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일원)그러니까 결국 조선은 백제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몰라 (1/2)



- 언제 : 2013.1.19 06:00~1.20 20:00

- 얼마나: 2013.1.19 09:30~1.20 17:30
- 날 씨 : 흐림
- 몇 명: 46여명
- 어떻게 : 부산고적답사회 동행 
-가져간 책: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소울 포토(상상을 담는 창의적 사진 강의 노트)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動學,국궁

▷부산-마이산휴게소-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벽골제-금산사(김제)-남고산성-전주명가(막걸리집)
   -전주관광호텔(1박)-동고산성-전주역사박물관-전동성당-승광제-경기전-전주사고-어진박물관-
   풍남문-전주객사-마이산 휴게소-부산

 

 

 

못다 이룬 꿈이 이루어진 전주지역의 겨울답사라는 주제로 고적답사에 나섰다.전주지역하면 견훤과 이성계가 연결된다.최명희의 혼불 제4권 151쪽에 이런 글이 있다.

 

"조선은 백제인지도 몰라,백제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의 신라를 고려는 흡수해서 무너뜨렸고,조선은 또 그 고려를 무너뜨렸으니,백제를 못잊어 세운 나라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에서,백제사람,백제의 자손,이성계는 몸을 일으켜 신라의 핏줄이 섞인 고려를 치고 조선을 세웠다.그러니까 결국 조선은 백제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몰라"

 

이번 답사길도 그래서 견훤과 이성계와 관련된 장소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우리를 인솔하시는 최영호 교수님이 동선을 고려해서 일정을 잡았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많은 곳을 다녔지만 전주는 거의 초행길에 가깝다.30여년전 군 시절에 잠시 스쳐가듯이 북전주를 간 것과 등산으로 모악산과 금산사를 둘러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이번 여행길은 전주비빔밥과 모주도 기대된다.

 

 

 

버스내에서 가져간 책을 읽으며 도착한 곳이 마이산휴게소이다.휴게소 전망대에 서면 
마이산이 잘 보인다. 

 

마이산을 보니 태조 이성계의 시가 떠오른다.

 

"동으로 달리는 천마
도중에 쓰러졌네
연인(내시)이 뼈만 사가고
그 귀만 남기니
변하여 두봉우리 되어 반공중에 솟아 있네"

 

마이산에는 이성계가 고려말 왜구를 물리치고 올라오다 말을 묶었다는 주필대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벌써 전주의 냄새가 나는 곳에 들어 온 것이다.

오늘은 두 봉우리, 냉동을 시켜놓았다.

 

 

전주는 후삼국 때에는 견훤이 수도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풍패지향(豊沛之鄕 : 중국 패주 풍읍 출신으로
황제가 된 한나라 고조의 유사에서 유래한 의미로 국왕의 고향)으로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짐
.


 

 

 

 

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전북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119-1

 

전시관 내로 들어가니 사진을 찍기를 좋아하다보니 천장에 눈이 간다.
전등에 불도 없는데 그곳이 환하게 밝다.

 

 

 

전시실내에 전통민속놀이에 대한 안내 그림이 섬짓하다.
별개의 안내그림인데 연결해서 보면 흡사 연을 날리는 사람을 등뒤에서 활을 쏘는 것 같다,

 

활쏘기 그림은 김홍도의 그림 일부분을 그려 놓았는데,
활쏘는 사람은 왼손잡이인데 왼발이 앞에 나와 있다.
이런 자세는 나올수가 없다.

걸음을 걸을때 왼발과 왼손이 함께 나오는 것처럼 부자연스런 몸짓이 된다.
만약 정상적으로 그리면 궁수의 뒷머리만 나왔을테니
김홍도가 일부러 이렇게 그렸다는 판단이 든다.

그런데 "활을 쏘다" 책에서는 "홍도사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122P)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현감벼슬도 지낸 김홍도면 활을 내지 않았다고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대고 있다.

 

활을 크기를 보면 요즘의 단궁이나 각궁이 아닌 큰활인 정량궁이다.

 

 


 

 

 

전시관 내에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미가고저표"라는 것으로 쌀값 시세의 고가와 저가를 기록한 것이다.
소화 8년이면 1933년이다.요즘 증권시장에서는 시가 고가 저가 종가를 기준으로 캔들차트를 만든다.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의 남매는 버스운전기사의 자녀들로 유독 키가 작아보이는데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 애잔하였다.

 

 

 

 

문화유산해설사의 강의는 밖까지 이어진다.
원래 벽골재 수문은 방사향으로 되어있었는데 고증을 잘못한 상태로
제2수문 장생거의 모습은 직각으로 복원되어 있다.

 

 


 

 

 

임진년 괴강의 해가 작년이었다.대나무로 수만개로 만든 쌍용이 보인다.

 

용에게 목숨바쳐 제방을 지켰다는 단야낭자 설화와 쌍용의 다툼에서 백룡을 도와 가문이 융성했다는
조연벽장군 설화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전시관 근처에 단야각이 있다. 토목 기술자 원덕랑과 고을 태수의 딸 단야의 사랑을 배경설화이다.

용을 보니 임진년이 생각나고 임진년엔 임진왜란이 연이어 떠오른다.

 

임진왜란 당시 거궁을 할 때 갑판위에서 자유로웠던 수군들은 활이 유리했고,
육군은 활이 조총보다 불리하였다. 활은 전신을 드러내고 쏘아야 하는 반면 조총은 나무뒤에 숨어서
총구만 내고 조준하면 되기 때문이다.
 

 

 

 

 

벽골재 경사진 곳에서 썰매를 타서 제방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논 한구역에 물을 대고 얼려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왁자지끌 즐거운
소리가 전해져 온다.

 

 

 

 

 

 

금산사 / 전북 김제시 금산면 39번지

 

 

(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사원으로 백제 무왕 1년(600)에 창건.

계법(戒法 : 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닦은 진표(眞表)가 경덕왕 21년(762)∼혜공왕 2년(766)
중창하면서 대사원으로 발전. 중창의 마무리 이후 진표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
(主佛 : 법당의 중심이 되는 부처)로 봉안하고, 금당(金堂: 법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
(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처럼 본 사원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봉안하면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소속하며 『법화현찬
(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

 

진표의 중창 이후 후삼국 때에는 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慧德)이 문종 33년(1079)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보수와 새 법당들을 증축.
현존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23호)․오층석탑(보물 제25호)․노주(露柱: 보물 제22호) 등은 모두 이때 조성 가능.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

본 사원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 출가한 승통
(僧統) 도생(導生), 유식학(唯識學)의 해원(海圓) 등.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석종(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석등(보물 제828호), 대장전(보물 제827호) 등.
특히 미륵전(국보 제62호)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한 금당. 또한 석조유물 가운데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으며, 이 계단은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

 

한편 935년 3월 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같은 해 6월 막내 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 왕실에 사람을 보내 의탁하기를 요청하였으며,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식읍으로
양주를 내려줌.

 

금산사 입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육탄3용사 중 한분인 안영권의 전공기념비에서
설명을 듣는다.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고, 살아도 이 고지에서 살자’하는 비장한 각오로 진격을 개시한
백마고지(395m)는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1952년 10월12일 그 고지의 최후의
탈환작전에서 강승우 소위,오규봉 하사와 함께 결사대에 자원.TNT 수류탄 박격포탄을 묶고
적의 토치카에 뛰어들어 장렬히 자폭하여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냈다고 한다.

 

 

 

 

 

드디어 금산사 일주문이 나온다.화려한 단청과 일중 김충현 서예가의 글이 보인다.
다른 여러사찰에서는 예서의 글씨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모악산 어머니 품처럼
단아하고 편안하게 씌여있다.

 

 

 

 

 

 

귀부의 후면엔 꼬리와 항문까지 새겨져 있어 기운이 통하게 만들어져 있다.
무릇 잘 먹고 잘 싸야 건강한 것이다.

 


 

 

 

 

 

적멸보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노주 앞 안내문을 읽고 있는 포운스님이 보인다.


 

요즘 나는 국궁을 배우려 구덕정에 나가고 있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왕성한 호기심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 그 또한 길 없는 길이다."라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포운 스님은 절집에 살면서 이곳 절집에서는 또 무얼 찾고 있을까?


 

 

 

 

적멸보궁 탑을 둘러싸고 있는 방등계단의 석상 중에서 제주하루방을 닮은 것이 있어 이채롭다.
조선후기로 보인다고 한다.

 

꽃 창살 아래 쌍어문이 보인다.인도불교의 흔적인가? 금산사의 금金은 성김金씨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긴 후 고개를 들어보니 적멸보궁과 미륵전 사이로 모악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남고산성/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 228

일명 견훤산성이라고 한다.제법 힘들게 올랐다.

 

 

○ 남고산성(사적 제294호)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견훤산성(甄萱山城)고덕산성(高德山城)이라고도 함. 현재 성문지와 장대지(將臺址)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는데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包谷形) 산성.

901년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李廷鸞)이 왜군을 막을 때 수축. 성 안에는 현재 남고사(南固寺)․관성묘(關聖廟) 등이 존재
.

 

 

남고사를 우측으로 만경대가 있어서 올라보니 전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목대도 보인다.

 

 


 

 

 

만경대 바로 아래 정몽주 우국시가 적혀있다.
흐릿하지만 만경대라는 행서는 보인다.

 

안내판에 정몽주 우국시를 번역해 놓았다.포운스님은 운을 넣으며 노래를 한다.

7언율시로 이성계가 대풍가를 부르며 조선개국의 포부를 넌지시 밝힌 것에 대하여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간됨이 그르쳤다며 송도를 걱정하는 시"다.

 

 

 

 

 

발 아래 "장사의 신" "전쟁의 신"인 관우의 묘당이 있다.여기는 방어목적의 성곽이므로
전쟁의 신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그 두려운 사선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믿음은 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 관성묘(關聖廟) : 관왕묘(關王廟)라고도 하며,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장군으로 의리와 무용으로
널리 알려진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廟堂).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정유의 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기 시작.

 

 

 

 

 

 

견훤의 성터에서 오목대를 바라보는 그 묘한 기분은 전주명가(막걸리집)에 가서까지
정몽주 우국시를 노래하며 읊었다.


 

전주명가 막걸리집은 술병의 아랫부분인 찐백이 부분은 버리고 맑은 술만 두병을
주전자에 부어 첫주전자는 17,000원,두 번째 주전자는 15,000원을 받는다.

그렇지만 안주는 다양하게 무한리필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많았다.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에도 소개된 모양이었다.

 

전주명가 생 막걸리는 1936년 문을 열어 70년이 넘었다.
주인장은 연신 "막걸리는 정情이다."며 우리의 취기가 식지않도록 하였다.

 

특히 막걸리의 육덕(유익,식,원기,화목,화해,건강)과 삼반(반유한적,반귀족적,반계급적)
이라는 "막걸리 철학"같은 재밌는 글귀가 돋보인다.

 

 

 

 

 

취기 어린 얼굴로 돌아와 전주관광호텔에서 1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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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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