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 2006.6.28
- 날 씨 :더운 여름날
- 몇명:홀로
- 어떻게:섭외 나갔다 들어 오는길에 잠시
- 테마:문화유산답사
자성대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동안 가보지 못한 아이러니컬한 곳이다.내가 근무하는 회사 바로 옆에서 있어서 ODS활동 후 지점으로 돌아오던 도중 잠시 둘러보았다. 자성대는 시지정기념물 제7호로 최근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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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되는 남쪽 국경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다.이를 부산광역시 기념물 자성대 서문
성곽우주석(1972. 6. 26 지정)이라고 한다.
[毛利輝元] 부자가 일본식 성으로 새로 쌓았으며, 왜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 장군 만세덕(萬世德)
휘하의 군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다.
순찰사 권반은 당시 부산진성 근처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바다에서
퍼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
통신사행은 줄곧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일본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라고 이름지었다.
통신사행은 조선후기 한일관계를 밝혀주는 대표적인 선린사절로,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1636년부터 1811년까지 총 9차례로 일본국왕의 요청으로, 막부가 있는 에도
(현 동경)에 파견된 사절이었다. 통신사행은 8개월간의 긴 여정으로 거친 대한해협을 건너가기란
무척 힘든 일정으로 출발 전에 영가대에서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올렸다.
한편, 영가대는 경치가 빼어나 시인 묵객은 물론 이곳을 거쳐간 통신사행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
원래 영가대는 오늘날의 동구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에 있었다.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양분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상인 오이카와(及川民次郞)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그후 도시화 과정에서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부산시의
역사유적지 표석 설치계획에 따라 동구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 ‘부산포왜관 영가대터’
표석을 세웠고, 2003년 동구청에서 자성대 인근에 영가대 정자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복원 당시부터 말이 많은 영가대였다. 우선 영가대는 본디 자리는 고사하고 진경그림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물가에서 옮겨 놓은 억지춘향을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성대는 부산성의 한 부분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성을 함락하고 성의 동남부에
일본식 성을 쌓아 지휘소로 이용했던 곳이다. 선조는 이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겨 새로이 성을
쌓기도 했다. 부산시민들은 왜 하필이면 자성대 자리에 영가대를 조성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일본에 대항하고 싸웠던 ‘항일의 자리’에 일본으로 떠나는 친선 사절단의
유적지를 함께 조성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高臺蕭瑟出雲端 높은 대가 소슬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陂水千尋石色磻 언덕 밑 천길 물에는 돌그림자 서려 있네. 艦穩如藏大壑 배들이 평온히 큰 구렁에 숨겨져 있는 듯 海中終日自波瀾 바다 가운데에는 온종일 물결이 치는구나. (1643년 신유 「영가대」) |
부산시민이라면 평생에 한번만이라도 가보아야 할 곳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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