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1338년 전인 670년 신라 경주로 여행을 떠나보자.
- 황룡사지,사천왕사지 폐사지 답사

-.일시 : 2008.12.6(토) 08:00~14:00
-.날 씨 :맑음
-.몇명: 홀로
-.어떻게:자가용 이용

▷운문령-서출지-천왕사지-황룡사지-분황사
- 호감도ː★★★★


 

하루 전날 부산에 눈다운 눈으로 따져 첫눈이 왔다.제법 많은 눈이 내렸지만 쌓이지 않고 모두 녹아 버려서 아쉬웠다. 그래서 가지산으로 가서 심설 산행을 하려고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나름 제법 겨울산행채비를 단단히 하고 운문령으로 떠났다.

 

기온은 영하 12도 정도인데 바람이 워낙 불어서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넘어서는 느낌이다.귀마개와 안면보호까지 했지만 얼음장 같은 안경다리에 닿는 뺨의 촉감은 얼어서 터져 버릴듯한 아림이 전해오고 두터운 장갑을 꼈지만 손까지 시리다.원래는 등산도 하고 사진도 찍을 예정이었지만 워낙 추워서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지 않고 추운 바람에 노출된 몸은 흡사 냉동창고에 들어온 듯 뻣뻣해진다.

 

두어번 용기를 내어 산으로 붙었다가 결국 포기하고 차를 몰아 경주로 향한다.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든 도시인 경주는 차를 타고 돌면 그리 넓지 않으면서도 구석구석 유적지와 유물을 품고 있으며, 그 유적에 따른 설화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드는 곳이다.그중에서 경주의 수많은 폐사지 중에서 장항리 절터와 황룡사지,사천왕사지를 꼭 가 볼려고 예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예정에 없던 여정이라서 장항리 절터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황룡사지와 사천왕사지를 둘러보는 것을 뼈대로 삼고 중간중간 발길 닿는대로 둘러보기로 한다.

 

 

 

서출지(書出池)

가장 먼저 간 곳은 서출지였다."글이 나온 연못"이라는 의미다.경주 통일전 근처 남산동
삼층쌍탑 동쪽에 있는,
여름이 되면 연꽃으로 아름다운 못인데 지금은 겨울이라서 여름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서출지(書出池)라는 이름이 참으로 독특하다.여기에는 이름의 어원이된 전설 하나가내려온다.
아직 불교가 국교로는 정해지지 않았던 때인 신라 소지왕시절,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천천정에
들렀더랬다.


한데 이상하게도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어대는데, 특히 쥐 한마리가 왕에게 사람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저 까마귀를 따라 가보세요"기이하게 여긴 소지왕은 신하에게 시켜 그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신하는 까마귀를 따라가다피촌에 있는 연못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는 두마리의 돼지가
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돼지 싸움에 정신이 팔린 신하는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놓치고 말았다. 신하는 당황하여 못가를
돌며 까마귀를
찾아다녔더랬다.

 

그때 이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신하에게 봉투를 전해주며 왕에게 전해주라 하였다.
신하가 왕에게 그 봉투를 전해주니, 그 서찰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소지왕은 두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사람이 죽는 것이 나을 듯하여 열어보지 않기로
하였는데,
이때 다른 신하가 "한사람이라 함은 임금님이옵고, 두 사람은 평민을 가리킬진데,
열어보시옵소서"라 권하였다.

 

소지왕이 신하들의 권유에 따라 봉투를 열어보니 봉투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 씌어 있었다.
왕은 급히 대궐로 돌아와 왕비의 침실에 세워놓은 거문고 상자를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거문고갑에 박히니, 그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왕비와 통정하던 중이, 왕이 오면 해치려 거문고갑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렇게 해서 죽음을 모면하고, 중과 왕비는 사형을 당했으니, 때는 정월 보름날이었다.

이때부터 이 연못은 편지(글씨)가 나와 왕을 구했다 하여 '書出池'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 서출지로 왕을 안내한 까마귀를 치하하기 위하여 이날을'오기일(烏忌日)로 정하였는데,
이것이오기일에 까마귀와 까치에게 찰밥을 주는 풍습이 생겨난 기원이다.


 

서출지에는 '이요당'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1664년 임적이라는 분이 세운 건물로
사적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ㄱ'자형의 건물로 서출지와 썩 잘 어울린다.

 

이요당(二樂堂),이요二樂라 함은 '仁者樂山, 智者樂水'란 말에서 두 요樂를 따온것이라
하는데,
산(경주 남산)이 있고 물(서출지)이 있으니 그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여름에 오면 연꽃과 배롱나무와 어울려 보기가 좋은 곳으로 경주에서는 가장 운치 있는 곳이다.

 

 

1338년 전인 670년 신라 경주를 더듬으며 2008년 12월 6일에 이곳 폐사지가 된 사천왕사지에 내가 있는 것이다.

사천왕사지 四天王寺址

 

서출지에서 가까운 곳에 호국사찰이라고 불리는 사천왕사지가 있다.
사천왕사는 신라부터 호국사찰이라 불릴만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첫번째는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이야기다.문무왕 9년 (669년)에 당나라 고종은 김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50만 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문무왕은 명랑스님과
의논한 뒤, 여러가지 빛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가설했다.
명랑스님께서 열 두 명의 스님들과 문두루
라는 비법을 행하자, 당나라 군대가 신라군과
싸우기도 전에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이 크게 일어나
당나라의 군함이 모두 뒤집혀
침몰하고 말았다. 이렇게 당의 군대를 물리친 신라에서는 명랑스님의
말씀대로 다시 절을
고쳐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 했다고 한다. 2년 뒤(671년)에 당나라는 또다시 조헌이
이끄는
5만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했는데, 신라에서는 이때도 똑같은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의
배들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두번째 이야기는 신라의 멸망을 예고한 것이다. 제 54대 경명왕 때 벽화에 새겨진 개가
짖거나,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뜰 안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림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와 당나라의 싸움은 계속
되었고,
신라 30대 왕 문무왕(재위 661~681)때인 676년 당나라 세력과의 전쟁을 끝내고
화친을 맺으며
비로소삼국통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왜군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되어 왜군을 막겠다는 유언을 남기었다.문무왕은 '낭산'
서편에 화장되었고 화장한
자리에 능지탑을 쌓은뒤 그 유언에 따라, 유골은감포 앞바다
바위(대왕암)에 뿌리고 십자형 수로와
화강암 판석 등의 인공장치를 두었다. 이것을
'문무대왕릉(대왕암)'이라 한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곳에
'감은사'
를 지었고, 그 감은사지 앞에는 이견대(사적 제 159호)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감은사지 금당 뜰아래에
동쪽으로 구멍(수로를 만든것)을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불렀다고 한다.또한,
이견대는신문왕이 문무왕의 해중능묘를 망배하기 위해
지었다고도 한다. 1970년에
그 건물터를 발견하여 새로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는 현판을 붙였다.

 

사천왕사에서 보면 저멀리 커다란 신문왕의 묘가 보인다.사천왕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으로 보면
2기의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머리가 떨어진 채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푸른색 포장지로
덮혀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평일에 오면 관람을 할 수 있게 하는
모양인데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는
나에겐 불편한 제도이다.


 

여하튼 하나는 사천왕사 사적비, 나머지 하나는 문무왕릉비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목은 잘리어져나갔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거북 등의 당초 무늬와 육각모양 등은 매우
아름답게
조각이 되어있다고 한다.

 

비록 사천왕사는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신라 역사의흔적을 찾아 떠나는 순례여행은 하나하나
조각을
맞춰나가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신비롭다고 불 수있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사천왕사가 있는 이 곳에 철길이 있다. 일제때 풍수지리에 근거해
우리나라의
맥을 끊는 일환으로 기찻길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사천왕사의 위쪽에 선덕여왕릉이
있다. 

 

 

 

 

 

 

 

안내문에 보면 "경주낭산(사적 163호)은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서라벌의 진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도 베지 못하였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등이 남아있다."고적혀있다.

 

이곳에 선덕여왕릉이 있다.선덕여왕(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분이다. 재위 16년간 후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
명장 김유신과 같은 영걸을 거느리고 신
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다. 또 분황사,
첨성대 등을 세웠고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건축의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忉)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는데,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니 낭산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여 그 뒤에
거기에 장사지냈다.
과연, 여왕을 장사지낸 지 10여 년 후인 문무왕 때 능 밑에 사천왕사를
지으니 불경에서 말한 바 사천왕 위가
도리천이라는 가르침을 실증한 것이 되어 비로소 모두가
깨달았다고 한다. 신라 능묘제도의 중요한 형식을
보여 준다.

 

『三國遺事』善德王知幾三事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몇월 몇일에 죽을 것이니, 죽은 후에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신하들은
선덕여왕이 말하는 도리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선덕여왕에게 물으니
도리천은 곧 낭산의 남쪽
이라고 알려 주었다. 따라서 선덕왕이 죽은 후 낭산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후 문무왕이 당군을 물리치고
사천왕사를 낭산자락에 건립하게 되자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모두들 이해하게 되었다. 사천왕이 살고 있는
수미단 위는 제석천이
다스리는 도리천이다. 낭산의 자락에 사천왕사를 건립하면서 수미단이 형성되었고,
낭산의 정상부는 제석천이 지키고 있는 도리천이 되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왕으로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었고,
어머니는 마야부인
(麻耶夫人)으로 金氏였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632년
재위하여 14년간의 치세 후 647년에
생을 마쳤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진평왕이후 신라 성골
남자의 대가 끊기자 여자의 몸으로 왕의 자리에
올라 신라를 삼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로 키웠다. 선덕여왕의 곁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이후 무열왕 자리에 오른 김춘추와 김유신,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 황룡사를 세우는데
큰 공을 했던
자장스님이 그들이다. 이러한 인재들의 도움으로 선덕여왕은 치세동안 많은
일을 했다. 분황사와 황룡사의
9층목탑을 세우고 당나라 복식제도를 받아들여 복식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여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三國遺事』와 『三國史記』에서는 모두 선덕여왕의 능이 낭산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이후
선덕여왕 능의 소재에 대해서 조선시대 경주지역의 지리지 등에서는
[낭산에 장례를 지냈다.(葬狼山)]라고
기록하고 있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밝혀놓고 있는
선덕여왕 능의 자리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낭산 기슭에 선덕여왕 능으로 추정 되는 능이 있는데 기록과 대조해보면 선덕영왕릉은
피장자가 명확하게
밝혀진 첫번째 왕릉인 셈이다.

능의 둘레는 약 73m에 이르며, 소형의 자연석을 호석으로 이용하여 전체적으로 다른 왕릉에
비해 빈약해 보인다.
이러한 외형상의 모습은 1900년 이후 후손들이 보수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황룡사지 [皇龍寺址]

 

황룡사는 그 규모면에서 신라최대, 우리나라 최대의 절, 혹은 동양최고의 절이라고도 한다.
1976년부터 7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
총면적 2만4천여 평으로 동양에서는 최대의 사찰이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이
밝혀졌다. 553년(진흥왕 14년)에 새로운 대궐을 월성 동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로 고쳐 황룡사라고 하고
17년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가섭불이 수행했던 돌)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먼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이 있다. 가람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원위치를 지키고 있다.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황룡사는 아늑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전체적인 가람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수를 늘려 절 안으로 들어설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

신라삼보 중에서 이보인 장륙존불과 구층탑이 있었고,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 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있다. 이밖에도 절에는 성덕대왕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역시 몽고군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있다.

 

 

 

 

 

 

 

분황사

분황사는 원효대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원효대사가 오래동안 이곳에서
머물렀고 글도 많이 쓰셨던
곳이라고 한다.

 

분황사는 신라 중기에 창건하여 조선시대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 북쪽에 건립하였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서라벌 내
7개 가람에 속하였다. 644년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이 머물렀고,
그후 원효가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 《금광명경소》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의 뜻을 다하였는데, 한번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이곳에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는데 신화(神畵)라 불렀으며,
신라의 조각가
강고내말(强古乃末)이 제작한 약사여래입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또 절의 좌전에
있던 천수대비
(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서 눈먼 여자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분황사 석탑(국보 30)은 안산암의 석재를 벽돌처럼 깎아 쌓은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9층 탑으로 추정하는데,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탑의 위치는 그대로이지만 주변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어 원래의
배치는 알 수 없다. 그밖에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대석(臺石)과
사경(寺境),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보존되어 있다.



분황사는 신라 서라벌 내 7대 가람 중의 한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중창한 것이다.
1992년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제3차 발굴에서 밝혀진
결과로 신라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창건 당시 1탑 3금당의 품자형 가람
배치라고 한다.
더군다나 고구려 지역에서 밝혀진 품자형 배치는 3금당이 모두 탑을 향하는 반면,
분황사는 모전석탑을 중앙
법당(124평) 앞쪽에 두고 좌우 금당(각110평)이 모두 남향하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국보 제30호인 모전석탑(돌을 깍아서 벽돌처럼 모방한 탑이라는 의미)은 선덕여왕 3년(634년)
에 9층 석탑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3층 만이 남아있다. 또한 석정石井우물은
유형문화제 제9호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우물틀의 외부는
팔정도를 상징하고, 원형으로
조성된 내부는 원융의 진리를 상징하고 있으며,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사성제를 상징한다고
한다.


분황사에는 이밖에도 약사여래불(유형문화재 제319호), 화쟁국사 비적(유형문화제 제97호) 과
같은 문화재가 있는데
화쟁국사비부에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는 김정희의 글씨가 음각
되어 있다.

 

 

 

 

 

다음에 시간이 주어진다면 "사천왕사 → 선덕여왕릉 → 능지탑 → 황복사 → 황룡사지 → 분황사"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다시 걷고 싶다.

 

 

낭산의 나무와 강선마을 유래

일찍이 신라 18대 실성니사금 12년(413) 8월 이 산에 구름이 일어났는데, 그 모양새가 누각(樓閣)같이 보이고 향기로운 내음이 진하게 퍼지면서 오랫동안 사그라지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선령(仙靈)이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그곳은 응당 복된 땅(福地)일 것이다. 앞으로 누구든지 이 산의 나무를 베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후 낭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으로서 나라에서 삼산(三山)의 하나로 삼아 산천에 큰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으로 삼았다. 지금도 낭산 동쪽에 웃 강선(降仙-마을 사람들은 '강시이'라 부른다), 아래 강선이란 마을이 있으니, 그 명칭이 이어져 내려온 흔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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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
,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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