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북정리,신기리 고분군과 본지환처를 기다리는 양산박물관

 

 

양산[梁山]은 신라 문무왕5년 삽량주라 불리었고, 경덕왕16년(서기757년) 양주(良州)로 칭하다가 고려 태조23년(서기940년) 양주(梁州)라 하였습니다.현 양산의 지명은 태종13년(서기1413년) 양산군(梁山郡)으로 명명했습니다.현재 인구는 50만으로 점점 인구가 늘어나는 젊은 도시느낌이 납니다.

 

양산시립박물관에서 게릴라식으로 오전 7시 50분에 모이기로 했는데 저 포함 총 4명이 모여 8월 염천에 북정리고분군과 신기리 고분군 및 신기산성과 성황사를 둘러보고 양산시립박물관을 탐방했습니다.박물관과 고분군이 함께 있어서 유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는 최고입니다.다만 부부총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해 1920년 일본 고고학자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 등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당시 무덤에서는 금동관 등 48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선총독부는 유물들을 몽땅 일본 도쿄박물관으로 빼돌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일인학자들이 혈안이 되어 파헤친 지역은 가야고분이 집중되어 있던 영남 지방이었는데, 일본은 "조선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 반드시 그 근거를 영남의 가야고분에서 찾을 것"이라고 보고 마구잡이로 파헤쳤는데 막상 고분 및 산성 중에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털끝만큼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참고로 환단고기에 따르면 임나의 삼가라는 대마도에 있는 것이 증명되는데 "좌호,인위,계지"가 삼가라인데 현재 대마도 지명으로 남아있습니다.) 

고분의 형태는 가야식이지만 그 속에서 출토된 유물은 신라 경주의 것과 같아서 가야출신 유력자가 신라에 편입되는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고분구조의 편년상 신라 지증왕(智證王) 3년(502)의 순장금지령(殉葬禁止令) 기사와 관련시켜 5세기 후반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토기 편년상 신·고(新·古) 두 양식의 토기가 함께 매납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가야의 신라복속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6세기 중엽에 가까운 시기로 편년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가야는 42년~562년으로 520년간 존속했다고 보면 가야가 신라로 복속되던 시기 즈음하여 대체로 5세기와 6세기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일시: 2024-8.2 22:20 ~8.3 11:30
- 날씨: 대체로 맑은 날씨였지만 이후 TV를 보니 양산 낮 최고온도 39.3도 였음
- 몇명: 4명

 

 

▷ 답사일정(風輪) :67km

 

양산시립박물관 - 북정리고분군 - 신기리고분군 -신기산성 -성황사 -양산시립박물관 실내 관람

 

2024.8.2

 

황산공원 서부주차장에서 휴식합니다.

 

2024.8.3 06:30

 

양산시립박물관에 주차하고 북정리고분군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습니다.

 

해가 뜨면서 명암이 생길때 둘러보니 장마철 비 피해를 입은 곳도 눈에 띄이고 사람들이 봉분 위에 올라간 흔적도 보입니다.현재 보수공사를 하는 구간도 군데군데 보입니다.능선을 따라 고분이 축조되어 있는데 고분군이 끝나는 곳에는 아파트를 비롯한 주택가들이 들어서 있습니다.예전엔 저 주택가 까지 고분군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북정리고분군

여기에는 부부총과 금조총이 있습니다.금조총은 소형고분으로 자리잡은 위치와 형태가 다른 것은 무덤 주인들의 신분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부부총의 경우는 내부 모습이 박물관내에 잘 재현되어 있는데 추가장으로 남편이 먼저 사망하여 무덤을 만들고 이후 부인이 사망하여 함께 묻힌 것으로 보입니다.출토 유물 중 환두대도가 2개가 발견된 것을 미루어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보는데 무덤형식은 가야이기 때문에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 가능성이 제기 됩니다.그래서 부부총은 양주도총관을 지낸 김서현과 연관성을 많이 찾는 편입니다.

 

부부총은 고분 아래에 돌로 호석처럼 둘러쳐져 띠를 형성하고 있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분을 보니 백거이의 한시가 떠오릅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언젯적 사람일까
성도 이름도 알수가 없네
길가의 흔한 흙더미로 변해
해마다 봄풀이 돋아나네 

 

古墳何代人고분하대인
不知姓與名부지성여명
化爲路旁土화위로방토
年年春草生년년춘초생

 

부부총 발굴 104년이 지났지만 아직 부부총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일본이 가져간 유물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북정리 고분군 너머 신기리고분군도 보입니다.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신기리고분군 우측 나무 옆으로 난 길로 오르면 성황사로 갈 수 있습니다. 

햇살이 능선을 너머 사선으로 들어옵니다. 무덤 보호용으로 그물로 씌어진 곳도 보입니다.

 

다시 양산시립박물관 주차장으로 가서 함께 할 일행들과 만나서 북정리고분군과 신기리고분군을 둘러보고 성황사로 갑니다.사전답사가 안 된 초행길이라 나중에 보니 원래 하산길로 점 찍어두었던 길로 가파르게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급한 경사의 된비알은 아니지만 워낙 날씨가 더워서 고생을 합니다.

 

 

▷신기산성

 

신기산성 흔적이 보입니다.산성봉 정상일대를 돌로 쌓은 성으로 서낭산에 있어 서낭산성이라고도 불립니다.대부분 무너졌으나 둘레 2,6km, 높이 1m 정도가 남아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낙동강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양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과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성의 남쪽에는 이 산성과 규모가 비슷한 북부 동산성이 있어 쌍성의 형태를 이룹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성황산성의 성벽은 둘레 4,368척, 높이 6척으로 성안에 우물과 6개의 연못, 그리고 2개소의 군창(軍倉)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행정구역명을 붙인 신기리산성은 원래 성황산성으로 불리우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황산은 높이 331m로 마을 뒤 야산에 가깝지만 8월 염천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두세번 깔딱고개를 오르다보니 온몸은 이미 사우나 상태입니다.특히 시원한 얼음물이 온도차를 일으켜 결로현상에 의한 수분배출이 원활해지는 것 같습니다.상대성 원리로 300M가 3,000M가 된 느낌입니다. 

 

▷성황사

 

성황사는 전시에는 전쟁에서 무운을 빌고 무사안녕을 바라는 장소였을겁니다.평화시에는 지역정신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성황사(城隍祠)의 隍은 "해자 황"자로 해자는 성 밖을 둘러싼 못을 의미하니 성(城)을 지켜 달라는 의미의 사당입니다.일반인들은 그냥 "서낭"으로 부르던 것을 식자층이 한자에 맞게 짓다보니 "성황"이 되었는데 보통 당집 황(堭)자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곳은 "해자 황"을 사용하여 알맞게 잘 사용한 것 같습니다. 

...드디어 성황사에 도착하여 함께한 일행의 인증샷을 찍습니다.

 

 

 

성황사는 양산시 신기동 신기마을 뒤편 성황산에 위치하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94호인 지산리부부상을 촬영한 사진을 모시고 있다고하는데 문이 잠겨 안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성황사는 성황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으며,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입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산천조에는 고려 태조 때 문하시중 김인훈이 죽어 성황사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으로부터 나말여초에 양산의 대표적 호족이었던 김인훈이 성황사에 배향되었던 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는 김인훈을 모시지 않고 지산리부부상의 사진이 있는데 실제 민화풍의 초상화는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황사는 불교나 유교의 흔적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세계가 녹아있습니다.

 

성황사에는 별다른 신목은 보이지 않고 아담한 느티나무 한그루 보였습니다.


하산하면서 보니 몇군데 도굴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신기리고분군

 

북정리고분군과는 얕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있는 무덤들입니다. 항아리 형태의 옹관묘가 발견되어 신기리 무덤들은 6세기~7세기에 결쳐 만들어진 신라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워낙 더워서 S자 굽어진 길에 한사람이라도 지나면 좋겠다고 말을 내뱉자마자 실제로 한분이 제 기원대로 걸어옵니다.셔터를 누릅니다.

 

▷양산시립박물관

 

2013년 개관되어 최근에 생긴 박물관 답게 시설도 훌륭하고 내부가 아주 시원해서 2시간 동안 야외에서 달궈진 몸을 시원한 에어컨이 식혀줍니다.냉수가 꿀맛처럼 느껴집니다.

부부총과 금조총의 유물이 주로 있습니다.

금조총 출토품 금제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 태환이식)는 경주의 부부총에서 본 귀걸이와 모습이 비슷합니다.누금의 얇은 알갱이는 0.6mm로 작습니다.
큰 알갱이는 1.1mm입니다.신라3대 명품 귀걸이( 금조총 출토 누금귀고리,경주 보문동 귀고리,황오동 귀고리)입니다.

 

 

금제팔찌도 보입니다. 귀걸이 보다는 단순하지만 누금의 기법이 같아서 귀걸이와 잘 어울립니다.

 

국내 고분 역사상 유일하게 금으로 만든 새다리 공예품 한 쌍이 출토돼 ‘금조총(金鳥塚:황금새다리 무덤)’이라 부르는 이 무덤의 발견은 양산 고분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금조총은 1990년 동아대학교 발굴단이 북정리 고분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습니다. 소형 고분이지만, 도굴되지 않아 화려한 금공품을 비롯한 최상급 유물이 그대로 출토되면서 처음 공개될 당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금제 새다리 한 쌍과, ‘출(出)’자 금동관, 금제 굵은고리귀고리 2쌍(4점), 금제팔찌 한쌍이 우선 눈에 띄었다. 청동제 자루솥과 은제 허리띠 장식, 은제 장도 장식집과 철제가위, 곡옥과 구슬옥, 금실 등도 보였고 총 출토유물은 24건 159점에 달했습니다.이중 새다리·굵은고리귀고리(2쌍)·팔찌(한쌍)·청동 자루솥·은제 허리띠 장식 등 6건이 한꺼번에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습니다.

금조총은 부부총 20M 아래에 있습니다. 그냥 민묘를 쌓고 남은 돌무더기로 보였지만 찜찜해서 발굴해본 것이었다고 합니다. 

새다리는 길이 2.8㎝(예상한것보다 훨씬 작습니다.),에 발가락 길이 0.6㎝ 정도되는 아주 작은 금제유물로 ‘금조총(金鳥塚)’이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새다리’라면 ‘조족(鳥足)’이고 황금으로 제작되었으니 원칙적으로는 ‘금조족총’이라야 옳습니다.그렇지만 금조족총은 어감이 이상하고 새 다리만 금조족이지만 새의 몸통은 나무로 만든 것 같습니다.위쪽에 이어붙일수 있도록 못을 체결 할 수 있는 구멍이 몇개 나 있습니다.

 

왕관은 천마총 유물과 비슷합니다.부부총에서는 순장된 세분까지 발견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두고 있었습니다.   


양산 지산리부부상은 박물관내에 있습니다.양산시립박물관은 2016년 6월 28일에 경남 문화재자료 제294호 양산 지산리 부부상을 김해 김씨 양산종친회로부터 기탁받아 양산시민들에게 공개하였고, 양산 지산리 부부상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으로 양주총관을 역임한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상 2점으로 조선말기에 민화풍으로 그린 희귀 작품입니다.

 

 

(김서현장군과 만명부인의 러브스토리)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은 일찍이 서라벌의 길에서 만명부인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눈짓으로 꾀어, 중매도 거치지 않고 야합하였다고 합니다.신라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처음 플롯의 시작은 비슷합니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의 사랑은 그 당시 가야인과 신라인의 결혼을 금하는 사회상으로 보면 위험천만한 사랑이었습니다.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가게되는데 숙흘종이 김서현과 만명공주가 야합한 사실을 알게되어 별채에 가두게 되는데 갑자기 벼락이 별채 문간에 떨어져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도망해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고 합니다.어린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은 인물이 김유신이었습니다.김서현 장군의 아버지는 김무력 장군으로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고 하니 김무력-김서현-김유신으로 이어지니 요즘으로 치면 군인집안이었습니다.
김서현장군은 양주(양산)의 군총사령관인 대총관이었습니다.김유신의 아들이 김원술인데 전쟁에서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김유신과 지소부인(김춘추의 세째딸)은 김원술을 더 이상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집안 대대로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물금면 유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신라시대 반가사유상입니다.보관 정면에 커다란 보상화문이 있고 그 위에 희미하게 선정인 여래좌상의 화불이 있는데, 이렇듯 반가사유상에 화불이 있는 예는 한반도에서는 유일합니다.머리부분을 잘 모시기 바랍니다.

 

본지환처(本地還處),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와야 하는 유물이 일본 도쿄박물관에 있습니다.부부총의 유물은 소중한 우리나라 유물입니다.

양산에서는 다양한 유물환수운동을 펼쳐 동아대 석당 박물관에 장기간 보관 중인 양산 금조총 유물 환수에 일정부분 성과를 올렸습니다.멋있는 박물관 외양에 맞게 그 속의 유물도 복제품이 아닌 진품으로 가득차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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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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