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으로
돌아와 거문고갑을 쏘니, 내전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가 잠통(潛通)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형 되었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의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꺼려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며, 정월 15일을 오기지일(烏忌之日)이라고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내니, 지금까지도 이를 행하고 있다. 속된 말로 이를 달도(怛忉)
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며 모든 일을 꺼려 금한다는 말이다.
이 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이름하였다.



이 사건은 쥐와 까마귀 등으로 대표되는 재래의 신앙집단과 분수승(焚修僧)으로 상징
되는 신흥종교인 불교와의 충돌로 이해되고 있다. 즉, 이 서출지의 사건은 아직 불교의
전래가 미진하였던 소지왕대에 발생한 종교적 대립이며, 보수세력인 원시신앙 집단의
우위로 마무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연못 위에 걸쳐져 있는 건물은 이요당(二樂堂)으로서, 1664년 임적선생이 지은 건물이며,
서출지는 7월 말에서 8월 중순까지 백일홍과 어우러진 연꽃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서출지를 끝으로 경주 남산의 동쪽을 모두 훓어보았다.이번 코스는
거의 차로 이동해서 별로 힘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유적을
찾다보면 알게모르게 약간의 운동도 되는 곳이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코스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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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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