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홍류동 소리길)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니

- 언제 : 2012.2.5(일) 09:00~18:00
- 얼마나: 2012.2.5 11:20~15:00
- 날 씨 : 맑음
- 몇 명: 2명(with wife)
- 어떻게 : 자가SUV 이용
▷해인사-원경왕사비-해인도-학사대-소리길-농산정-소리길 입구

 

 

풍류라 함(曰風流)은 그저 우아하게 멋지게 시나 짓고 노는 것이 아니다.호국이라는 나라사랑이 기본적으로 제시된다.최치원은"낭혜화상비문"에서 장생을 구하여 학을 타고 날아다니며 고고함을 구하는 중국 선도를 깎아 내리며,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여 세상을 위해 몸을 적시는 진정한 선의 길을 제시하였다.신채호 선생은 "규원사화"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선(仙)이 한민족 고유의 것이며 이것이 일제치하 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낭가사상"이라고 보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서문에서도 한민족의 선(仙)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을 뚜렷하게 적어 놓았다.따라서 풍류 선맥을 따라가다보면 국가의 위란 시마다 구국의 투혼을 보여온 분들과 마주하게 된다.이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풍류로서 자연과 벗하다가도 국가의 위난 시나 대변국기에는 어김없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고,헌심함을 꺼지리 않았다.

 

최치원은 풍류도의 선맥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조선조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도 나오고 청학집에도 나온다.젊은 시절에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유명하고,이후 신라로 귀국하여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이후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 머문 것으로 되어있다.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논어에 "邦有道則仕(방유도칙사)하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邦無道則可卷而懷之(방무도칙가권이회지)로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곧 물러가 숨도다.”고 했으니 최치원은 논어대로 실행했다.

 

최치원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 비문()’에도잘나타나있다.오늘 그의 마지막 행적이 보이는 가야산 홍류동을 다녀왔다.

 

 

우선 해인사를 먼저 찾았다.그곳에 학사대가 있기 때문이다.
제법 잔설이 남아있어 운치 있는 겨울 산사를 볼 수 있었다.
멀찍이 주차를 해두고 여유롭게 올랐다.


 

해인사 경내에서 원경왕사비가 보인다.원래가야면야천리()
탑동()마을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8년 현재의해인사로 옮기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는데,비문에 따르면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 이름은 낙진()이고 시호는 원경()이다.


 

고려중기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해인사 원표를 지나 해강 김규진의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해인사로 들면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고목들의 위엄이 해인사 절집의 기품을 더한다.


 

해인사 창건에 대한 내용은 최치원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에 잘 나타나있다.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3년(802년)10월 순응,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다.그런데 신림은 의상의 제자였으므로 의상의 손제자가 되는 셈이다.
순응은 중국에 유학해서 교(敎)와 선(禪)을 익혔고, 귀국해서는 국가의 선발함을 받았다.

 

해인사 창건에는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의 도움이 있었으며, 순응이 입적한 뒤에는
이정선백(利貞禪伯)이 그를 계승하여 공을 세웠다. 창건 이후 100년 사이 승과에 5명이
뽑혔고,3명이 연창(演暢)을 위하여 자리를 베풀었다

 

해인총림과 봉황문을 지나니 정견모주를 기린 국사단이 나온다.국사단에 모셔진
정견모주의 벽화는 볼 만하였다.정견모주는 대가야 및 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로
지금은 가야산 여신이 되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해인도가 도량에 탑을 중심으로 그려져있다.해인도는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이다.신라시대의 승려 의상(義湘)이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詩)로 축약한 글로 210자를 54각(角)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것이다

 

화엄경의 근본정신으로 그 내용을 함께 묶어 정리해 보면,

 


“인문이 다만 하나의 길로 되어 있는 것은 여래(如來)의 일음(一音)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또 그 길이 번거롭게 굴곡을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중생의 근기(根機)와
욕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삼승교(三乘敎)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하나의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에는
특정한 방법이 없고 대응하는 세계에 알맞게 융통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원교(圓敎)에 해당한다. 사면사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섭사무량(四攝四無量)을
나타낸 것이다. 이 인문은 삼승(三乘)에 의하여 일승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시의 글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방편(修行方便)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이 많은 굴곡을 보이는 까닭은 역시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
꼭 같지 않고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첫 글자와 끝 글자가 중심에 와 있느냐

하면,인과(因果)의 양위(兩位)는 법성가내(法性家內)의 진실한 덕용(德用)으로서 그
성(性)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해인사 학사대를 찾았다.이 전나무는 최치원이 지팡이를
거꾸로 꽃은 것이라고 전하는데 그래서 그럴까?


 

이 전나무는 거꾸로 가지를 뻗는다.최치원이 학사대에 머물렀던 것은 910년
정도라고 보면 이 나무는 수령 1100년 정도가 된다.


 

보통 전나무는 굵은 한줄기가 곧바로 자라나는데 학사대의 전나무는
조금 위로가면서 두갈래로 갈라진다.가지 또한 아래로 처져있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시서에 몰입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소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루는 최치원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데,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경청을 했다고 한다.

 

학사대는 가야산 17경이다.제18경은 봉천대(奉天臺)로 가야산 중턱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고 제19경은 우비정(牛鼻井)으로 가야산 꼭대기 석굴 속에 있는 샘이다.

 


가야산은 우두산으로도 불리는데, 그 코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한다.

 

오늘의 트레일은 이곳 학사대부터 시작을 하였다.영화로 빗대어 말하면
결론부터 보고 시작으로 되돌려보는 형국이 된 것이다.


 

해인사 아래로 내려 흐르는 홍류동계곡길이 바로 소리길이다.
"소리길"의 ‘소리(蘇利)’는 불가에서 극락. 천당을 뜻하므로
‘소리길’은 극락으로 가는 길이란 뜻이다.



조선조 세조가 가야산을 두고 “천하명산이며 생불주처(生佛住處)”라고
했는데,생불주처의 핵심을 본 후 아래로 모든 소리를 들으며내려간다.
새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물소리와 바람소리는 친구가 되었다.

 

소리길에는 가야산 19경 중에서 16경이나 몰려있다.
소리길 도중에 가장 먼저 본 명소는 16경 회선대會仙臺였다.
선인이 모여있는 바위다.


 

제15경은 첩석대(疊石袋). 암석이 쌓여있는 대이다.


 

제14경은 낙화담(落花潭)으로 꽃이 떨어지는 소이다.



 

적멸보궁이 있는 길상암을 지난다.


 

제13경은 제월담(霽月潭)으로 달빛이 잠겨있는 연못이다.


 

제12경은 분옥폭(噴玉瀑)으로 옥을 뿜둣이 쏟아지는 폭포라는 뜻이고,
제11경은 완재암(宛在嵓)으로 선경이 완연히 펼쳐져 있는 바위다.

 


제10경은 광풍뢰(光風瀨)로 선경의 풍경이 빛나는 여울이라는 뜻이고,
제9경 음풍뢰(吟風瀨)는 풍월을 읊는 여울이고,
제8경은 자필암(訿筆嵒)으로 바위에다가 붓을 간추려서 글을 기록한다는

의미다.

 


제7경은 취적봉(翠積峰)으로 선인이 내려와 피리를 불던 높은 바위라는 뜻

이다. 그런데 도로가 생겨 자연의 훼손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겨울이라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인지 어디를 말하는지 희미해져 버렸다.

 

그래도 소리길이니 좋다.나무들만 보아도 좋다.


 

그러다 일순 농산정을 맞는다.아..이 분위기..최고다.
말을 잊는다.제6경은 농산정(籠山亭)이다.


 

최치원이 수도하던 곳으로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다.
농산정이라는 이름은 홍류동 계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최치원의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936년에
중수되었다.주변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자 옆에는 ‘고운 최선생 돈적지(孤雲 崔先生 燉跡地)’라고 새긴
주석비(柱石碑)가 있고 제시석(題詩石)에는둔세시(遁世詩:탈속의 소회를 적은 시)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이라는 칠언절구가 석벽에 음각되어 있다.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첩첩한 산을 호령하며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 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네/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모두 귀먹게 했구나.”

 


사실 최치원은 둔세(탈속의 소회를 적은 은둔하는)미학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최치원의 입산시를 보면 그 청산이 아마도 이곳 가야산
홍류동 계곡이지 않을까 싶다.

 

入 山 時 -최치원

 

僧 乎 莫 道 靑 山 好 (승호막도청산호) 스님,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마소.
山 好 何 事 更 出 山 (산호하사갱출산) 산이 좋은데 뭐하러 다시 나오시었나.
試 看 他 日 吾 踪 跡 (시간타일오종적) 나중에 내 발자취를 살펴 보시오.
日 入 靑 山 更 不 還 (일입청산갱불환)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니.


 

제5경은 홍류동(紅流洞)이다.계곡 중 수석과 삼림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바위에 ‘홍류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4경은 칠성대(七星臺)로
기도 중에 칠성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다.


 

제3경은 무릉교(武陵橋)인데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에 무릉교에 대한 언급이 있다.

 


‘독서당에서 동구의 무릉교까지는 거의 10리 정도의 길이라.단애벽령(丹崖碧嶺)에 송회가
창락하고 풍수가 상격(相激)하여 자연히 금석의 소리가 있는 곳에 최치원 공이 한 절구를
썼으니 취묵이 초일하다. 지나가는 이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최공시제석이라 하더라.’

 

실제 가보면 다리는 없고,맞은편에 음식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제2경은 축화천(逐花川)으로 가야산 홍류동계곡 속에 흘러나오는 꽃잎을 따라
올라간다는 의미다.제1경은 멱도원(覓桃源)이다.가야산 속의 무릉도원을 상상하면서
그 승경을 찾기 위하여 멀리 가야산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지금의 가야면 황산리 해인중학교 근처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든 최치원은 말 그대로
가야산 이후는 흔적이 없다.

 

몇 달전 TV에서 천화라는 죽음을 들었다.법정스님은 전설적인 고승들의 죽음형태를
일컫는 ‘천화’(遷化)에 대해 아주 가끔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승의 교화에서 다른 세상의 교화로 옮긴다는 뜻”이다.


 

‘고승열전’의 작가 윤청광씨는 이에 대해 법정 스스로 표현하길
“옛날 중들이 가장 멋있게 죽는 방법”이라 했고


승려가 인적없는 산속으로 기운이 다할 때까지 들어가 시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흔적없는 죽음을 맞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수행과 무소유를 완성하는 경지를 말함인데 아마도 최치원은 천화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늦은 밤 다시최치원 선집 "새벽에 홀로 깨어"를 읽으며 감회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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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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