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산▲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

 

- 언제 : 2005.12.24
- 얼마나: 2005.09.30~15:00(5시간 30분)
- 날 씨 :쾌청,약간 추운정도,위로 갈수록 잔설
- 몇명: 21명
- 어떻게 : 청산산우회 따라서
▷산장식당-자옥산-전망대-도덕산-배티재-452M-491M-518M-월성이씨묘-옥산지-
정혜사지13층석탑-독락당-세심대-옥산서원

- 개인산행횟수ː 2005-35 [W산행기록-128/P산행기록-270/T616]
- 테마:원점회귀 능선산행,문화유산답사 산행
- 산높이:도덕산 704m
- 좋은산행 개인호감도ː★★★★★

 

 

두달만에 나서는 산행이지만 징검다리 건너듯 띄엄띄엄한 점까지 고려하면거의 4개월만이라고 보아야겠다.원래 계획은 한라산 심설산행이었는데 눈이 온 것은 좋았으나 너무 많이 와서 입산금지가 될 지경이 되어버렸다.

2005년 세모에 무엇을 그리 많이 묻어버리고 싶었을까? 도덕산을 가다보니 최근우리를 놀라게한 윤리문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전세계를 상대로 한 이번일은 한국인이라면 낮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요즘 회사도 정도경영이라는 모토아래 윤리는 곧 가치이며 고객이 회사에 갖는 믿음이며 그래서 생산성이 되는 세상이다.

정치가는 모든 안좋은 상황에서 잘 된것 하나를 가지고 생색을 낸다면,학자는 모두 잘 된것 중에서도 잘 못된 하나를 꺼집어 내는 사람이다.그런데 이번의 논문조작 사태를 보면 논문에 기여하지도 않았는데 논문에 이름이 올라있고,2개를 가지고 11개로 뻥튀겼으니 새로운 영역의 멀티플레이어인 "학자정치인"이 탄생한 것이다.그래서 말도 고상하다."인위적 실수"라고했으니 인위는 실수를 건너지 못하고 실수는 인위를 건널 수 없지만 이런 표현은 학자정치인 만이 가능한 화려한 수사가되었다.

언어의 마술사인 언론은 진실을 파헤치고, 학자는 진실보다는 언어를 마술처럼 조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능력면에서는 정말 대단한 나라에 살고 있다.여기에 한가지만 더 합치면 세계최강이 될 것이다.그것은 윤리다."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love of truth is error's safeguard").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2005년 세모에서 희망은 안고가고, 오류를 진리로 바꾸는 능력만은 버리고 가자

 


09:30
옥산서원 앞 주차장에서 내려 산장식당을 좌로 끼고 바로 오른다.이번산행은 원점회귀산행이라서
우측으로 돌게되어있다.도덕산을 지나 봉좌산 정도까지 가면 중간쯤 돌게되고 어래산을 지나면
원래의 출발지점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모두들 재빠르게 오르는데 나는 오랫만에 산행에 나서서
헛구역질을 하는 등 산과 일체되는 과정을 밟는다.

 


10:20~46

이미 다른분들은 시야에서 멀어졌다.이렇게 되면 2시까지는 걷다가 중간쯤에서 하산해서
문화유산답사나 할 요량으로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천천히 오른다.낙엽위로 눈이 내려 낙엽은
오그라들었다.그 모습이 전병같다.아이젠을 착용할 만큼 미끄럽지는 않아 좋다.자옥산을 지나
전망대에 올라 맞은 편 어래산을 조망해본다.발 아랜 옥산지의 푸른 물빛이좋다.산세의 흐름이
창녕 영축산 만큼은 아니지만 명당의 분위기를 갖추었다.

 

 

 

10:48~11:46
까끔씩 보이는 바위와 잔설을 빼면 일정한 리듬이 느껴지는 산길이다.수종이 풍부해서 조망이
잘 안될 정도이고 약간 오르막이라고 느끼며 오르니 바로 도덕산 정상이다.잔설 위로 도덕산
정상석이 머리를 내밀고 있고 그 위로 산악회 시그널이 성황당의 오색천 처럼나부끼고 있다.

 

 


02:20
배티재를 넘으니 여기부터는 낙동정맥길인데 좌측으론 천장산이 보이고 그아래 임도위로 쌓인 눈이
그늘과 대조를 이루며 눈썰매가 지나간 자리같이 또렷하다.

 



14:11
임도를 지나 452M 산길 중간의 30CM쌓인 푹신한 낙엽위에 자리를 깔고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491M봉을 오른다.산길이 뚜렷해서 길을 잃을 위험은 없어 좋다.그러나 이렇게 뚜렷한 산길에서
마지막 518M봉을 넘은 다음길을 잘 못 들은 것 같다.518M봉을 넘은 다음 산길을 따라 우측으로
꺽은 길이 하산길이 되어버렸다.그래서 어래산은 계획에 없었지만 원래 가고자했던 봉좌산과
364M봉을 오른 후 민내로 하산하려던 계획은 전술적으로 바뀌게 되고 옥산지로 내려오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게 되었다.


산세가 둥글게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으며, 그 중간 탯줄같은 산세를 타고 내려온 곳이다.
그래서 이곳이 명당의 분위기를 보이는데 경주 이씨묘와 월성이씨묘의 자리가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옥산지로 내려오는 산길은 다소 경사는 졌지만 동양화에서나 볼수있는
휘어지고 굽은 굵은 소나무들이 체모처럼 아치를 이루고 있어서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머리 이전에 나의 발이 더 좋은 곳으로 안내를 한 모양이다.옥산지는 얇게얼음이 얼어있었고
가장자리의 나무들은 얼음이 테를 이루고 있어서 또하나의 볼거리였고 산위에서 볼때 보다는상당히
큰 농업용 저수지였다.

 


14:42
실제적인 산행은 마무리되었고 이제 부터는 문화유산답사의 시간이다.정혜사지 13층석탑은
내가 여태 보지 못했던 형태라서 신기로웠다.


정혜사지 십삽층석탑

 

통일신라, 8세기 중엽.현재 높이 5.9m, 국보 제40호.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우리나라에서는
묘향산 보현사 8각13층 석탑을 제외하면 10층 이상의 탑으로는 유일하다.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파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탑이다.정혜사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 석탑만 남아있는데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뒤쪽에 있다.


원래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중국적인 탑이라고 한다. <동경통지>의 기록에서도 이 절의 창건에
중국인이 관여한 것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중국 황실의 안녕을 위해 지은
망덕사 동서 쌍탑이 13층이었다고 하는 걸로 보아 중국과 연관이 있는 곳에서만 나타나는 양식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탑은 전탑인데, 벽돌이라는 재료의 특성 때문에 지붕의 처마를 길게 내지 못하고 탑신의
체감도 화강암과는 틀리기 때문에 다층의 구조가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10층 이상 특히 13층의 탑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근거로 정혜사지 석탑을 그 층수의 면에서는 중국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참고 : 강우방,신용철/ 『탑』

 



14:49
조금 더 걸어내려오니 바로 독락당이다.독락당은 현재 종가집으로 쓰이고 있고 또한 한창 보수 중이라서 들어가기 뭣했지만 계곡 옆으로 집이 지어져있고 독락당 뒤쪽은 키큰 나무들이 운치를 더했다.

 


독락당

은둔자의 자족 공간으로 지은 독락당은 인간 세상을 향한 의례적인 정면과는 별도로 자연계로 열린 실질적인 정면을 두고 있다.즉 독락당과 계정은 계곡쪽으로 향해있다.

회재 이언적이 정치적 시련기에 은둔하던 독락당은 그래서, 폐쇄적이고 은밀한 공간 구성을 띠고 있다. 집터, 건물, 기단, 지붕 등은 바닥에 한껏 붙어 있으면서 안채, 사랑채, 계정, 공수간 등은 미로처럼 엮여 있다. 회재가 주로 사용한 독락당과 계정은 안채보다도 은밀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은 자연 세계로 향해 있다. 정치적 시련기를 맞아 두문불출하던 시기, 회재의 삶과 정신이 오롯이 배어 있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별서(別墅)이다. 회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퇴계 이황의 사상적 스승이자 동방오현의 한 사람이다. 독락당이 세워진 옥산리 터에는 원래 그의 부친이 세웠던 정자가 있었다. 회재는 당시 풍습대로 25세(1515년) 때 소실을 들였는데 소실이된 석씨 부인이 시집오면서 이곳에 독락당의 안채와 행랑채를 건립했다.

독락당의 본격적인 경영은, 그가 사간으로 있으면서 훈구 세력 김안로를 탄핵하다 파면당해 다시 옥산으로 내려온 40세부터이다. 옥산에 내려온 후 한동안은 그냥 지내다가 1532년 사랑채를 짓고 독락당이라고 이름하고 부친의 정자를 고쳐 계정이라 하였다.

14:57
독락당 앞에는 잠계공기적비 회재 이언적의 아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의 기적비(紀蹟碑)가
있는데 기적비 앞의 속이 빈 고목에 더 눈이간다.

 



15:23
버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옥산서원으로 간다.옥산서원을 거너가려면 자계천변을 건너야하는데
이곳 계곡의 운치도 볼만하다.이곳이 바로 마음을 씻는 세심대이다.세심대에서 보면 자그마한
운치있는 폭포가 하나있는데 이 폭포의 이름이 용추폭포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은 아름다운 계류인 자계(紫溪)를 끼고 있다.그래서 서원에 들어 가자면
다른 서원과는 달리 들어 가는 초입부터 넓은 바위들과 작은 폭포가 있는 계류를 건너야 한다.

지금은 외나무 다리가 걸려 있는 옆, 넓은 바위가 세심대 (洗心臺) 이고 그 옆 작은 폭포 밑의 소를
용추라 하는데 두 곳 모두 퇴계 선생이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너른 바위 위로 나무들이 휘늘어져있고 곧 옥산서원이다.정문은 닫혀있어서 역락문을 들어서지는
못했다.큰길로 나오면 현재도 누군가 살고 있는 집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서원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다.이곳에 누각인 무변루(無邊樓)가있고 서원 안마당에 서면
역락문(亦樂門)이 있다.

 

무변루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하는데이 무변루의 건축 방식이 특이하다.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글이 있는 곳까지 올라 서 보면 서원 밖의 풍광을 볼수 없도록 막아 버린 모습이다.


서원 바로 앞이 아름다운 계곡이라서공부에 방해가 될까봐요즘의 독서실처럼 밀폐시켜버린 것으로
보인다.


옥산서원의 당호는 원래 선조가 이산해에게 쓰게 하여 사액하였는데 그 현판은 지금 강학당창방
안 쪽에 걸려 있고 화재 후 헌종이 추사 김정희 로 하여금 쓰게 해서내린 현판이 지금 밖에 걸려 있다.
사진 안쪽으로 어둡게 보이는 강학당의 당호 현판 구인당은 한석봉의 글씨다.
서원 뒤 담장을 돌아 가면 사당, 경각, 판각, 어서각, 신도비각 등의 건물이 몰려 있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경각 툇마루에 앉아 해그름의 편온을 즐긴다.신도비는 기대승이 짓고 이산해가
썼으며청분각에는 현존하는 삼국사기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완질본을 포함한 4000권의
주요 장서가 비치 되어 있다고 한다.


굳이 산행이 아니더라도 가족들과 한번 더 오고 싶은 곳이다.산행과 문화유산답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곳이니 이런 곳을 원한다면 파일에 예비산행지로 기록해둘만한 곳이다.

 

 

 

 

 

 

 

 

 

 

 

 

 

 

 

 

 

 

 

登山
初等上面 一步更難一步
及趨下面 徒自擧足 而身自流下
豈非從善如登 從惡如崩者平
초등상면, 일보갱난일보
급추하면, 도자거족, 이신자류하
개비종선여등, 종악여붕자평
-조식(曺植, 1501-1572), “유두류록(遊頭流錄)”

처음 위쪽을 오를 때는 한 걸음에서 다시 한걸음 딛기가 어렵더니
아래 쪽으로 내려올 때는 그저 발만 드는 데도
몸이 절로 흘러내려왔다.
어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따름은 무너져내림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19:00
집에 돌아와보니 2개월간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시험의 발표를 보니 좀더 참된 인간이 되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고난이 있을때 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지만 머리가 텅비는 느낌이
기분 좋을리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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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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