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夢覺時(몽교시)~꿈을 깰 때 覺 ~" 깨달을 각,깰 교"로 두가지 뜻이 있음에 주의하고 여기서는 "몽각시"가 아닌 "몽교시"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 박영[朴英]
박영[朴英, 1471(성종 2)~1540(중종 35)]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송당(松堂)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이조참판 수종(壽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고 한다. 1487년(성종18) 이세필(李世弼)의 막하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는데,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을 거느리고 낙향하여 낙동강변에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건 집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 등의 경전을 학습하였는데, 특히 격물치지에 힘써 깨닫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옴으로써 기묘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는데, 김억제(金億濟)의 모함으로 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꾸몄다며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무고임을 극력 주장하여 풀려났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송당집』(松堂集)·『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있고, 의술에도 해박하여 『경험방』(經驗方)·『활인신방』(活人新方) 등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