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I)▲현풍,고령,성주를 돌아보며 선조들의 정신을 생각한다.
- 언제 : 2004.8.13~8.14
- 얼마나:2004.8.14 12:00~14:30(2시간 30분)
- 날 씨 :맑은 날씨 이후 이튿날 오후에는 비
- 몇명:4명(가족)
- 어떻게 : 자가용 이용
▷현풍-고령-성주
- 현풍(곽재우 묘소-십이정려각-이양서원-도동서원-현풍석빙고-현풍향교-유가사)
- 고령(대가야고분관광로-박물관-전시관)
- 성주(성밖숲-동방사지 7층석탑- 세종대왕 왕자 태실-선석사-한개마을)
- 개인산행횟수ː 2004-32
- 테마:문화유산 답사산행
- 산높이ː고령 주산 310M
- 좋은산행 개인호감도ː★★★★★
(현풍 편- 忠과 孝가 절정에 달한 선비정신이 살아숨쉬는 원형 )
8.13 18:24
날씨가 무척 덥다.현풍도 대구에 가깝고 처 외가는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부산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더위다.후덥지근하고 줄줄 흐르는 땀을 주체 할 수 없다.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피워 거실의 에어콘은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다.에어콘의 온도는 3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친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약간의 간식을 먹은 다음 자녀 둘을 데리고 곽재우 묘소로 간다.
묘소 입구엔 忘憂堂 救國倡義追慕碑(망우당 구국창의 추모비)가 크게 있고 선산같은 형태의 묘소엔 어느 무덤이 곽재우의 묘소인지 구분이 안가도록 되어있다.
이를 두고 모씨는 "망우당 묘역에는 곽재우 장군 묘소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관직을 맡았던 첨사, 부사, 종친들의 묘소가 산재되어 있었고 수풀이 우거져 어느 것이 곽재우 장군의 묘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묘비 크기도 곽재우 장군 묘비는 높이가 1.3m 정도에 불과한 데 비해 주변 묘소에는 2~3m는 족히 될 것 같은 큰 묘비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다."고 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지만 이는 이 지역의 정서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자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의 조상보다는 아래에 두는 우리모두의 심성처럼....
곽재우는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이었다.하지만 그는 승전에 대한 포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부귀와 공명을 탐내지도 않았다."의병은 싸울뿐이다.결코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그의 사심없는 충절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났을때 국가와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할 벼슬아치들이 도망갔을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수십명이 2천여명이 되었던 창의의 중심에 곽재우 천강홍의장군이 있었다.수많은 희생끝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붉은 옷도 장검도 버리고 여러차레 벼슬도 마다하고 비슬산 기슭에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으려고 忘憂亭을 짓고 은거했으니 그의 호인 망우당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그래서 그의 무덤도 "망우당"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곽재우 묘소
:::적송들로 둘러쳐진 경사면에 있는 망우당 묘소의 고즈늑함은 어느 왕가의 능 못지 않은 운치를 자아낸다.
18:55
곽재우 묘소를 둘러보고 바로 십이정려각으로 향한다.십이정려각은 연못 바로 옆에 있는데 선조31년(1598)부터 영조때 까지 문중에서 삼강(三綱)을 지킨 15인을 표창하여 12분을 모신 곳이며 건물입구에는 삼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충신 1명,효자 8명,열부 6명이 모셔져 있는데,현재 12기의 현판과 2기의 비석이 있다.
정려각에 모셔져 있을 정도의 충절이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하나같이 가슴절절한 사연이지만 하나를 소개해 본다....곽재훈이라는 분은 아들이 네명 있었다.임진왜란때 굴속에서 피난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곽재훈을 해치려하자 아들 4형제가 차례로 부친을 보호하려다 죽음을 당하고 부친(곽재훈)만 살아남았다.왜적은 그 효행에 깊이 감동하여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라는 다섯글자를 쓴 패를 달아 왜적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그때 피신했던 그 굴의 이름이 바로 "사효굴"이다.
:::십이정려각 바로 옆엔 "솔예"라는 마을 표지석이 있다.이름 그대로 禮를 그느릴 만하다.
19:11
십이정려각에서 이양서원을 찾는다.도로에서 보면 포산곽씨세거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마을로 들어서면 포산제일문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문이 잠겨져 있어서 안을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양서원 포산제일문 앞
19:21~8.14 02:00
처 외가에서 자정에 처외조모의 제사를 지낸다.제사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곳은 모두 남자들이 제사를 주관하고 제사음식도 분배한다.이 더위에 의관정제하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바로 유교가 한참 살아있던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모습이다.제사가 끝나고 경노당에 술과 음식을 돌리고 우리들도 음복한 후 나는 거실 에어콘속에서 더위와 싸우며 잠을 잤다.
:::외등이 켜진 곳이 처 외가집이며 멀리 포산곽씨세거지가 보이고 그 뒤로 비슬산이 보인다.
8.14 07:45
이른 아침에 근처 처외조모 산소에 들른 후 이곳에서 직접 잡은 미꾸라지로 만든 토종추어탕으로 식사를 했다.현풍은 추어탕과 곰탕이 유명한데 왜 이곳 추어탕이 유명한지 알 것 같다.식사를 마친후 도동서원으로 향한다.도동서원 가는 길에 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강가에 절벽과 멋진 바위가 여백의 미를 한껏 뽐내고 있다.
:::과거로 들어가는 우리들을 건네주 듯 한척의 배가 KEY인양 멈춰있다.
07:47
가장 먼저 반기는 나무는 400년된 김굉필 나무다.이 서원은 달성군 도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으로서 1568년(선조1년)에 건립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5현의 수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향사한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 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후 선조 38년(1605)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고, 보로동 서원이라 불리었는데 제당과 다른 건물은 한강 정구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이 사림의 협조로 건립하고 선조 40년(1607)에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강당, 수월루 등이 있고 전면에는 중건 당시 한훤당 선생이 기념식수한 수령 4백여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강당은 높은 댓돌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주심포 맞배집으로 좌,우 퇴칸은 앞퇴가 있는 1칸씩의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앞면을 개방한 대청이다. 사당은 가구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집이며, 정면 3칸 마다 당판 문짝을 설치하였다. 담장은 기와를 이용한 맞담으로 매우 아름다우며, 맞담에 설치한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다.고종 2년 (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백 50개 서원중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400년된 한훤당 김굉필나무
07:50
도동서원 구석구석을 살펴본다.용의 머리가 석축 혹은 계단 중간에 돌출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고 서원에 어울리는 맛배지붕형식이 경건함을 더한다.
08:46
이제 상리동산 옆 구천변에 있는 현풍 석빙고를 찾아간다.현풍석빙고는 얼음덩어리를 운반하기 쉬운 하천 옆에 있으며 입구는 냉기를 보존하기 위해 산쪽으로 문을 만들었으며 바깥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옹벽을 쌓았다.현풍 석빙고는 크기는 크지 않지만 조선후기 석빙고의 모범으로 정평이 나 있다.
09:07
현풍석빙고에서 가까운 현풍향교를 찾았다.향교는 봉안한 성현의 수에 따라 대설위,중설위,소설위로 나뉘는데 이곳은 소설위에 해당한다.소설위의 성현은 공자와 사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송 4현(도국공 주돈이, 예국공 정호, 낙국공 정신, 휘국공 주희),동국 18현(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박세채)이다.
:::역시 맛배지붕 형식의 명륜당의 모습이다.맛배지붕은 단순하지만 경건함을 나타내기 알맞은 형식이다.우리나라 기와지붕들은 주위 산세와 어울리게 만들었다.침봉이 화려한 곳에선 팔작지붕같은 화려한 형식을 취한다.
09:57~10:02
비슬산의 유가사를 찾는다.유가사는 시방루 중수 등 한창 공사중이었다.시원한 계곡에서 피서를 즐길 생각이었지만 수량이 부족해서 채 한시간도 머무르지 못하고 현풍 문화답사여행을 마친다.
:::용화전 불상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풍에서 가보고자 했던 곳은 수박 겉핡기 식으로 둘러보았다.이외에도 현풍에는 육신사,용봉동석불입상,사효굴,도성암 등 유명한 곳 이 많다.시간이 넉넉하면 얼큰한 곰탕과 약산온천에 들러 피로를 풀 수도 있는 곳이 현풍이지만 현풍에 오면 충과 효가 절정에 달해 비장함이 느껴지는 곳이라서 나의 생각이 바뀌지 전까지는 약산온천에 머물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곳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까? "결혼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한다.다만 남자는 여자에게 경제적,정신적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와이프의 결혼관의 뿌리는 여기 현풍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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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흐르듯 자연과 만나는 산행
風流山行
- 언제 : 2004.8.13~8.14
- 얼마나:2004.8.14 12:00~14:30(2시간 30분)
- 날 씨 :맑은 날씨 이후 이튿날 오후에는 비
- 몇명:4명(가족)
- 어떻게 : 자가용 이용
▷현풍-고령-성주
- 현풍(곽재우 묘소-십이정려각-이양서원-도동서원-현풍석빙고-현풍향교-유가사)
- 고령(대가야고분관광로-박물관-전시관)
- 성주(성밖숲-동방사지 7층석탑- 세종대왕 왕자 태실-선석사-한개마을)
- 개인산행횟수ː 2004-32
- 테마:문화유산 답사산행
- 산높이ː고령 주산 310M
- 좋은산행 개인호감도ː★★★★★
처 외조모의 1년 기일을 맞아 현풍으로 가면서 주위 고령과 성주를 함께 둘러 볼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처 외가집은 차를 몰고 현풍 구지IC로 나가면 솔예(率禮)마을인데 예나 지금이나 충절의 고장임을 실감한다.처 외가 마을입구에 십이정려각이 있고 바로 근처에 곽재우 묘소가 있다.처 외가와 십이정려각 사이에 이양서원이 있고 이곳에 현풍곽씨로 알려진 현풍의 포산곽씨세거지가 있는 집성촌이 있다. 이튿날은 고령의 주산에 위치한 지산동고분군과 성주의 한개마을을 둘러보았는데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생각하는데 있어 지금 남아있는 유적과 유산만으로도 선조들의 정신문화유산을 미루어 짐작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
(현풍 편- 忠과 孝가 절정에 달한 선비정신이 살아숨쉬는 원형 )
8.13 18:24
날씨가 무척 덥다.현풍도 대구에 가깝고 처 외가는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부산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더위다.후덥지근하고 줄줄 흐르는 땀을 주체 할 수 없다.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피워 거실의 에어콘은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다.에어콘의 온도는 3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친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약간의 간식을 먹은 다음 자녀 둘을 데리고 곽재우 묘소로 간다.
묘소 입구엔 忘憂堂 救國倡義追慕碑(망우당 구국창의 추모비)가 크게 있고 선산같은 형태의 묘소엔 어느 무덤이 곽재우의 묘소인지 구분이 안가도록 되어있다.
이를 두고 모씨는 "망우당 묘역에는 곽재우 장군 묘소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관직을 맡았던 첨사, 부사, 종친들의 묘소가 산재되어 있었고 수풀이 우거져 어느 것이 곽재우 장군의 묘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묘비 크기도 곽재우 장군 묘비는 높이가 1.3m 정도에 불과한 데 비해 주변 묘소에는 2~3m는 족히 될 것 같은 큰 묘비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다."고 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지만 이는 이 지역의 정서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자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의 조상보다는 아래에 두는 우리모두의 심성처럼....
곽재우는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이었다.하지만 그는 승전에 대한 포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부귀와 공명을 탐내지도 않았다."의병은 싸울뿐이다.결코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그의 사심없는 충절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났을때 국가와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할 벼슬아치들이 도망갔을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수십명이 2천여명이 되었던 창의의 중심에 곽재우 천강홍의장군이 있었다.수많은 희생끝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붉은 옷도 장검도 버리고 여러차레 벼슬도 마다하고 비슬산 기슭에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으려고 忘憂亭을 짓고 은거했으니 그의 호인 망우당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그래서 그의 무덤도 "망우당"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곽재우 묘소
:::적송들로 둘러쳐진 경사면에 있는 망우당 묘소의 고즈늑함은 어느 왕가의 능 못지 않은 운치를 자아낸다.
18:55
곽재우 묘소를 둘러보고 바로 십이정려각으로 향한다.십이정려각은 연못 바로 옆에 있는데 선조31년(1598)부터 영조때 까지 문중에서 삼강(三綱)을 지킨 15인을 표창하여 12분을 모신 곳이며 건물입구에는 삼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충신 1명,효자 8명,열부 6명이 모셔져 있는데,현재 12기의 현판과 2기의 비석이 있다.
정려각에 모셔져 있을 정도의 충절이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하나같이 가슴절절한 사연이지만 하나를 소개해 본다....곽재훈이라는 분은 아들이 네명 있었다.임진왜란때 굴속에서 피난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곽재훈을 해치려하자 아들 4형제가 차례로 부친을 보호하려다 죽음을 당하고 부친(곽재훈)만 살아남았다.왜적은 그 효행에 깊이 감동하여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라는 다섯글자를 쓴 패를 달아 왜적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그때 피신했던 그 굴의 이름이 바로 "사효굴"이다.
:::십이정려각 바로 옆엔 "솔예"라는 마을 표지석이 있다.이름 그대로 禮를 그느릴 만하다.
19:11
십이정려각에서 이양서원을 찾는다.도로에서 보면 포산곽씨세거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마을로 들어서면 포산제일문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문이 잠겨져 있어서 안을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양서원 포산제일문 앞
19:21~8.14 02:00
처 외가에서 자정에 처외조모의 제사를 지낸다.제사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곳은 모두 남자들이 제사를 주관하고 제사음식도 분배한다.이 더위에 의관정제하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바로 유교가 한참 살아있던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모습이다.제사가 끝나고 경노당에 술과 음식을 돌리고 우리들도 음복한 후 나는 거실 에어콘속에서 더위와 싸우며 잠을 잤다.
:::외등이 켜진 곳이 처 외가집이며 멀리 포산곽씨세거지가 보이고 그 뒤로 비슬산이 보인다.
8.14 07:45
이른 아침에 근처 처외조모 산소에 들른 후 이곳에서 직접 잡은 미꾸라지로 만든 토종추어탕으로 식사를 했다.현풍은 추어탕과 곰탕이 유명한데 왜 이곳 추어탕이 유명한지 알 것 같다.식사를 마친후 도동서원으로 향한다.도동서원 가는 길에 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강가에 절벽과 멋진 바위가 여백의 미를 한껏 뽐내고 있다.
:::과거로 들어가는 우리들을 건네주 듯 한척의 배가 KEY인양 멈춰있다.
07:47
가장 먼저 반기는 나무는 400년된 김굉필 나무다.이 서원은 달성군 도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으로서 1568년(선조1년)에 건립되었다. 이 서원은 원래 5현의 수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향사한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 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후 선조 38년(1605)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고, 보로동 서원이라 불리었는데 제당과 다른 건물은 한강 정구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이 사림의 협조로 건립하고 선조 40년(1607)에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경내에는 사당, 강당, 수월루 등이 있고 전면에는 중건 당시 한훤당 선생이 기념식수한 수령 4백여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강당은 높은 댓돌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주심포 맞배집으로 좌,우 퇴칸은 앞퇴가 있는 1칸씩의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앞면을 개방한 대청이다. 사당은 가구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집이며, 정면 3칸 마다 당판 문짝을 설치하였다. 담장은 기와를 이용한 맞담으로 매우 아름다우며, 맞담에 설치한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다.고종 2년 (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백 50개 서원중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400년된 한훤당 김굉필나무
07:50
도동서원 구석구석을 살펴본다.용의 머리가 석축 혹은 계단 중간에 돌출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고 서원에 어울리는 맛배지붕형식이 경건함을 더한다.
08:46
이제 상리동산 옆 구천변에 있는 현풍 석빙고를 찾아간다.현풍석빙고는 얼음덩어리를 운반하기 쉬운 하천 옆에 있으며 입구는 냉기를 보존하기 위해 산쪽으로 문을 만들었으며 바깥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옹벽을 쌓았다.현풍 석빙고는 크기는 크지 않지만 조선후기 석빙고의 모범으로 정평이 나 있다.
09:07
현풍석빙고에서 가까운 현풍향교를 찾았다.향교는 봉안한 성현의 수에 따라 대설위,중설위,소설위로 나뉘는데 이곳은 소설위에 해당한다.소설위의 성현은 공자와 사성(안자, 증자, 자사, 맹자).송 4현(도국공 주돈이, 예국공 정호, 낙국공 정신, 휘국공 주희),동국 18현(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박세채)이다.
:::역시 맛배지붕 형식의 명륜당의 모습이다.맛배지붕은 단순하지만 경건함을 나타내기 알맞은 형식이다.우리나라 기와지붕들은 주위 산세와 어울리게 만들었다.침봉이 화려한 곳에선 팔작지붕같은 화려한 형식을 취한다.
09:57~10:02
비슬산의 유가사를 찾는다.유가사는 시방루 중수 등 한창 공사중이었다.시원한 계곡에서 피서를 즐길 생각이었지만 수량이 부족해서 채 한시간도 머무르지 못하고 현풍 문화답사여행을 마친다.
:::용화전 불상
의병은 싸울뿐이다.결코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 망우당 곽재우 |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풍에서 가보고자 했던 곳은 수박 겉핡기 식으로 둘러보았다.이외에도 현풍에는 육신사,용봉동석불입상,사효굴,도성암 등 유명한 곳 이 많다.시간이 넉넉하면 얼큰한 곰탕과 약산온천에 들러 피로를 풀 수도 있는 곳이 현풍이지만 현풍에 오면 충과 효가 절정에 달해 비장함이 느껴지는 곳이라서 나의 생각이 바뀌지 전까지는 약산온천에 머물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곳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까? "결혼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한다.다만 남자는 여자에게 경제적,정신적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와이프의 결혼관의 뿌리는 여기 현풍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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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흐르듯 자연과 만나는 산행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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