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술산▲박제상,치술령과 망부석,신모,은을암,서낭재,비조로 이어지는 역사의 재구성
- 언제 : 2008.11.16 (일) 10:00~18:00
- 얼마나: 2008.11.16 11:00~16:30
- 날 씨 : 맑음
- 몇 명: 홀로
- 어떻게 : 자가용 이용
▷박제상유적지-치산서원-수왕사-충효사-법왕사-망부석-치술령-망부석-은을암-비조
- 개인산행횟수ː 2008-31[W산행기록-210P산행기록-350/T700]
- 테마: 답사산행
- 호감도ː★★★★
고개 이름같은 치술령이 산 정상석으로 새겨져 있는 치술산은 신라 만고충신 박제상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얼마나 그가 충신이었는지를 드높이다보니 그의 부인과 두 딸이 신神의 반열에 오른다.설화라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좀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설화의 속성상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앞뒤가 안맞는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다.그렇지만 설화는 역사를 파악하는 좋은 파편의 흔적은 분명히 된다는 측면을 간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화라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그 역사적 사실성이 담보된 것이기에 산행 곳곳에서 만나는 박제상과 그 부인의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먼저 박제상에 대한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을 소개하면서 실제 탐방한 것과 비교를 해보고자 한다.
박제상(朴堤上, 363~419)은 417년 삽량주(삽良州)의 간(干)으로 있다가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 삼국유사에는 寶海)를 지략과 계교로 데려왔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자 미사흔(未斯欣: 삼국유사에는 美海)을 고국으로 탈출시켰으나, 일본군에게 잡혀 기시마[木島]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살해당하였다. 왕은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둘째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켜 그 충절에 보답하였다. 부인 또한 열녀로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망부석(望夫石)으로 변했다고 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좀 더 상세히 소개해 본다.
4세기말 내물왕(재위기간 : 356~402)은 석씨계열 왕조를 대신하여 경주 김씨 계열의 왕조로 교체하였지만, 백제와 가야 왜국으로 구성된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실성왕 1년402년에는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을,왜국으로 보냈으며,412년에는 내물왕의둘째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볼모로 보냈다.
나중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만 이때만 해도 약소국가의 비애를 절실히 느끼고 있던 시절이다.
그에 따라 눌지왕은 당시 양산(梁山)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삽량주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박제상을 기용하였다.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왕의 5대손인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강직하고 계책이 뛰어나기로소문난 인물이었다.
눌지왕은 고구려가 후원하였던 실성왕을살해 한 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복호를 귀국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지만, 눌지왕이 외교사절을 청하자 망설임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의 왕이 누가 되느냐 보다 과연 고구려와 얼마나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박제상 역시 그러한 고구려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제상은 고구려의 장수왕과 대면한 자리에서 '질자(인질)를 교환하는 것은 말세에나 있는 매우 안좋은 풍습이며, 지금 우리왕이 형제를 매우 그리워 하고 있기 때문에 대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준다면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였다.
박제상 역시 '고구려는 대국이며 임금역시 어질어서 대화로써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대화로 해결할 수 없으니 거짓 모책으로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한다'고 눌지왕에게 아뢰었다.
현재 울산 광역시 울주군해발 700m정도의치술령에는 망부석 전설이 전해려오는 바위가 있다.
박제상이 일본 왕의 회유를 뿌리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며 충절의 죽음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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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유적지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먼저 기념관부터 관람을 하였다.
기념관 앞에는 의미를 둔 설정인지는 모르지만 박제상의 부인 김씨(貞烈夫人)와 두딸이
문밖에서 기다리는 모습의 삼모녀상이 있고 기념관 뒤쪽에는 추모비가 있다.
기념관 우측에는 치산서원이 있는데 여기서 치산이라는 것이 치술령이 있는 치술산의
옛 이름으로 느껴진다.치산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산행에 나선다.치산서원에서
얼마 오르지 않아 삼사백년된 노거수가 있는 수왕사라는 사찰이 나오고 여기에
박제상과 관련된 사적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는 박제상의 부인과 두딸이 모두 정절사貞節死라고 하여 모두 죽은 것으로 나와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즉 눌지왕이 박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켜 그 충절에 보답하였다고
하였는데 앞 뒤가 맞지 않는다.살아있는 미사흔과 죽은 둘째딸과 결혼 시켰다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이후 신라왕이 신모사神母祠라는 사당을 치술령에 세운 것으로 나와있다.
내가 굳이 치술령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치술산으로 명명한 것은 충효사 절 입구에 있는
치술산에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나의 생각은 치술령은 고개일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 때문이다.
얼마나 가물었는지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냈고 법왕사까지는 임도의 형태로
등산하는데 있어 별로였지만 법왕사 이후부터 제대로 된 산행 이랄 수있다.
오후가 되니 강한 햇살이 나무와 부딪히며 만추의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작은 도마뱀으로 보이는 한 마리가 산책을 나왔다.
도마뱀은 파충류이고 도룡뇽은 양서류로 도마뱀은 혀가 뱀처럼 갈라져 있고,
도룡뇽은 혀가 개구리 처럼 생겼기 때문에 혀를 낼름거리는 모습을 보고자 기다렸지만
녀석은 내마음과는 상관없이 과묵하기만 하다.
드디어 치술령으로 보여지는 고개에 도착하니 망부석이 있다.
이 망부석이 있는 고개가 치술령으로 느껴진다.
산 정상인 치술산은 여기서 우측으로 200M 더 올라야 한다.
산 정상에 오르니 신모사지라는 신모사 사당 터가 나온다.
정말 이곳이 신모사 사당터였을까?
산의 정상이라는 것은 산신山神의 머리와도 같은 의미이다.
치술산 산 정상에 사람으로 시작된 신모의 사당을 정말 올렸을까?
우리나라 심성이 정말 그토록 위아래가 없는 민족인가?
분명 옛기록에는 "치술령의 신모"라고 되어있다.치술령의 령은 고개령이다.
고개에 사당을 세우는 것은 정말 흔한 일이다.대부분의 사당은 고개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산 정상에 이렇게 신모사지를 세웠다고는 쉽게 수긍이 가질 않는다.
그리고 바로 산 정상 2~3M 아래에 경주방향 망부석이 또 있다.안내판을 읽어보니
이곳이 가장 바다가 잘 보이는 지역이라서 이 바위가 망부석일 것이라고 추측한다는
내용이다.오늘은 박무로 바다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일단 조망이 좋은 것은 맞다.
박제상 부인이 어디 바다구경하고 조망하려고 이곳에 올랐을까?
아마도 허겁지겁 빠른 걸음으로 올라서 숨이 가빴을 것이고,고개마루에 올라
바다를 보았을 것으로 느껴진다.
혹시 치술령이 과거 현재 서낭재라는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낭재는 "서낭당이 있던 고개"로
서낭당은 산신당 [山神堂]의 의미가 있고 신모사도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비조와 은을암의 사이에 치술령이 있었고 그 치술령에 신모사 사당이 있었다는 가설이 맞지 않을까?
몸은 망부석이 되고 혼은 새가 되어 찾아 갔다는 곳,새가 숨었다는 바위인 은을암을 찾았다.
은을암隱乙庵에 은을암隱乙巖이라는 바위굴이 있었다.
애절함이 극에 달했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망부석이라는 돌이 되었다는 의미는 이해되지만
현대적 감각으로 생각해보면 아무리 애절해도 실제 사람의 몸이 돌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박제상은 스스로 배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그것을 일본에게 믿게 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은 물론 미사흔의 가족역시 옥에 가두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고 한다.에서
유추를 해보면...
아마도 박제상 부인과 두딸은 옥에 갇혔다가 미사흔이 일본에서 돌아오고 박제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 박제상의 부인과 두딸을 풀어주었을 것이다.
이후 박제상 부인과 두딸은 돌로 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혹시 은을암이라는 바위굴에
몸을 숨긴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며 은을암에서 비구니승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여하튼 이후 "신모神母"로서 추앙되면서 박제상 부인이 태어난
곳은 비조飛鳥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조마을로 내려오니 노란 단풍잎이 흩날리며 그 처연함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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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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