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이후 만난 투자클럽에서 모임을 이끌어가던 회장이 짧은 병원생활을 끝내고 설날 저녁에 별세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은행생활과 증권회사 생활을 거친 후 퇴직후 무료할 틈도 없이 기존 생활과 유사한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2019년 1월에 퇴직하고 투자클럽은 3월에 가입을 했으니 바뀐 삶이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그렇게 5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한달에 한번 투자모임에서 보니 얼굴살이 많이 빠져보이고 병색이 엿보여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는가하고 물어보니 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나중에 보니 췌장암이라고 했습니다.나이는 나보다 한살 어려 올해 환갑해가 되는데 황망스럽게 죽음을 대하고 보니 안타까움이 배가됩니다.아까운 사람이 빨리 세상을 버리니 더 안타깝습니다.그나마 마지막은 편하게 임종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이 발인입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시 자작]

 

輓故投資會長 (고 투자회장을 애도하며)

古徑秋葉積 (고경추엽적)
寒窓夜月孤 (한창야월고)
停杯望雲處 (정배망운처)
千里暮色無 (천리모색무)

仙文 金永漢

옛길에 가을잎 쌓여 있네  
찬 창가에 밤달이 외로이  
잔 멈추고 구름 바라보는 곳  
천 리 밖 노을빛 사라지네





* 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의 역설적 순환

낙엽(과거의 흔적) → 달(현재의 고독) → 구름(변화하는 현재) → 노을(소멸하는 미래)  


친구의 죽음이라는 한시가 있는데 연암 일파(燕巖一派)의 장로격인 원종거는 고인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우주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며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라고 다독이는 듯합니다.



친구의 죽음 哭劉主簿(곡유주부)―원중거(元重擧·1719~1790)

人世一番花(인세일번화)
乾坤是大樹(건곤시대수)
乍開還乍零(사개환사령)
無寃亦無懼(무원역무구)

인생은 한 번 피는 꽃
천지는 큰 나무다.
잠깐 피었다 도로 떨어지나니
억울할 것도 겁날 것도 없다.

 

 



조선 영·정조 시대의 학자 현천(玄川) 원중거가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친구를 조문하며 지은 시다. 삶이 있다면 죽음도 있게 마련이다. 그 법칙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죽어 마땅하다고 뒤돌아서 침 뱉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사라지는 생명은 다 아쉽고 연민의 마음을 자아낸다. 더욱이 망자(亡者)가 그냥 보내기 아까운 사람이고, 게다가 남보다 일찍 서둘러 세상을 버렸다면 훨씬 더 아쉽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인생은 천지란 큰 꽃나무에 한번 핀 꽃과 같은 것이라고. 어느 한철에 피었다가 곧 지는 것이 인생인데 모진 바람에 빨리 지는 꽃도 있고, 조금 더 오래 핀 꽃도 있다. 어쨌든 인생은 꽃이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살아남은 자의 억울함과 두려움을 다독거린다.

 

- 원중거(元重擧, 1719∼1790)

 

영·정조대를 살다 간 인물로서 호는 현천(玄川)이며 본관은 원성(原城)이다. 그는 한미(寒微)한 무인(武人) 집안의 서자(庶子) 출신으로 평생 동안 처사(處士) 생활을 하며 보낸 시인이었다. 그러한 그가 학계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통신사행원으로 일본을 여행한 후 저술한 『승사록』과 『화국지』의 내용이 재조명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들 책은 일본 사행록으로서 사료(史料) 가치가 높으며, 저자 원중거도 이른바 ‘연암 일파(燕巖一派)’의 장로 격으로 그들의 일본 인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중거는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1750년(영조 26) 3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실직(實職)을 얻지 못하고 40세에 종8품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를 제수(除授)받았다. 그 후 다시 야인(野人)으로 지내다가 1763년(영조 39)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대일 통신사행에 서기로 수행하게 되었다. 사행에서 돌아온 지 7년 만인 1771년 종6품 송라 찰방(宋羅察訪)에 임명되었으나 60일 만에 해직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정조대에 들어와서는 득의(得意)의 시절을 보냈다. 즉,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 참판 김용겸(金用謙)의 추천으로 종6품 장원서(掌苑署) 주부(主簿)를 제수받았다. 이후 원중거는 내직(內職)에 머물면서 당시 조정의 신진기예(新進氣銳)와 교유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해동읍지(海東邑誌)』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덕무, 성대중, 박제가, 유득공, 이만수, 윤행임, 이서구, 이가환 등 당시 기예들이 이 책을 공동 편찬하였는데, 원중거는 편찬 업무와 직접 관계없는 직책이었으나 학식을 인정받아 참여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종6품 목천 현감(木川縣監)에 제수되어 외직을 맡았는데, 그해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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