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세종 왕비 소헌왕후가 청송 심씨고,보광은 넓게 빛을 비추는 것이니

 

 

- 일시: 2024-5.31 22:30 ~6.1 15:30
- 날씨: 대체로 맑음
- 몇명: 홀로

 

청송에는 청송심씨(靑松沈氏)가 있으니 이곳 청송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입니다.소헌왕후 심씨(1395~1446)는 조선 4대왕인 세종의 왕비로 청천부원군 심온과 순흥 안씨의 장녀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고 세종과 소헌왕후의 금실이 좋았다고 합니다.소헌왕후와 세종사이에는 아들 8명(문종,수양,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대군)과 딸 2명(정소,정의공주:둘째딸로 훈민정음 변음과 토착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함)을 출산했고 문종의 자식이 바로 단종입니다.

세종 즉위 당시 상왕 태종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 권력은 태종에게 있었고 소헌왕후는 세종이 힘이 없던 시절 자신의 일가가 모두 숙청을 당합니다.세종은 즉위하고 장인이 심온을 영의정으로 삼고 이때 소헌왕후는 임신 중이었는데 외척을 경계하던 태종은 심온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온 사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역적으로 만들어 소헌왕후 가족을 숙청한 것입니다.이때 세종은 어떤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1418년 8월 소헌왕후가 왕비가 되었고 1418년 9월 아들(안평대군)을 출산하고 한달 뒤 역적의 딸이 되었으니 모두 노비가 됩니다.이 상황에서 소헌왕후는 곡기를 끊고 누워있었고 세종은 아버지 태종에게 항변도 못합니다.역적의 집안이라 소헌왕후는 폐비 논의도 있었지만 왕자를 2명이나 출산한 상태였고 내조의 공이 커서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갓 출산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행히 폐비는 되지 않았습니다.이후 세종 4년에 태종이 승하하면서 세종은 태종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선의 군주로 우뚝서게 되고 소헌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이 되었고 세종의 장모(소헌왕후의 어머니)를 노비에서 복원시킵니다.

소헌왕후는 어릴적부터 정숙,인자,온화하여 남편 세종을 이해하고 내조에 힘써 내명부를 잘 이끌었습니다.세종은 죽는날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고 유교를 숭배하던 조선이었지만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과 공덕을 빌며 만들었던 것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월인천강의 뜻은 부처님의 자비가 달빛처럼 중생을 비춘다는 뜻으로 한글 활자로 간행된 악장체 찬불가입니다.

현재 여주의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입니다.

  

▷ 답사일정(風輪) :415km

 

사남고택(서벽고택) -찬경루-청송객사 운봉관 -보광사(만세루)-방호정-후송당

 

 

2024-5-31

 

5월은 워낙 행사가 많아서 여행을 가지 못하여 역마살이 최고조에 올랐고 6월1일 토요일 중학교 동창생들과 모임도 있었는데도, 5월31일 밤 늦은 시간인 10시 30분에 출발하여 6월1일 자정을 지나 부산에서 130km 정도되는 동명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2024-6-1

 

 

▷사남고택


아침 7시쯤 동명휴게소를 출발하여 가장 먼저 간 곳은 사남고택입니다.

 

경북 북부의 ㅁ자 구조의 뜰집 형태입니다.평산 신씨 신치학이 분가하면서 1700년대 건립했는데 "사남"은 신치학의 손자인 신우호의 호입니다.주왕산의 절경을 노래한 사남문집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주인도 꽃같은 마음이 뿜어져 나와 마당이 온통 꽃밭인데 아주 자연스러워 이 고택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수 있는 시기에 방문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서벽고택

 

사남고택 바로 옆의 서벽고택은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의 27세손인 신한창이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1739년 건립한 가옥입니다.영조15년 증손인 신치구가 확장 ,증축하면서 호를 따 서벽고택이라 칭하였습니다. 

▷찬경루(讚慶樓)

소헌왕후의 이름을 따서 소헌공원으로 명명된 이곳엔 찬경루와 운봉관이 있습니다.찬경루란 청송심씨 가문에서 소헌왕후가 탄생하였고, '찬경루'는 의미는 이 누대에 올라 소헌왕후의 시조(심홍부沈洪孚)묘를 바라보니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찬경루이고 뒤로 운봉관 현판이 보입니다.

 

청송은 1459년(세조5년)에 청송군에서 청송도호부로 승격되어 437년간 도호부로 위상을 지켜오다가 1895년 갑오개혁때 다시 청송군이 되었습니다.

 

찬경루는 정자 건축물인데 생김새가 거의 궁궐의 수준입니다.

 

소헌왕후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직접 쓴 송백강릉 현판이 보입니다만 화재로 불에 타 이후 1792년 한철유가 안평대군 글씨체로 다시 쓴 것이라고 합니다.송백은 소남무와 잣나무이니 청송이라는 푸른 소나무 산소카페 지명과 딱 어울리고 강릉은 언덕이니 이곳 찬경루와 참 잘 어울립니다.

▷운봉관(讚慶樓)

찬경루가 정자라면 운봉관은 객사입니다.객사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숙박의 기능이 있습니다.이곳 운봉관은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1896년 3월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현재의 모습은 2008년 복원한 것입니다. 


단청은 없지만 현판 좌우의 용같고 봉황같은 부재들이 화려합니다.


퇴계 이황이 1548년 퇴계의 나이 48세 되던 때 청송부사를 원했으나 단양군수로 가게되면서 동호독서당에서 함깨 공부했던 친구들에게 전한 작별의 시인데 퇴계 이황도 원했던 청송입니다.

지금은 제방이 있지만 그 옛날 찬경루에 올라 용전천 강 너머의 보광산 자락을 바라보았을 겁니다.보광제각(普光祭閣)이라는 비석이 있는데 보광산에는 청송심씨 시조인 심홍부의 묘가 있고 보광사라는 사찰도 있으니 보광普光은 넓게 비치는 빛이니 심홍부를 뜻하는 말로 보이고 제각은 제실이니 운봉관 앞 찬경루 옆의 건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보광사 만세루

청송 만세루는 보광사 건물이라기 보다는 청송심씨 시조인 심홍부의 묘재각입니다.보광사 극락전과 마주보는 형태인데 극락전보다 더 우람하고 큽니다.

 

만세루 글씨를 보면 거의 궁궐에서 보던 글씨체(전서체)에 가깝고 현판 뒤쪽 중수기 편액 아래의 막대기처럼 생긴 풍경이 정신을 깨우는데 만세루 누각안에 있는 글귀와 편액들이 볼만 합니다.

 

신축년(2021년) 겨울 여주암의 현성(炫性) 스님이 새긴 김육의 시조가 눈길을 끕니다.

 

잠곡 김육 선생의 시 (청구영언에 실린 평시조)

 

君家酒熟必請吾(군가주숙필청오)

草閣花開亦子呼(초각화개역자호)

酌酒看花論底事(작주간화논저사)

百年欲得沒憂慮(백년욕득몰우려) 

 

자네집의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초가에 곳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면서 꽃구경하며 잔 나누고

백년 덧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김육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한 조선 초유의 국난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대동법" 등의 제도 시행을 통해 백성 구제 중심의 재정복구를 시도한 조선 최고의 경세가입니다.그런 시기에 실학자적 자세로 나라를 이끈  분으로 중국에 두 차례(1643년과 1645년)나 더 다녀와서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類苑叢寶)』·『황명기략(皇明紀略)』·『종덕신편(種德新編)』·『송도지(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했습니다.그런 시기의 영의정을 지낸 분이니 "백년 덧 시름"이 예사롭지 않고 속 깊은 이야기(底事)도 이해가 됩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은 1728년(조선 영조 4년) 김천택이 엮은 가곡집으로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청구영언에 등장하는 시는 998수인데 이름을 알수 있는 작가는 140여명에 이릅니다.

 

우리가 보통 "술 한잔하자"에서 한잔은 일배(一盃)를 의미하지 않습니다.우리나라에서  "한"이라는 의미는 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한밭이 대전(大田)이 되었듯이 한잔하자는 큰잔(大盃)을 의미하니 실컷 마셔보자는 의미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그러나 여기 김육의 시에서는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한잔하는 것이니 취 할 목적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순서가 잘 못되어 오직 취하여 마시는 것이 우선이고 국정이 뒷일인 요즘의 그분과는 결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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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현성스님의 글이 멋집니다.물은 급히 흘러도 물속의 달은 흘러가지 않는다는 글귀인데 저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시세를 다투는 시장은 급히 흘러가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운용자는 중심을 잡으라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글귀는 머리를 한대 맞는 느낌입니다.기법(技法)보다는 심법(心法)이라고 했는데 딱 그렇게 느껴집니다.알고 있어도 쉽게 바꿔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천박함이 쉽게 바뀌지 않듯이(A Better Kind of Happiness) 나 또한 심법이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계속 노력은 할 생각입니다.

 

▷보광사 극락전

보광사는 신라 문무왕 8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고 소헌왕후의 시조묘를 모시는 사찰이었습니다.크기는 작으나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만세루에 앉아 극락전을 바라보니 조각보를 보는 느낌입니다.석계단 옆 축대의 돌 모습도 조각보를 이어 붙인 것 같지만 삭아 약해진 문과 처마를 새로해서 기둥과 색깔이 대조를 이루는데 석계단의 돌조차 새로하여 위에 놓았으니 신구의 대조와 화합이 이렇게나 정갈합니다. 


거기에 보광사 삼층석탑의 높이는 162cm로 왠만한 성인 남성의 키보다 낮아서 만세루에서 보면 아래로 보입니다.고려시대 작품인데 옥개석과 탑신석은 오로지 각각 하나의 돌로만 만들어졌습니다.연꽃무늬가 귀엽고 위쪽 부분이 약간 기울어져서 흡사 탑이 눈인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아주 귀여운 모습의 탑입니다.

▷방호정

광해군 11년에 방호 조준도趙遵道가 지은 정자로 방호공 조준도가 생모 안동권씨의 묘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세웠습니다.현재는 보수 공사 중인라 들어가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S자로 돌아가는 감입곡류천의 절경지 바위에 터를 잡아 눈길을 확 끕니다. 학문을 강론하고 산수를 즐긴 장소로 그 옛날 이 보다 더 말년을 잘 보낼수 없었을 겁니다.


거친 단층이 그대로 드러난 바위가 강바닥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후송당

1920년 후송 조용정이 건립한 고택입니다.고택은 화재로 불타서 1947년 다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한식건물에서 도리가 다섯개가 있는 지붕을 5량가(五梁架)라고 하는데 네모기둥을 세웠습니다.길목의 압도적인 느티나무를 지나면 함안조씨 세거지 비석이 보입니다.

 

애국지사 일송 조규영선생이 순조 원년에 이곳에서 출생하여 1895년~1896년 안동,상주,대봉 등지에서 안동 의병대장 척암 김도암과 의병 활동을 한 공로로 2005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되었으니 독립운동유공자 생가이기도 합니다. 

 

가효국충(家孝國忠)의 정신이 느껴집니다.

청송은 작년 11월에 한번 둘러 본 곳이라서 이번에 두번째 여행이다보니 이번에 예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났습니다.그래서 중학교 동창들과 회포를 풀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여 모임시간인 저녁 6시 이전에 도착했습니다.

퇴계가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환갑의 나이가 되니 어떤 친구는 손주를 보았다고 한턱 낼려고 하고 요즘은 나이를 만으로 따지다보니 환갑 생일이라 한턱 낼려고 합니다.비록 저는 술,담배,커피,탄산은 하지 않지만 그 즐거운 분위기와 이야기는 커피숍까지 이어집니다.인생 후반기는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며 조용히 살고 싶겠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니 하루하루 즐겁게 일기일회의 심정으로 살면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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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일회 (一期一會)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입니다.

순간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고 순간순간에 새롭게 피어나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을 어떻게 사는가가 다음의 나를 결정한다.

매 순간 우리는 다음 생의 나를 만들고 있다.

- 법정 스님의 말씀 中

 

 

당나라 시기 임제의현(臨濟義玄)이라는 대단한 선승(禪僧)이 있는데 이분 말씀 중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곳, 어느 처지에 다다르더라도 주관을 잃지 않고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여러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 사물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바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적인 이익(私利)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참다운 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큰 변화 없이 제 자신의 주인으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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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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