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신라적성비)고속도로 단양휴게소뒷산에 있는 국보 제198호 문화재

: 2006.12.30
- 날 씨 :대체로 맑음
- 몇명:4명
-.어떻게:자가용 이용오대산 가는 도중 단양휴게소에서
- 테마:문화유산답사

 

단양적성비

단양적성비는 왕명을 받아 출정한 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군이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후 그들을 도와 공을 세웠던 적성 출신의 야이차와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포상하고 이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성지방민들을 慰撫할 목적에서 세운 비석입니다.

이 비는 1978년에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 사다리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남아 있는 주 비석의 크기는 세로93cm, 가로 107cm(윗부분), 아랫부분(53cm)입니다. 남은 부분 외 글자가 선명한 비편 11조각, 글자임이 분명 하지만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6조각, 글자 없는 23조각으로 남아 있으며, 발견 당시에 주 비석은 일부가 드러난 채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엷게 새겨진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묻혀있던 부분의 글자가 상당부분 해독이 가능하므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적성비의 비문은 자연 화강암의 고른 면을 고르게 다듬어 얇게 음각 되었으며, 총 22행 440여자 가량으로 추측되는데, 그 중 305자 가량 해독가능 한 상태이며, 비의 윗 부분이 비록 파손되어 있지만, 발견된 9조각의 비편으로 보아 윗 부분이 둥그스름한 덮개돌이 없는 비였다는 걸 알 수 있고, 아랫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걸로 받침돌에 끼워져 있는 비석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적성비의 글자체는 예서풍을 지닌 행서인데 중국 남북조시대 초기의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특히 남조의 특징인 (圓筆)을 사용한 점은 남조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정방형의 글씨체가 아니라 옆으로 약간 벌어진 형태이며 크기 또한 각기 달라 자유로운 면을 보여줍니다.

적성비의 글자는 대부분 읽는 데 무리가 없으나, 문장 해석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적성비의 문장이 신라 향찰식 표기와 한문식 표기를 동시에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향찰에 쓰이는 중(中), 여(如), 절(節)같은 글자가 나오지만, 서로 연결이 불가능하며, 한문식의 조사 야(也), 야(耶)등이 쓰이지만, 역시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연·월·일을 기록한 첫 부분, 본문, 그리고 비를 세우는 데 관련된 사람을 기록한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비가 건립된 정확한 연대는 그 부분이 깨어져 있어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략적인 연대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비문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三國史記》新羅本紀에도 그 활약상이 보이는 인물들이 있으므로, 두 기록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비교검토를 통해 545년(진흥왕6)에서 551년(진흥왕12) 사이의 어느 시기에 비가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 건립당시는 단양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경쟁이 한창인 때였거나, 아니면 그런 상황이 마무리된 바로 직후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에 나오는 王敎를 받든 사람들을 통해 그 점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신라 북진정책의 중추적 인물들로, 먼저 언급한 이사부(당시 이간 伊干으로 신라 북진 최고위 장군), 두미(파진간 波珍干), 서부질(대아간 大阿干), 거칠부(이사부의 후임 당시 대아간), 고두림(직책은 알 수 없음), 비차부(아간 阿干), 무력(김무력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 당시 아찬), 도설(급간 及干), 조흑부(급간)들입니다. 이 가운데는 진흥왕 12년 고구려로부터 10군을 탈취하는 데 활약한 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의 8인은 신라 군 수뇌부, 뒤의 두 명은 단양지역 공략에 직접 참가한 지역의 幢主이거나 단양 점령후의 그 지역 당주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적성비의 비문은 총 430자나 되는데, 그 내용은 진흥왕이 10명의 고관으로 하여금 적성 사람인 야이차의 공로를 포상하게 했다는 내용이 담긴 王敎 부분과 지방관에게 은전을 준다는 내용을 담은 別敎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비문에는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적성 지역을 점령한 신라가 지역민들을 회유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신라가 적성지역을 차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지역민 야이차의 공을 인정하여 포상한다는 내용과 함께 앞으로도 야이차와 같은 경우가 발생하면 보상하겠다고 약속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佃舍法을 만들어 유공자에 대해 외위를 수여하고 역역을 면제해 준다는 것 등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들에 대해 서술해 놓았습니다.

이는 단양적성비가 단순히 적성민들에 대한 신라의 대민정책과 지역지배방식을 기록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다기보다는, 타국민이었다가 신라민으로 편입된, 그리고 앞으로도 편입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민들에게 신라의 위민정책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회유하려고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들어있는 비(碑)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컨대 단양적성비에는 신라의 對服屬民 정책과 그들에 대한 회유책, 당시의 새로운 관등명과 관직명이 나오고 있고, 국가 율령제의 내용과 전사법 등의 토지제도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내용과, 小女, 小子 등 당시 사회가 인구를 연령별로 구분해 일정한 기준을 두고 부역이나 조세 등을 부과했음을 보여주는 용어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성비는 급박하게 전개되는 6세기경의 상황과 신라의 북진양상, 그리고 당시의 정치발전 내용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큰 비(碑)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이 적성비를 언제 세웠는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논란이 심합니다. 그에 대한 설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나뉘어지는데요.

첫째, 비가 소재한 적성지역이 신라 영토로 편입된 시기를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기존의 문헌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진흥왕 12년(551)이므로 따라서 이 비의 건립도 이를 상한으로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둘째, 적성비에 보이는 인물의 관등을 중시한 입장으로 이들 중 기존의 문헌에 나타나는 인물의 관등과 적성비에 보이는 관등을 대비하여 진흥왕 6년(545)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셋째, 위 두 설이 지닌 문제점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진흥왕 11년(550)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위의 세가지 설은 각각 입론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므로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이들 세 견해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적성에 올라 보면 단양휴게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안의 높은 곳으로 가면 적성비가 나타난다.

 

적성비의 윗 부분은 깨어졌지만 사료적 가치가 높아 국보 제198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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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
,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Posted by 세벗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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