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만덕산▲
풍류와 산행의 통섭 1번지
- 언제 : 2008.3.15 (토) 08:00~22:20
- 얼마나: 2008.3.15 12:05~16:45(4시간 40분)
- 날 씨 : 맑음,날씨 포근,시계 양호
- 몇명: 27명
- 어떻게 : 부산 솔뫼산악회 동행
▷옥련사-필봉(205봉)-301봉-337봉-깃대봉-바람재-안테나(280봉)-274봉-236봉-185봉-293봉-286봉-용문사
- 개인산행횟수ː 2008-11[W산행기록-190 P산행기록-332/T676]
- 테마: 답사산행
- 산높이:만덕산 깃대봉 411.6m
- 호감도ː★★★★★
나는 때때로 문화유산답사를 다니기도 하고,별도로 산행을 하기도 한다.그래서 문화유산답사와 산행을 한꺼번에 하는 산악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을 한다.보통 산악회에서 산행을 가면 산에는 사찰이 있어서 관람 할 수 있는 시간만 줄 뿐이고, 문화유산해설사 정도의 안내는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제대로 관람하고 대부분 분위기만 살피고 건성으로 보고 넘기는 수준이 되고 만다. 만약 문화유산답사와 산행을 통섭(統攝,Consilience)하여 일명 "풍류산악회"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가 볼 곳이 어딜까하고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곳은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이 될 것이다. 만덕산은 해발 411.6M밖에 안되는 산이지만 옥련사에서 용문사까지 주능을 통과하려면 150M 이상 올라서 봉을 밟고 다시 안부까지 150M 이상 내려가는 오르내림이 10번이상 되기 때문에 결코 쉽게 볼 산은 아니다. 만덕산 자락에는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있다.18세기 경학과 불교를 대표하는 두 석학이 있었으니 바로 다산초당의 다산 정약용과 백련사의 아암(兒庵) 혜장선사이다.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것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동백림과 차(茶)이다.다산초당 연못 우측에 세워진 동암은 조선후기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으로 다산의 역작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산실이며 현종 2년(1836) 75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집필한 서적은 ‘500여권’에 달한다. 백련사는 법화사상의 천년도량으로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가 주도하여 일어난 불교 개혁 운동인 백련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하다.또한 한때는 중국 숭산에는 소림사,한국 만덕산에는 백련사라 할 정도로 무술로 유명하며,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스님들이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활동했던 사찰로 유명한 곳이다.특히 18세기에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완도 신지도에 귀양차 왔다가 이 절에 들러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두 현판의 글씨를 남겨 놓았으니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
12:11
부산에서 강진의 산행들머리까지 가면서 읽은 책은 "테리 번햄"의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
라는 책이었다. "예측 할 수 없는 시장을 꿰뚫는 현대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해놓고,바로 "당신의 머리는 돈을 벌기엔 너무 낡았다"고 일침을 놓고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터 기존의 논리를 깨는 바람에 결론이 허무하게 끝날까 다소 우려되었는데
"도마뱀의 뇌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매력적인 대목"은 냉엄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후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오늘 산행들머리는 옥련사이다.처음부터 가파르게 필봉까지 올라야 한다.필봉은 말그대로
붓처럼 뾰족하게 가파르게 치솟은 봉우리다.다행히 205M라서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서 좋다.
그렇지만 오늘 산행이 끝마칠때까지 다리가 뻐근하도록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할 처지다.
[옥련사-필봉(205봉)-301봉-337봉-깃대봉-바람재-안테나(280봉)-274봉-236봉-185봉-293봉-286봉-용문사]
12:17~12:25
오늘 날씨가 너무 포근하다.지난주만 하더라도 응달에서는 눈밭을 헤맸는데 이곳 강진은 남도의
끝이라 햇살도 강하고 바람결에 묻어나는 기온도 따뜻하다.옥련사를 둘러보고 바로 필봉으로
가파르게 오른다.아래를 내려다보니 강진만이 내려다보이고 과거 갈대밭은 현재 간척하여 경지
정리가 되어 있는데 초록빛이 싱그럽고 산중엔 분홍빛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었다.
12:47~12:54
이제 겨우 필봉을 넘었건만 땀이 주체없이 흐른다.날씨가 포근 할 것 같아서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 버리고
봄옷으로 간편하게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안경으로 땀이 흘러 희뿌옇게 시계를 가린다.능선의 우측을 보니 산과
바다, 그리고 그속에 민가가 평화롭게 바다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3:13~14:00
급경사와 만만찮은 암봉을 오르고 내리며 한바탕 육수를 제대로 생산하고 나서야 깃대봉 정상에 선다.
14:02~14:10
정상 이후부터도 이어지는 능선의 굴곡이 흡사 공룡능선을 빼 닮았다.촤측 아래를 보니 유난히 푸른 동백림
의 보호를 받으며 백련사가 보인다.
14:12~14:50
산길은 암산과 육산의 성격으로 번갈아가지만 점차 육산으로 바뀌는 느낌이고,앞으로 가야할
방향의 산세가 한눈에 파악이 된다.안테나가 있는 280봉에 앉아 휴식을 하며 지도를 보니
오늘 산행의 절반은 진행을 한 것 같다.
15:14~16:40
이후 동백림 터널도 나오고 가파른 암봉도 나오며 더욱 몸을 피곤하게 하며
장딴지 근육이 누적된 피로로 인하여 펌핑아웃(pumping-out) 될 지경이 되니
산행날머리 용문사가 보인다.
17:06~17:08
실질적인 산행은 마치고 이제 버스를 타고 백련사로 가서 관람을 한다.백련사의 동백림은 천연기념물 그대로
실로 대단한 느낌을 준다.백련사는 불이문 혹은 해탈문이 없는데 이 동백림 터널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피어있는 동백꽃과 목덜미 자체가 떨어져나간 동백꽃 모두 선홍빛이다.터널이 끝날 즈음 좌측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어 가보니 역시 차밭이 있다.만경루 입구에는 주지인 혜일(慧日)스님이 관람객을 위해 열었다는 선다원禪茶苑이
있어 역시 이곳이 해남 대흥사와 더불어 전통차 문화의 본산임을 증명하고 있다.
17:14
한때 중국 숭산에는 소림사,한국 만덕산에는 백련사라 할 정도로 무술로 유명한 이곳은
무인의 기질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여러곳 읽히는데 그 첫째가 만경루의 대단한 누각
때문이다.성곽과 같은 단단한 축대 위에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 때문이다.
또한 이곳 백련사 절집은 그 흔한 주련이 없다.글 이라는 것은 읽을 꺼리인데
글을 읽는 시간에 즉신성불(卽身成佛), 몸을 단련하라는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 1705~1777)의 대웅전
현판 때문이다.흡사 무술 단련용 송판 두장에 글을 써서 새로로 처마가 붙들고 있는 듯이
보이는 저 글씨의 큰 대(大)자를 보라.두발을 크게 벌리며 활기차게 걷는 것도 같고 ,
무술의 준비자세인 기마자세 같기도 한 모습이다.만경루의 글씨는 어떤가?
꿈틀대는 근육이 강함과 부드러움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원교 이광사는 숙종(肅宗) 31년(1705) 종고조부(從高祖父)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 1595~1671)
증조부(曾祖父) 이정영(李正英)․부친(父親) 이진검(李眞儉) 등이 명필(名筆)일 정도로 대대로
글씨의 명가(名家)였던 집안에서 정종(定宗)의 왕자(王子)였던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태어나
시서화(詩書畵)에 능했고 인품(人品)도 높았다.
원교(圓嶠)는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 1649~1736)에게서 당시 이단시(異端視)되던 양명학(陽明學)
을 배운 학자(學者)이자, 백하 윤순(白下 尹淳 : 1680~1741) 문하(門下)에서 필법(筆法)을 익혀
진서(晉書 : 왕희지체)초서(草書)전서(篆書)예서(隸書)에 두루 능한 명필(名筆)이었는데,
51세 때인 1755년 전라도 나주(全羅道 羅州)에서 불온(不穩)한 글을 벽에다 쓴 이른바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이 일어나 백부(伯父) 이진유(李眞儒)가 처형될 때 함께 연좌(緣坐)되어
유배(流配)된다.
원교(圓嶠)가 의금부(義禁府)에 끌려왔을 때 하늘에 대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자
영조(英祖)가 가긍히 여겨 귀양을 보냈는데, 그리하여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가자
30명이나 되는 제자(弟子)들이 유배지까지 따라왔으며, 이를 알게 된 조정(朝廷)은
이것을 문제(問題)삼아 진도(珍島)로 이배(移配)시켰다가 다시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신지도(新智島)로 유배(流配)를 보내게 되는데 신지도로 가는 도중에 대웅보전과 만경루를
쓴 것이다.22년 유배생활 후 신지도에서 결국 사망한다.
17:18~17:45
만경루 기둥 옆에서서 강진만을 내려다본다.동백림 위로 저 강진만을 보기 위하여 석축을 그토록 튼실하게
쌓았는지 모른다.만경루 앞 배롱나무 뒤로 갈대밭 대신 간척지가 보인다.내가 처음 이곳 강진에 올때였던
20대 시절엔 그곳은 갈대밭이었다.
백련사에서 산책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800여미터의 산길은 다산 정약용과 아암(兒庵) 혜장선사라는
스타와 스타의 만남을 이어주는 길이었는데 오늘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다산 유배 당시 백련사의 지주였던 혜장은 갓 34세였으며 훗일 불자로서 도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과음으로 입적하였다고 한다.그리고 다산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현실을 직시하여
일반 백성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긍휼히 여겨 백성들을 위한 개혁적인 세상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연구
하여 500여권을 집필했는데,실용을 중시했던 다산의 사상은 아직도 해서체의 정석(丁石)이라는 글씨 만큼이나
최근엔 더욱 빛을 발하며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산악회에서 마련한 봄쑥을 넣은 수제비를 먹고,목욕을 한 다음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읽은 책은 "조우석"의 "책의제국 책의언어"였다.60여편의 다양한 책에 대한
리뷰들이 쏟아져나와 지적 즐거움을 만끽 할 수 있다.호불호에 따라 어떤 부분은 책의 내용과
달리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다양성 측면에서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장마(久雨)
- 정약용(丁若鏞)
窮居罕人事(궁거한인사) 외딴곳에 살다 보니 찾는 사람 볼일 거의 없어
恒日廢衣冠(항일폐의관) 평소에 의관을 접어두었네
敗屋香娘墜(패옥향낭추) 썩은 지붕에서는 노래기가 떨어지고
荒畦腐婢殘(황휴부비잔) 묵은 밭에는 팥꽃이 겨우 남아 있네
睡因多病減(수인다병감) 병이 많으니 잠마저 줄었고
愁賴著書寬(수뢰저서관) 글 짓는 일로 시름을 달래 보네
久雨何須苦(구우하수고) 오랜 비 때문에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晴時也自歎(청시야자탄) 갠 날에도 혼자서 탄식할 뿐인 것을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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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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