芙蓉堂聽雨 (부용당청우) /金雲楚(김운초) 

- 부용당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읊다 -

明珠一千斛 (명주일천곡)
옥구슬 일천말을

遞量琉璃盤 (체량유리반)
유리 쟁반에 쏟는구나

箇箇團圓樣 (개개단원양)
알알이 동글동글

水仙九轉丹 (수선구전단)
신선의 환약이런가

 
 

#한자공부

 
 
 
 
 

*풀이


운초 김부용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4살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11살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한 문재로 알려지기도 했다. 11살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은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영특하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으며, 그의 나이 19살때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 평양감사 김이양 대감에게 소개되는 인연을 가졌다. 그때 김 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다.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고, 정식 부실(室)로 삼았다.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고,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달라’ 했다 한다. 49년의 짧은 생애동안 그녀는 운초시집, 오강루(五江樓) 등의 문집에 한시 350여 수를 남겼다.

.....
김운초 선생은 남편 김이양이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한가한 생활을 하며 다정하게 지냈으며, 두 사람은 나이를 떠나 서로의 시(詩)세계를 이해하면서 깊은 애정을 나누었는데, 이 시는 그때 지은 작품이다.

부용(芙蓉) 김운초(金雲楚, 1800? ~1890?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으로 평북 성천의 기생이었다가 뒤에 이조판서를 지낸 연천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매창, 황진이와 더불어 부용은 조선시대 3대 명기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금원 김씨(錦園 金氏)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瓊春) 등 당시 여류문인들과 함께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김이양의 나이 77세 때(1831년) 그의 소실이 되어 약 15년 간 성천과 한양에서 각기 생활했는데, 그녀가 연천을 애도하는 시에서 “15년 함께 지내오다 오늘 돌아가시니 백아가 이미 끊은 거문고 내 다시 끊노라.” 라고 슬피 읊었다. 247편의 시가 전하며, 저서로 시집 운초시고(雲楚詩稿)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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