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사) 장유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 長游和尙舍利塔을 찾아서

-.일시 : 2007.7.17
-.날 씨 :대체로 맑음
-.몇명:3명

-.어떻게:자가용 이용 자녀와 함께
-.일정:장유사-범방동 삼층석탑
-.테마:답사나들이



올해까지만 제헌절은 국경일로 공휴일이 되어 쉰다. 내년부터는 법정공휴일에서 빠지게 된다.방학을 한 자녀들과 함께 장유사를 찾아보기로 했다.돌아오는 길에 범방동 삼층석탑도 둘러보고....아들과 딸은 고행스런 답사 나들이가 될까 두려워 일정을 꼼꼼히 살핀 후 따라 나선다.

차를 몰아 장유사 입구 계곡에 도착하니 장유계곡은 물놀이 하는 인파로 인산인해이고 장유사 까지 차량도 통제를 한다.아마도 장유사 신도는 출입이 허락되는 모양인데 계곡 입구에서 걸어서 4.5KM를 걷는다는 것은 다소 무리다.



관리하는 분들은 평일날 오라고 하고 혹은 행락객들이 별로 없는 겨울에 오면 차량을 통과 시켜주겠다고 한다.직장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평일날 오냐고 하소연하니 승용차 뒤에 물놀이 기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승용차를 안으로 들여보내준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단층을 이룬 바위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장유사는 원래 왕후사였다.경상남도 김해시
불모산(佛母山)에 있었던 절로 혹은 임강사(臨江寺)라고도 한다.가락국(駕洛國) 질지왕 2년(452)에 가락국
의 시조 수로왕의 8대손인 질지왕이 시조비 허왕후(許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장막을 치고 합혼(合婚)한 곳에 이 절을 세웠다.5백년 뒤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우면서 이 절을 폐하여
장사(莊舍)로 만들었다가 다시 절로 환원하였다고 한다.



왕후사 5백년 뒤 그 자리에 창건된 절이 장유사이다.이 때 장유사에는 3백결의 전지(田地)가 있었는데,
왕후사가 이 안에 있었으므로, 이를 장사(莊舍)로 사용하였다. 장사란 사원(寺院)이 가진 전장(田莊)을 관리
하기 위하여 설치된 사택(舍宅)이다.



한편으로는 가락국 수로왕 7년(48)에 인도 아유타국(阿隃陀國)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長遊)가 허왕후를
따라 이 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경내에는 장유화상사리탑(長遊和尙舍利塔)이 현존하는데, 이 탑
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절의 입구에 왕후사 터가 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절 입구의 공터는 주차장으로 사용되어지는 그곳을 말함인지는 잘 모르겠다.

 

절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장유화상 사리탑을 가기위해 계단을 오른다.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장유암이 소유하고 있다.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처남인 장유(長游:본명
허보옥)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석조팔각사리탑(石造八角舍利塔)으로, 질지왕 때 장유암을 재건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암자와 관련 유물은 거의 소실되었다. 석탑의 크기는 높이 241
㎝로, 팔각기단 위에 팔각의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和尙舍利塔

사리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유사 대웅전의 용마루가 보이는데 말 그대로 용의 모습이다.

 

 

 

 

 

사리탑을 내려와서 절 입구의 누각으로 일주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과 종이 달려있어 다양한
역할이 주어져 있다.

절의 안쪽 삼성각에 올라 내려다 본 모습이다.

대웅전 앞 마당이 산세에 대비해서 보면 제법 넓은 편이다.

 

 

 

 

 


돌아 오는길에 본 범방동 삼층석탑이다.풀이 무성하고 잘 관리가 안되는 모습인데 이곳 지명이 된 탑동마을
주민들의 무심함이 다소 아쉽다.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최근에 만든 탑동마을을 알리는 범방동 삼층석탑은
잘 못된 것이다.


실제는 아래와 같다.1989년에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사찰은 없고 높이 2.7m 정도
인 석탑만 남아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중기단(二重基壇)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이다.
상층 기단의 면석
(面石) 한 장과 3층 옥신석(屋身石)이 없어지고 탑 두부는 노반이 남아 있다. 하층기단은 너비 180㎝, 높이
45㎝로 지면에 귀기둥과 중간기둥 한 개씩 새기고 두꺼운 갑석을 얹었으며, 상층기단은 너비 90㎝, 높이 65
㎝로 각면에 귀기둥과 중간기둥을 새기고 얇은 갑석을 얹어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
(屋蓋)를 단일식으로 만들었는데, 옥신석에는 귀기둥을 새기고 옥개석에는 위에 1단의 굄과 아래 4단의 받침
이 있다.



이 탑은 가락국(
駕洛國)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 때 절을 지으면서 만들어진 석탑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탑의 구성과 각부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북쪽에 법당 자리로
짐작되는 높이 2m 정도의 평지가 있으나 축대나 계단 같은 시설이 남아 있지 않고 사찰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1940년 무렵 이 탑의 1층 탑신에서 사리(
舍利) 장치와 기단 안에서 불상 1구가 도굴되면서 탑도
파괴되어 다시 세웠다.

 



장유라는 지명의 어원은 가락국의시조인 수로왕의 처남 허보욱이 허왕후를 따라 이 나라에 와서 장유산에 절을 세우고 입적하시어 장유화상이라고 불리며 장유사 사리탑이 있으며 그연유로 장유촌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종25년에는 장유면8개리(부곡,유하,내덕,무계,대청, 삼문, 신문, 관동)와 수남면 4개리(율하, 장유,응달, 수가)로 나었다가 1914년 합병되면서 오늘날 장유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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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 흐르는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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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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