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후산▲여성은 약할지라도 모성은 강하다.



- 언제 : 2008.2.16(토) 08:30~19:30
- 얼마나: 2008.2.16 11:20~15:20(4시간)
- 날 씨 : 맑음
- 몇명: 48명
- 어떻게 : 부산 푸른산악회 동행
▷유마사-용문재-모후산 정상-중봉-뱀골-철철계곡-유마사(원점회귀)
- 개인산행횟수ː 2008-7[W산행기록-186 P산행기록-328/T672]
- 테마: 조망산행,계곡산행,답사산행
- 산높이:모후산 918.8
m
- 호감도ː★★★★

 

모후 [母后]란 임금님의 어머니를 말한다.모후산의 모후는 어느 임금의 어머니일까?
정상석 뒷면에 있는 내용을 보면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과 왕비는 태후를 모시고, 이곳까지 피난왔다. 수려한 산세에 반한 왕이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1년 여 남짓 머물렀다고 한다. 그후 원래 명칭인 나복산을 모후산으로 바꾸었다. 이는 어머니의 품속같은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라고 씌여있다.

 

여하튼 그리하여 이산은 여성성을 가진 산이름을 가졌다.그래서 그랬을까? 이산을 오르기전 산행들머리에서 만나는 유마사는 비구승이 아닌 비구니 [, bhiksuni]들이 있는 절이다.산세도 상당히 유순해서 별로 힘들지 않는 육산이다.한마디로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우리나라 대부분이 비구승들이고 일부 비구니들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율이 거의 반반이다.



산정에 오르면 주암호가 내려다보이고 일망무제 호남의 여러 산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산이다.실제 육안으로 무등산,백아산,천봉산,말봉산,조계산 등은 바로 보인다.


조망이 좋다는 것은 쫒기는 사람에게는 좋은 입지조건이 되며 군사적으로 요충지이다.그렇게 보면 모후가 홍건적을 피해 있었든 이유도 수긍이 되고 ,6.25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전남도당이 유마사에 은거하면서 모후산과 백아산을 연계하면서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빨치산의 입장에서 이렇게 좋은 입지조건도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그래봐야 중국이나 미국의 땅덩어리에 비하면 빨치산 활동이 순조롭지 못할 수밖에 없었겠지만....대장정을 성공시킨 마오쩌뚱도 한국에서는 별볼이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빨치산의 본거지라 하여 유마사의 사찰건물은 모두 소각되었다.우리나라 사찰들은 역사가 깊다.왠만한 이름있는 사찰치고 국보나 보물이 없는 사찰이 없다.우리나라의 경우 1,4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것이 사찰 이외 또 뭐가 있을까?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실제 불교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1,700여년 되기 때문에 불가의 1,700여 화두만큼이나 과거의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다.



114년 흐른 동학농민전쟁도 나에게는 머나먼 과거의 일인데....1000년을 넘었다는 것은 충분히 경외심을 가질만하다.그런 역사를 가진 사찰이 위기를 겪는 것은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을 펴고,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을 얻기 위해 실력자들이 절을 허물고 승려를 죽이며 폐사지로 만들고 묘를 쓴 것도 비일비재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대충 세 번정도의 큰 위기를 맞는다.황룡사 9층목탑을 불질러 버린 몽고의 침략,임진왜란,그리고 6.25 한국전쟁이다.없어진 사찰의 대부분은 이 세 번 전란에 없어졌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는 우리 국군의 작전에 의해 많이 불타버렸다.그런 사찰중에 하나가 유마사이다.

 

유순하고 모든 것을 껴 않아 줄 것 같은 모성의 이름을 가진 모후산은 이런 아픔들을 다 보았을 것이다.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근래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르고 있는데 아직 대웅전의 현판도 보이지 않고 일주문에도 유마사라는 이름도 달려있지 않은 상태다.



여성은 약할지라도 모성은 강하다.이념의 대립으로 아깝게 산화한 양 진영 모두의 푸른 청춘들의 영가를 천도해 줄 역할은 유마사의 몫으로 보인다.그래서 유마사가 빨리 복원이 마무리되기를 기원한다.

 

 

 

11:27~11:34
버스에서 "조용헌의 사찰기행"을 탐독했다.산행을 하러가는 기분과 사찰기행의 내용이 겹쳐지며
오늘도 떠나고 있다.나의 사주 신살엔 역마살은 없는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산의 기운에 목마른자는 돈이 없는 팔자라고 했는데 나의 신살에 십간록(十干祿)과 금여록(金輿祿)
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에 다니는 바람에 모여지지 않는 모양이다.아상이 많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주차장에서 조금 오르니 바로 좌측엔 유마사 일주문이 보이고 우측으로 등산로가 나있다.
길옆 계곡엔 중무릇(상사화)의 초록빛이 싱싱해보이고,산행로 옆 아래로 유마사의 절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11:38~52
중봉 가는길과 용문재로 오르는 길이 양갈래로 나뉘며 좌측 용문재 방향으로 냇물을
건넌다.그런데 너무나 푹신푹신한 부드러운 산길이라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간벌에 의한 산판작업이 있었든지 산길이 온통 나무부스러기들로 채워져있다.

좀 더 오르니 호남의 산에 오면 볼 수 있는 대나무도 보이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오르니 산약초재배 움집도 복원되는 모습이 네군데 보인다.

 



 



 



 

 

12:26~13:10
용문재에 오르니 바람이 제법 쌀쌀하고 매섭다.헬기장이 보이고 산불감시초소도 있다.
좀 더 추위에 대한 방비를 하고 우측으로 꺽어 정상으로 향한다.오후 1시경 식사를 하고
정상으로 향하는데 조릿대 사이로 약간의 잔설이 남아서 얼었는데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이
유리하다.우측 아래론 올라온 산길과 유마사가 보인다.

 



 



 



 

 

13:34~40
약간의 휴식을 겸하며 천천히 올랐는데도 바로 정상이 나오는데 여기서 보는 조망이
너무 좋다.먼저 내려갈 중봉과 집게봉을 확인한다.그 다음 산세를 따라 주암호를
내려다보고,무등산을 바라본다.장불재의 모습이 뚜렷하다.

그 다음 천봉산 말봉산을 바라보고 백아산을 확인한다.마지막으로 흐릿하지만
지리산 반야봉을 응시한 후 내림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14:06
산 아래는 춥고 용문재까지 중간길은 따뜻했었다.그리고 능선을 따라 정상까지는
또 찬 바람에 추웠다면 중봉 내려가는 길은 모후산 정상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여
다시 따뜻한 느낌이다.한번 산세가 출렁이더니 바로 중봉이다.집게봉으로 갈 생각도
있었지만 별로 볼 것이 없을 것 같아서 철철바위를 구경하려고 바로 중봉에서
하산하기로 한다.

 



 


14:33
뱀골과 철철계곡은 얼어있어서 한걸음 한걸음 내려가기가 다소 성가시다.
철철바위의 철철폭포도 얼어있어서 철철이라는 이름을 무색케한다.

 

15:01~15:03
이제 찬찬히 유마사를 돌아본다.현판도 없는 대웅전 앞의 유마사에 대한 글을 읽어본다.
당나라 고관 유마운에서 유마를 따서 절 이름을 만든 모양이다.유마운의 딸 이름이
보안이다.



 



 


 

15:07~15:20
대웅전을 나와 다리를 건너니 유마사해련부도 (維摩寺海蓮浮屠)가 보인다.보물 제1116호이다.

안내문을 보니

"전형적인 8각 사리탑으로,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은 옆면에 안상(眼象)이 얕게 새져져 있고, 윗면에는 활짝 핀 꽃조각이 있다.
가운데받침돌에도 큼직한 안상을 새겨두었으며, 탑신을 직접 받치는 윗받침돌에는 커다란 연꽃잎조각이
둘러놓았다.


탑신의 몸돌에는 앞뒷면에 문짝모양을 새겨 두었는데, 앞면에 새긴 문에는 문고리까지 장식되어 있고
그 윗부분에 '해련지탑(海蓮之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넓직한 3단의 받침이 있으며, 8각의 모서리는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다.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 구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81년 화순군에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기단부의 모습이나, 탑신에 새긴 여러 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라고 씌여있다.고려전기 작품이라서 그런지 화려함이 엿보인다.

단아한 일주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포근하게 느껴지는데 바로 옆 계곡에 1400년된 보안교가 있다.

 



 



 



 



 

 

대웅전 앞의 안내문에도 나와있듯이 전설이 있는 다리이다.

길이 5m, 너비 3m의 보안교()위에는 ‘유마동천 보안교( )’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인다. 시주자로 여겨지는 ‘백운거사 양연법(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리를 놓기 위해 여러 명이 모후산 중턱에 있던 이 바위를 옮기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보안보살이 치마폭에 싸서 이곳에 갔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빨치산 잡는다고 유마사 절을 태운 것은 둘째치고 얼마나 많은 군경,빨치산들이 피아간에 죽었을까?
이제라도 유마사가 복원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총 맞아죽고,굶어죽고,얼어죽고,몽둥이로 맞아 저승에도 못가고 구천을 떠돌 불쌍한 영혼들을 녹이는
천도라는 것은 결국 우주의 보이지 않는 엔트로피entropy를 청소하는 작업실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어찌 세상사는 일이 의지대로,뜻대로 다 이루어지겠는가? 이런산을 산행하고 나면
불현 듯 팔죽시가 떠오른다.

부설거사의 팔죽시(八竹詩)

(此竹彼竹化去竹)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粥粥飯飯生此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是是非非看彼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

(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시장물건 사고 파는 것은 세월대로

(萬事不如吾心竹)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


※여기서 ‘죽(竹)’자는 우리말 ‘대로’라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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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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