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까지 덕천강자양보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땡볕이 만들어질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먼저 찾은 곳은 남사마을의 예담촌이다.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부터 경북하면 안동 하회마을이요, 경남하면 산청남사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남사예담촌은 2003년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체험물레방앗간을 조성하여 도시민을 맞이하는 행사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농외소득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산청군에서는 지난해부터 농사체험과 전통문화체험등 계절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남사예담촌을 나와 폐사지인 단속사를 찾아갔는데 이곳은 당간지주와 2개의 삼층석탑,그리고 600년이 넘은 매화나무인 정당매가 유명한 곳이다. 斷俗寺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동쪽에 있던 절로 삼국유사〉 권5 신충괘관조(信忠卦冠條)에 의하면 763년에 신충(信忠)이 창건했다고 하며, 별기(別記)에는 748년(경덕왕 7) 이순(李純)이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절에는 금당 뒷벽에 경덕왕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신라의 이름난 화가인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 한다. 폐사 연대는 전하지 않으며 현재 금당지(金堂址)로 추정되는 건물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그앞 좌우에 2기의 3층석탑(보물 제72호와 보물 제73호)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인 쌍탑가람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에 강당지(講堂址)로 보이는 넓은 건물지에 초석들이 남아 있고,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편과 1159년에 입적한 탄연(坦然)의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 편 등이 발견되었다. 근처에는 최치원이 쓴 '廣濟門'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단속사지 동서3층석탑은 단속사의 금당지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2기. 동탑은 보물 제72호, 서탑은 보물 제73호. 높이 각각 530㎝. 두 탑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3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붙은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마다 우주(隅柱)와 2개의 탱주(撑柱)를 모각했다. 갑석(甲石)의 윗면은 약간의 물매를 잡고 중앙에 2단 굄을 각출해 상층기단을 받치도록 했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2우주와 1개의 탱주를 모각하고, 그위에는 밑에 부연(附緣)이 있는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의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는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고 합각(合角) 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동탑의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 서탑은 노반·복발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두 탑은 균형이 알맞아 안정감을 주며 상층기단의 탱주가 하나로 줄어든 점과 옥개석의 반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3층석탑 뒤쪽 길로 조금 들어가면 정당매가 있다.정당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이다.정당매라고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수령이 약 630년 되었다고 한다.해마다 3월초 정당매가 꽃을 피운다고 하는데 푸른 잎과 까만 나무의 대칭이 강렬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 보다는 키가 작았다. 정당매는 고려말 정당문학겸 대사헌 이라는 벼슬을 지낸 강회백 선생이 유년시절 단속사에서 공부를 할 때 심었다고 한다.그후 스님들과 제자들이 정당매라고 부르면서 보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당매는 수령이 630 년 된 매화나무이지만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잎이 무성하다. 단속사에서 나와 다시 남사마을로 나오는 도중 좌측으로 난 목면시배지 이정표를 보고 고개를 넘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심었다는 목면시배지기념관이 나온다.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문익점에 대한 상세가 공부를 할수가 있다. 문익점(文益漸)은 자는 日新, 호는 三憂堂으로 1329년 지금의 경남 산청군인 江城縣에서 태어나 1363년(공민왕 9년)문과에 급제, 관직에 오른뒤 1363년 원나라에 파견되는 計稟使인 좌시중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수행하게 됐다. 이때 元나라에 도망가 있던 崔濡源일파가 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온 사건과 관련, 문익점은 지금의 월남땅인 交趾國으로 유배됐다.
그가 3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붓뚜껑속에 목화씨 10여개를 훔쳐 온 것이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의 태동이 됐다.(7월24일이 서거 593주년) 甲辰年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의 반을 鄭天益에게 주어 심어서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아 남았다. 정천익이 가을이 되어 그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丁未年 봄에 이르러서는 종자를 동리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서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弘願이 鄭天益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하면서 울기를 "오늘 다시 중국 본토의 물건을 볼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므로 정천익이 그를 머물게 하고 며칠 동안을 대접한 뒤에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말하여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자기집 계집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무명 한 필을 만들었다.
이웃 마을에 전하여 서로 배우고 알아서 온 고을에 보급되고 십년이 못 되어서 또 온 나라에 보급되었다. (<<太祖實錄>> 14권, 태조 7년 6월 丁巳) 나는 이곳에서 난생처음 목화와 목화꽃를 보았다. 목면시배지기념관을 나와 둔철산의 율곡사를 둘러보았다.척지산 율곡사로 되어있고 율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로 651년 (신라 진덕여왕5) 원효(元曉)가 창건.930년 (경순왕 4) 감악(感岳)이 중창했으나,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기록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대웅전 기단 앞에 당시의 유물로 생각되는 석조팔각불대좌가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며, 조선 성종 때 간행된『동국여지승람』단성현조에 '율곡사는 척지산에 있다'라고 쓰여진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도 율곡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율곡사의 배치는 산지가람의 전형적인 사동중정형식을 자연지세에 따라 변형한 특이한 형식을 보여준다. 율곡사에서 나와 부산으로 오는 길에 성철스님의 생가인 겁외사를 잠시 둘러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